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비권’ 학대범, 부검 결과 언급하자 범행 시인
고양이 17마리 방치하며 학대한 구체 정황 밝혀
동물 부검 수요 증가하는데, 인력·예산 부족해
21일 대구지방법원 포항지원 법정에 선 피고인 A 씨. 법원은 동물보호법 위반과 절도, 재물손괴 등 7개의 혐의로 기소된 A 씨에게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했다. 그는 경북 포항시 한동대 일대에서 길고양이 7마리를 학대하고 잔혹하게 죽인 혐의로 올 6월 경찰에 붙잡혀 재판에 넘겨졌다.
경찰에 따르면 A 씨는 검거 이후에도 범행을 인정하지 않고 줄곧 묵비권을 행사했다. 범행 현장 인근 차량 블랙박스나 폐쇄회로(CC)TV에는 그가 범행 현장을 드나드는 모습은 찍혀 있었지만, 고양이를 죽이는 장면은 없었다.
하지만 재판에서 ‘동물 부검’ 결과를 제시하자 A 씨는 순순히 범행을 인정했다. 부검 결과 A 씨는 주로 고양이들을 발로 밟아 죽게 한 이후에도 사체에 학대를 가한 것으로 밝혀졌다.
최근 동물 학대 범죄가 늘어나면서 동물 부검에 대한 중요성도 덩달아 증가하고 있다. A 씨 사건처럼 동물 부검이 사건 해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사례도 하나둘씩 생겨나고 있다. 경찰도 동물 학대 수사에 동물 부검을 적극적으로 의뢰하는 분위기다. 하지만 전국에서 동물 부검을 담당하는 인원은 2명뿐이라 인력 및 예산을 늘려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부검으로 밝혀낸 동물들의 안타까운 죽음
범행 시기
지역
사건 개요
2021년 6월
경남 경주시
경주의 농장에서 공기총에 맞아 죽은 채로 발견된 진돗개 한 마리. 범인은 “개가 위협해 쐈다”고 답변했지만, 부검 통해 개가 땅에 누워있는 상태에서 총을 쐈다는 사실 드러남.
2022년 6월
대구시
고양이 17마리를 먹이도 주지 않은 채 방치한 집주인. 부검을 통해 굶어 죽은 고양이 숫자와 서로 갉아먹은 흔적 발견.
2022년 7월
경북 포항시
새끼 고양이를 학대해 죽음에 이르게 한 30대 남성. 범행 부인했지만, 부검 통해 살아있는 상태에서 발로 밟아 죽였다는 사실 밝혀내.
●고양이 연쇄 살해범 자백 끌어낸 동물 부검
동물 부검을 통해 A 씨의 범행 정황을 구체적으로 밝혀낸 건 농림축산검역본부 소속 이경현 연구원이다. 이 연구원은 경찰로부터 노끈으로 목이 매달린 채 죽어있는 고양이의 사인(死因)을 밝혀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부검 결과 고양이는 외부 충격 등으로 먼저 사망한 뒤 목이 매달린 것으로 나타났다.
이 연구원은 “동물들은 털로 뒤덮여 있어 외관상으로는 출혈, 찔린 흔적 등을 찾아내기 쉽지 않다”며 “부검 후에 진짜 사인을 찾는 일이 많다”고 했다.
고양이를 죽음에 이르게 한 ‘범행 도구’ 윤곽도 부검으로 드러났다. 이 연구원은 죽은 고양이 체중과 내부 장기 손상 정도를 봤을 때 거대한 둔기가 사용된 건 아니라고 봤다. 경찰이 A 씨의 집에서 수거한 증거품 가운데 범행 도구로 의심 가는 물건이 있었지만, 고양이의 혈흔이나 털 등 범행 흔적이 남아 있지 않았다.
이에 검역본부는 “꼬리를 잡아 몸을 못 움직이게 한 뒤 신발을 신은 채 발로 머리를 밟아 죽인 걸로 추정된다”는 부검 결과를 경찰에 전달했다. 범행을 부인하던 A 씨는 경찰이 부검 결과를 토대로 구체적인 범행 수법을 추궁하자 당황하며 입을 열었다고 한다.
이 연구원은 “동물 학대 장소 대부분은 CCTV나 블랙박스 영상에 찍히지 않는 사각지대”라며 “남아있는 증거는 결국 사체뿐이라 부검을 거쳐야만 동물의 억울한 죽음이 밝혀지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굶어 죽은 고양이들의 처참했던 마지막 순간
올 7월엔 대구 남구에서 고양이 17마리를 자기 집에 방치해 죽게 한 20대 여성 B 씨가 재판에 넘겨졌다. B 씨는 경찰 조사에서 ‘일이 있어 오래 집을 비웠다’며 사실상 학대 행위를 인정했다. 다만 자신이 얼마나 오랜 기간 고양이들을 돌보지 않았는지, 몇 마리가 집에 있었는지 등 구체적 정황에 대해선 “모른다”고 일관했다.
이때도 동물 부검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동물 학대 혐의와 관련된 양형 기준에는 몇 마리를 어떻게 죽게 했는지도 포함돼 있다. 검역본부는 심하게 부패한 사체들을 거두어 머리뼈 개수 기준으로 고양이 총 17마리가 있었음을 밝혀냈다.
오랫동안 먹이를 먹지 못한 고양이들끼리 서로 갉아먹은 흔적도 발견됐다. 17마리의 사망 시점은 모두 달랐는데, 사망 시점이 늦은 고양이 대다수가 현관문 근처에서 발견됐다. 탈출하려고 시도했던 정황이라는 게 검역본부의 설명이다.
이 연구원은 “고양이들이 동족은 웬만해선 건드리지 않는다. 창문, 문이 닫혀있는 집 안에서 오랫동안 먹이를 먹지 못한 극한의 상황에서 벌어진 비극이다. 명백한 학대”라고 했다.
사망 시점 등을 추정한 결과 B 씨는 4월부터 17마리를 방치했다. 동물의 경우 사망시점은 사체에 생긴 곤충 등을 통해 추정한다. 사람의 사망 시점을 추정할 때 활용되는 ‘법곤충’과 같은 원리다. B 씨 집에선 최소 한 달에서 두 달 사이에 17마리가 모두 죽은 것으로 확인됐다.
●부검은 늘어나지만…담당 인력은 2명에 불과
동물 부검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경찰은 동물 부검을 적극적으로 의뢰하고 있다. 검역본부에 따르면 2017년 49건에 불과했던 부검 건수는 2019년 102건, 지난해 228건, 올해(1~8월) 235건으로 매년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부검 전담 인력은 제자리라 검역본부에선 과부하가 우려된다는 지적이 나온다. 국내에서 유일하게 동물 부검을 전담하는 검역본부 수의사가 2명에 불과하다. 인프라도 열악한 수준이다. 독성 검사를 할 수 있는 장비가 없어 독성 검사는 국과수에 의존하고 있다.
검역본부는 이달 16일 동물 부검을 전담하는 ‘수의법의학센터’ 설립을 추진하는 안을 행정안전부에 제출하기도 했다. 동물권행동 '카라'의 최민경 정책팀장은 “매년 동물 학대는 늘어나고 있는데, 동물 부검 전문가를 양성하는 교육 과정도 부족한 상황”이라며 “부검이 확대될 수 있도록 지원과 투자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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