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쓰는 우리 예절 2022 新禮記]
하이브리드 명절 문화로… “車 막히는 추석당일 모임, 꼭 고집할 필요 있나요”
삼남매 중 맏이로 전남 여수에 사는 김모 씨(51)는 경기도에 사는 동생 가족들과 추석 연휴(9∼12일)가 아닌 2주 뒤 주말에 만나기로 했다. 삼남매가 “꼭 명절 당일 모임을 고집할 필요는 없다”고 의견을 모았기 때문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유행으로 2년간 ‘비대면 명절’을 경험한 삼남매의 부모님도 “자식들이 차 막힐 때 운전하는 게 더 걱정”이라며 흔쾌히 받아들였다. 김 씨는 “연휴에는 재충전을 하고, 앞으로는 명절 전후로 온 가족이 여행을 가거나 집마다 돌아가며 모이려 한다”고 말했다.
올 추석은 ‘코로나19 사회적 거리 두기’가 2년 만에 완전히 사라진 첫 명절이다. 하지만 ‘코로나 이전 명절’로의 복귀와는 다른 움직임이 감지된다. 김 씨 가족처럼 모이는 시기를 조정하거나 차례 상차림을 바꾸는 등 명절 문화에 ‘변주’가 일어나고 있다.
동아일보가 5, 6일 시민 357명(남성 51%, 여성 49%)에게 ‘기존 명절’과 2년간의 ‘비대면 명절’에 대한 선호도를 설문조사한 결과 49.6%와 50.4%로 팽팽했다. 설문조사와 심층 인터뷰를 통해 기존 명절과 비대면 명절 문화의 장점을 합쳐 살릴 수 있는 ‘하이브리드(섞인) 명절 문화’를 알아봤다.
“차례 동영상 찍어 친척 단톡방 공유”… 대면-비대면 장점 살려 진화
하이브리드 명절 문화 가족-친척 함께 모인 시간 좋지만, 교통체증-음식준비 생각하면 한숨 시민들 설문도 ‘반가움 반-부담 반’… 코로나 인원제한 없어진 첫 명절 ‘역귀성-모임시기 조율’ 혼잡 피하고, ‘차례상 다이어트’로 가사 부담 줄여 “비대면 경험 바탕 ‘타협점’ 찾아야”
“가족들 모여서 복닥복닥한 건 좋은데… 명절 차 막힐 때는 삼천포까지 8시간 걸립니다.”
서울에 사는 직장인 김모 씨(27)는 추석 연휴가 시작되는 9일 경기 광명의 외가에, 10∼11일에는 경남 사천의 친가에 간다. 2년 만이다. 그에게 코로나19 이전 명절은 사촌들과 신나게 놀고 맛있는 음식을 즐기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지난 2년간 집에서 푹 자고 영화를 보는 여유로운 연휴에 익숙해진 나머지 오랜만에 양가 순회를 하려니 막막해졌다.
이처럼 거리 두기가 없는 명절로의 복귀를 앞두고 시민들 마음에는 ‘반가움’과 ‘부담감’이 교차하고 있다.
○ 비대면 명절, 이런 점 좋았는데…
서울 성동구에 사는 조모 씨(32·여)는 코로나19 이전 명절에는 경북 경산의 시할머니 댁에 가곤 했다. 교통지옥을 뚫고 먼 친척들을 만나도 음식을 권하는 것 외에 특별히 할 말이 없을 때가 많았다. 명절 음식 준비로 고생하는 시어머니도 안타깝게 느껴졌다.
코로나19로 큰 변화가 생겼다. 조 씨 가족은 차례는 서울에서 지내고, 차례 장면을 촬영해 카카오톡 가족 단체방에 공유했다. 준비하는 음식도 줄고 외식도 했다. 조 씨는 “길에서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고, 부엌에서 내내 고생하는 사람도 없어서 좋았다”며 “시부모님도 좋다고 느끼셨는지 이번 추석에도 이렇게 지내기로 했다”고 말했다.
