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일 오전 10시경 경북 포항시 남구 구룡포시장 입구 앞. 구룡포2리 전원도 이장(70)은 이날 장날을 맞아 시장을 찾은 손님들의 발길을 애써 돌려세우며 억지로 씩씩한 목소리를 냈다. 시장 입구에서 경광봉을 들고 손님을 돌려보내던 전 이장은 “지금 상인들이 복구 작업을 하느라 손님 맞을 겨를이 없다. 9일 하루라도 추석 대목 장사를 하려면 복구 작업을 1분이라도 빨리 마쳐야 한다”고 했다.
이날 추석 연휴를 앞두고 흥정 소리가 넘쳐야 할 구룡포시장은 떠내려 온 쓰레기를 치우는 중장비 굉음으로 가득했다. 시장 안 곳곳에 사람 키 높이만 한 쓰레기 더미가 쌓여 있었다. 구룡포시장의 대표 상품인 생선 등 각종 수산물이 폐사한 채 바닥에 널브러져 시큼한 악취도 진동했다.
○ 시장 15곳에서 상가 1760곳 물에 잠겨
평소 비가 오면 빗물이 인접한 구룡포 앞바다로 흘러갔다. 하지만 태풍 힌남노가 포항을 스쳐간 6일 오전 6시경은 하필 바다가 만조였다. 물길이 막히고 빗물이 역류하면서 시장상가 130여 곳이 물에 잠겼다. 남편과 방앗간을 하는 이유단 씨(47)는 “추석을 앞두고 밀린 주문에 침수 전날 늦은 밤까지 기름을 짜고 고추를 빻았다”며 “폭우로 가게 안이 모두 다 잠겨 팔 수 있는 물건이 하나도 없다”고 한숨을 쉬었다.
강정가게 주인 고상희 씨(72)의 표정도 어두웠다. 고 씨는 “추석을 앞두고 주문량이 상당했는데 손님들과 약속을 지키지 못해 너무 미안하다. 살길도 막막하다”고 하소연했다. 한 과일가게 상인은 “대목을 앞두고 물건을 2배 이상 들여놓았는데 다 물에 잠겼다”며 오물이 뒤섞인 과일상자만 하염없이 바라봤다.
차로 20분 거리에 있는 오천시장은 더 처참한 모습이었다.
6일 새벽 인접 하천이 범람하면서 시장 안은 어른 목 높이만큼 구정물이 찼다고 한다. 상가 110여 곳은 당분간 복구가 어려울 정도로 큰 피해를 입었다. 상인들은 전날 하루 종일 복구 작업에 매달렸지만 여전히 가게 내부까지 흙더미로 가득한 곳도 적지 않았다. 반찬가게 주인 김경희 씨(53)는 “주문받고 포장까지 마친 제사 음식은 말할 것도 없고 대형 냉장고 안 반찬까지 싹 다 침수됐다. 대목 장사를 날린 게 문제가 아니라 앞으로 어떻게 생계를 꾸려 나갈지 걱정해야 할 정도”라고 했다.
포항시에 따르면 힌남노의 여파로 포항 지역 내 전통시장 15곳에 있는 상가 1760곳이 침수됐다고 한다. 주민들은 인접한 영천이나 경산으로 이른바 ‘원정 장보기’에 나서는 실정이다. 권수원 구룡포시장 상인회장은 동아일보 기자와 만나 “9일부터는 시장을 정상 운영할 것”이라며 “주민들이 다른 지역으로 발길을 돌리지 말고 꼭 지역 내 전통시장을 찾아 힘을 보태주면 좋겠다”고 읍소했다.
○ 기업 1조5000억 원 피해 추정
태풍으로 크고 작은 산사태가 나면서 추석을 맞아 오랜만에 고향을 찾은 출향민들도 무거운 심정을 토로했다. 박모 씨(35·대구)는 “오천읍의 야산에 할아버지 산소가 있는데 그 지역에서 산사태가 발생해 건물과 사찰 등이 매몰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할아버지 산소가 피해를 입지 않았나 걱정이 큰데 찾아갈 엄두도 못 내고 있다”고 말했다.
태풍 힌남노는 철강 산업 등 지역 경제에도 큰 피해를 입혔다. 포스코 포항제철소와 현대제철 공장의 가동이 중지되면서 관련 업체 92곳에 약 1조5000억 원의 피해가 난 것으로 알려졌다. 포스코 하청업체에서 근무하는 김모 씨(37)는 “추석 연휴가 다가와도 전혀 즐겁지 않다. 가뜩이나 국제 경기가 좋지 않은데, 이번 태풍으로 회사가 도산하는 건 아닌지 걱정”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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