이례적 행보…힌남노는 왜 그렇게 움직였을까? [이원주의 날飛]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9월 5일 14시 4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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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는 5일 정오를 기준으로 작성됐습니다. 이 글을 보고 계실 어떤 독자분은 이미 거센 태풍을 겪고 계시거나 이미 겪어내셨을 수도 있을 겁니다. 태풍의 길목에 계시다면 부디 안전하시길, 태풍이 지나간 이후라면 부디 조금이라도 덜 마음아프시길 간절히 바라겠습니다.

우주에서 찍은 태풍 힌남노의 8월 31일 현재 사진. 미우주항공국(NASA)


힌남노가 우리가 경험해보지 못 했던 위력을 가지고 한반도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당초 일본보다 먼 태평양 어딘가에서 그저 ‘지나가는 태풍 1’로 끝날 줄 알았던 힌남노는 매우 희한한 경로로 움직이면서 우리나라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이번 ‘날飛’에서는 태풍 힌남노가 왜 예상과는 전혀 다른 경로로 이동하면서 힘을 키웠는지 살펴보겠습니다.


○ “지나가는 태풍될 것” 예상과 달리 ‘괴물’된 힌남노
태풍 힌남노의 이동 경로. 기상청
태풍 힌남노의 이동 경로. 기상청


2022년 8월 28일 오후, 일본 오사카에서 동남동쪽으로 약 1700km 떨어진 북위 26도, 동경 150도 부근 태평양 먼 바다에서 심상찮은 폭풍이 감지됩니다. 이 폭풍은 태어난 지 하루 만에 열대저압부→열대성 폭풍(TS)→강한 열대성 폭풍(STS)으로 빠르게 자라나며 24시간 만인 29일 오후에 초속 18m의 강한 바람을 만들어내고 ‘태풍 지위’를 받습니다. 올해 발생한 22번째 태풍 ‘힌남노’가 탄생한 순간입니다. 우리나라는 초속 17m 이상의 바람이 부는 폭풍을 태풍으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힌남노가 탄생한 순간의 일기도. 기상청
힌남노가 탄생한 순간의 일기도. 기상청

이때만 해도 힌남노가 지금과 같은 경로로 이동할 거라는 예측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 기상청뿐만 아니라 일본, 미국, 유럽 등 세계 각국 기상 기관도 힌남노가 서쪽으로 적당히 진행하다가 자연스레 소멸되는 시나리오를 주로 예상했습니다.


힌남노가 발생한 직후 한중일 3국의 경로 예보. 3국 간 경로가 다소 차이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각국 기상청
힌남노가 발생한 직후 한중일 3국의 경로 예보. 3국 간 경로가 다소 차이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각국 기상청


예측이 비슷했던 이유는 간단한데, 힌남노 경로 북쪽으로 어마어마하게 큰 고기압 기단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힌남노의 위력이 그다지 강해지지 않는다는 예상이 주류였던 이 당시만 해도 힌남노가 이 고기압 기단을 뚫고 올라올 확률은 희박해 보였습니다.


힌남노가 태풍이 된 이후인 30일 오후 9시의 일기도. 위쪽에 거대한 고기압이 장벽처럼 가로막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기상청
힌남노가 태풍이 된 이후인 30일 오후 9시의 일기도. 위쪽에 거대한 고기압이 장벽처럼 가로막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기상청

동쪽으로는 북태평양고기압, 서쪽으로는 티베트 고기압의 세력이 확장해서 겹쳐진 이 거대한 고기압은 어지간한 태풍으로도 뚫을 수 없는 거인 같은 존재였습니다. 통상 태풍은 그저 북태평양 고기압의 ‘가장자리’를 따라 움직일 뿐입니다. 하지만 태풍의 위력이 세지는 동시에, 두 고기압의 연결고리가 약해지면 얘기는 달라집니다.