이번 설문조사에서도 ‘코로나19로 인한 비대면 명절에서 가장 좋았던 것’(복수 응답)으로 많은 이들이 “교통 체증이나 장거리 운전 등 이동에 대한 부담이 준 것”(44.9%)을 꼽았다. 이어 “차례상 차리기 등 가사 부담이 준 것”(37.4%), “어색한 친척들과 만나지 않는 것”(33.4%) 순이었다.
서울 양천구에 사는 오모 씨(29)의 가족은 지난해부터 명절 차례를 종교 시설에서 하는 행사로 바꿨다. 오 씨 아버지가 10남매라 모두 모일 수도 없고, 여럿이 음식을 나눠 먹기도 꺼려져 한 선택이었다. 오 씨는 “이렇게 바꿔 보니 몸이 편하면서도 (예를 챙긴 것이라) 마음이 불편하지도 않았다”며 “코로나19가 끝나도 이 방식을 유지하기로 했다”고 전했다.
○ 친척 인사 온라인으로…집안 어른이 앞장서기도
이처럼 올 추석은 각 집안 사정에 맞춰 기존 명절과 비대면 명절의 장점을 살린 방식의 ‘하이브리드 명절 계획’을 세운 가정이 적지 않았다. 취재팀이 심층 인터뷰한 16가족 중 7가족이 새로운 명절 문화를 만들고 있었다.
경북 청도에 사는 윤모 씨(71)는 이번 연휴에 처음으로 서울의 아들 내외 집으로 ‘역귀성’하기로 했다. 비대면 명절을 몇 번 보내보니 꼭 ‘전형적인 명절’을 고수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이번 추석 당일에는 미리 산 음식으로 간단히 차례를 지낸 뒤 청와대로 가족 나들이를 가기로 했다.
결혼 후 첫 명절을 맞이하는 직장인 김모 씨(31) 역시 장인 장모의 제안으로 가족 여행을 가기로 했다. 친척들을 찾아가 인사해야 하는 것 아닌가 했지만 코로나19로 온라인 인사가 익숙해진 만큼 직계 이외 가족은 영상통화 등으로 대신하기로 했다.
대면 명절의 예를 다하되 시기를 유연하게 하는 경우도 늘고 있다. 직장인 이모 씨(26·여·서울 강남구)는 지난달 말 부모와 함께 경북 상주의 할아버지 댁에 다녀왔다. 오랜만에 삼촌 가족들과 함께 벌초를 하고 다 같이 외식을 한 뒤 헤어졌다.
○ “코로나로 달라진 현실, 타협점 찾아 진화해야”
기존 명절 문화를 선호하는 이들 중에도 조금씩 변화를 시도하는 사례가 있다. 경기 성남의 최순옥 씨(72·여)는 지난 설에도 모임 인원 6명 제한을 꽉꽉 채워가며 친지들이 교대로 차례를 지냈다. 하지만 이번에는 최 씨도 “음식이 남는 것도 곤욕이라 이제는 반으로 줄이기로 했다”고 전했다.
성균관 의례정립위원회는 5일 “명절 차례상에 기름에 튀기거나 지진 음식을 반드시 올릴 필요가 없다”고 밝혔다. 한국국학진흥원도 “차례상은 간소한 것이 오히려 전통 제례 문화에 맞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부모는 부모 세대끼리, 자녀는 자녀 세대끼리’라는 색다른 구상을 하는 경우도 있다. 서울 강서구에 거주하는 황모 씨(29)는 “코로나19 시기 멀리 성묘를 가지 않는 건 편했지만 사촌들을 보지 못하는 게 아쉬웠다”며 “부모님들은 부모님들끼리 기존 명절 방식을 지키고, 성인 자녀들은 평소처럼 외식을 하며 어울려도 좋을 것 같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전례 없던 비대면 명절 경험을 바탕으로 ‘타협점을 찾아가는 명절’의 모습을 그려야 할 때라고 조언한다. 김미영 한국국학진흥원 수석연구위원은 “3년 가까이 거리 두기, 모임 제한을 경험하면서 차례에 대한 의무감 등 ‘명절 의식’도 많이 바뀌었을 것”이라며 “전통 문화가 지속되기 위해선 현대의 생활양식과 타협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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