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스토킹법 시행후 형 확정된 공개판결문 156건 전수조사
헤어진 여친집 찾아가 “분신할 것”
100m내 접근금지 명령 내렸지만 다시 찾아가 경찰 올 때까지 협박
긴급-잠정조치 57명중 46명…연락금지 등 안지키고 스토킹 계속
전문가 “가해자 위치추적 도입하고 스토킹 구속영장 발부 문턱 낮춰야”
지난해 12월 A 씨는 다툰 후 여자친구 B 씨 집을 찾아가 온몸에 기름을 뿌린 뒤 라이터를 들고 “분신하겠다”며 문을 열어달라고 협박했다. B 씨는 경찰에 신고했고, 법원은 A 씨에게 ‘피해자 인근 100m 이내 접근 금지’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A 씨는 이틀 뒤 경기 시흥시 피해자 집을 다시 찾아갔고, 경찰이 출동할 때까지 떠나지 않았다.
‘100m 이내 접근 금지’나 ‘연락 금지’ 등 사법당국이 스토킹 피해자를 보호하기 위해 내리는 긴급응급조치 및 잠정조치의 실효성이 떨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가해자들이 대놓고 이를 어기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가해자 위치 추적을 도입하고 유치장 구금을 확대하는 등 적극적인 가해자 감시 및 관리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 접근·연락 금지 통보하자마자 접근
동아일보 취재팀은 19일 대법원 판결 검색 시스템을 통해 스토킹처벌법이 시행된 지난해 10월 21일 이후 이 법에 따라 형이 확정된 공개 판결문 156개를 전수 조사했다.
그 결과 사법당국이 접근 금지나 연락 금지 등 긴급응급조치 및 잠정조치를 내린 가해자 57명 가운데 해당 조치로 스토킹 범행을 멈춘 가해자는 3명(5.3%)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46명(80.7%)은 조치 후에도 피해자를 찾아가거나 협박하는 등 범행을 이어갔다. 8명(14.0%)은 판결문상 범행 지속 여부가 확인되지 않았다. 긴급응급조치 및 잠정조치를 어기고 범행을 이어나간 비율이 스토킹을 멈춘 비율보다 압도적으로 높은 것이다.
접근·연락 금지 통보를 받자마자 어긴 가해자도 상당수였다. 지난해 11월 C 씨는 여자친구에게 이별을 통보받자 문자메시지 수천 통을 보내고 여자친구 직장 앞을 찾아가며 스토킹을 했다. 법원은 C 씨에게 ‘100m 이내 접근 금지’와 ‘전화, 메시지 전송 금지’ 조치를 내렸다. C 씨는 통보를 받은 지 1분 만에 피해자에게 ‘고소 취하, 반성, 연락 중 하나라도 실행되지 않으면 지인들이 피해를 볼 것’ 등의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D 씨는 올 2월 피해자 집에서 말다툼을 하다 다리미로 자신의 머리를 내리치며 피해자를 위협했다. 출동한 경찰이 긴급응급조치 중 하나인 ‘접근 금지’를 결정했지만 D 씨는 경찰이 떠나고 30분 만에 다시 피해자를 찾아가 흉기로 자해하며 협박했다.
○ “가해자에게 위치 추적 기기 부착해야”
전문가들은 스토킹 범죄 재발을 막으려면 경찰의 가해자 위치 추적을 허용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피해자에게 스마트워치를 지급한 경우 사후 조치는 가능하지만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접근하는 것을 막을 순 없기 때문이다. 6월에도 경기 안산시에서 스마트워치를 받은 피해자가 60대 남성에게 피살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윤호 동국대 경찰행정학과 명예교수는 “가해자들도 경찰이 지켜보지 않는 걸 알고 있기에 스스럼없이 피해자에게 접근하는 것”이라며 “가해자에게 추적 장치를 착용시키고 실시간으로 위치를 추적해야 한다”고 했다.
구속영장 없이 한 달까지 가해자를 유치장에 구금할 수 있는 잠정조치 4호를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올 1∼7월 경찰이 신청한 잠정조치 4호 500건 중 검찰 청구를 거쳐 법원에서 최종 승인된 건 225건으로 절반이 채 안 됐다. 지난달에도 서울 은평경찰서가 옛 여자친구를 5개월간 스토킹하다가 흉기로 협박한 남성에 대해 잠정조치 4호를 신청했지만, 검찰은 ‘초범’이라는 이유로 반려했다.
스토킹 가해자에 대한 구속영장 발부 문턱을 낮춰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스토킹처벌법 시행 이후 현재까지 스토킹 범죄자 중 구속 송치된 비율은 전체의 5.6%에 불과하다.
이와 관련해 이원석 검찰총장은 19일 윤희근 경찰청장과 만나 스토킹 범죄 척결을 위한 검경협의체를 구성하고, 구속수사와 잠정조치를 적극 활용하기로 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