31일 오후 3시의 힌남노 위치. 고기압 사이를 끊어버릴 것처럼 짓누르고 있습니다. 기상청
31일 오후 3시의 힌남노 위치. 고기압 사이를 끊어버릴 것처럼 짓누르고 있습니다. 기상청

힌남노는 서쪽으로 이동하면서 그 어떤 방해도 받지 않았습니다. 거기에다 이례적으로 3년째 계속되고 있는 라니냐 영향으로 힌남노 경로의 해수면은 25도 이상의 뜨끈뜨근한 상태를 유지했습니다. 이 뜨거운 해수면의 수증기를 먹고 힌남노는 예측 이상으로 세력을 키웁니다. 31일 오후 915헥토파스칼까지 위력을 키운 힌남노는 결국,


9월 1일 오후 3시의 힌남노 위치. 기상청
9월 1일 오후 3시의 힌남노 위치. 기상청

두 고기압의 연결을 끊어내고 북쪽으로 나갈 수 있는 길을 열어젖힙니다. 서쪽으로는 티베트고기압이, 남쪽과 동쪽으로는 북태평양고기압이 길을 막고 있습니다. 힌남노가 갈 곳은 오직 북쪽 뿐입니다.

힌남노는 이제부터 정석적으로 ‘북태평양 고기압의 가장자리’를 따라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두 번째 변수가 발생합니다. 태풍은 북태평양고기압의 가장자리를 따라 흐르지만, 그 위력이 강할 때는 북태평양 고기압과 어느 정도 싸우면서 움직입니다. 즉, 북태평양 고기압을 ‘누르면서’ 움직입니다. 태풍과 북태평양고기압의 이 기싸움에서 누가 우세를 보이느냐에 따라 태풍의 진로가 수정됩니다. 북태평양고기압이 우세일 때는 북쪽으로, 태풍이 우세일 때는 남쪽으로 진로가 치우칩니다.


4일 오후 9시의 힌남노 위치. 지구 자전의 힘을 받아 동쪽으로 이동하면서 북태평양 고기압을 짓누르는 모양을 볼 수 있습니다. 기상청
4일 오후 9시의 힌남노 위치. 지구 자전의 힘을 받아 동쪽으로 이동하면서 북태평양 고기압을 짓누르는 모양을 볼 수 있습니다. 기상청


○‘이상 기후’ 탓…태풍도 ‘비정상적’ 행보 보여

힌남노의 경로는 이례적이지만, 이런 태풍이 없었던 건 아닙니다. 그 해 날씨가 유난히 덥든 유난히 덜 덥든 뭔가 이상한 해일 경우, 그러니까 우리가 ‘이상기후’라고 말하는 그런 현상이 나타나는 해일 경우 태풍의 진로가 비정상적인 경우도 눈에 자주 띄게 됩니다. 한반도가 폭염에 뒤덮였던 2018년 태평양에서 연달아 발생한 9~12호 태풍의 진로는 모두 ‘비정상적’인 형태였습니다.


2018년 발생한 태풍 9~12호의 비정상적인 경로. 기상청


올해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그러들 기세가 보이지 않는 라니냐 현상은 이례적으로 길었습니다. 그로 인해 7월 상순은 이상하게 더웠고 7월 중순은 이상하게 시원했습니다. 그리고 그 뜨거운 바다는 결국 ‘슈퍼 태풍’ 힌남노를 만들어냈습니다.

이유가 무엇이든, 지금 가장 중요한 건 우리의 생명과 재산을 최대한 지켜내는 일입니다. 읽어주신 독자분들도, 읽지 않으신 모든 분들도 피해 없으시길, 덜하시길 간절히 기원하겠습니다. 태풍 때문에 비상근무 중인 기상청에서 최근 실시한 대언론, 대국민 브리핑 때 언급한 당부를 인용하며 오늘 기사를 마치겠습니다.
“지금 보여드리는 이 숫자들 하나하나에 많은 사람들의 슬픔과 회한이 담겨 있습니다. 이 슬픔과 회한이 다시 찾아오지 않도록 철저히 대비해주시기를 부탁드리고, 부디 안전한 곳에 머무시기를 부탁드리겠습니다.”

ㅡ이광연 기상청 예보분석관 (4일 온라인 브리핑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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