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드라마 ‘수리남’에서 국가정보원 요원 최창호(박해수 분)는 국제 마약상 구상만으로 가장합니다. 그가 위장한 ‘구 사장’은 코카인을 숨겨 국제 유통할 경로를 찾는 역할을 합니다. “코카인을 브라질 국경으로 가져오라”거나, “구호물품 선박에 실어 푸에르토리코로 보내라”는 식으로 밀수 경로를 만들어내는 게 그가 하는 일입니다.
올해 검찰은 이 ‘구 사장’과 비슷한 역할을 하는 밀수 사범을 검거했습니다. 한국계 호주 국적의 이모 씨(38)는 베트남에 거주하며 국내 일당을 시켜 필로폰 약 902kg을 국내로 밀반입한 뒤 다시 약 498kg을 호주로 몰래 보냈습니다.
필로폰 902kg은 약 3000만 명이 동시 투약할 수 있는 양으로, 국내 적발된 마약 가운데 가장 많습니다. 거래가로 902억 원 수준입니다. 이전까진 2018년 적발된 112kg이 최대였습니다.
이 씨는 지난달 2일 부산지방법원으로부터 징역 30년을 선고받았습니다. 마약 밀수 혐의로는 역대 최고 형량입니다. 이 씨의 1심 판결문을 통해 범행 과정을 들여다 봤습니다.
●항공기 부품 속 필로폰
이 씨는 한국, 호주, 베트남 등지에서 무역업을 하던 인물입니다. 한국계 호주인인 이 씨는 국내에서 무역업체를 운영하다 2017년 4월 18일 베트남으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그가 들여온 수입물품에서 코카인이 적발됐기 때문입니다. 이 씨가 상당히 오래 전부터 마약 밀수에 손을 대온 것으로 보이는 정황입니다. 당시 그는 운 좋게 수사망을 빠져나간 것으로 보입니다. 이 씨는 이번 밀수 사건으로 검찰에 적발되기 전까지 국내에서 형사처벌을 받은 전력이 없었습니다.
베트남에서 이 씨는 국내 공범 박모 씨(36)와 함께 멕시코산 필로폰을 한국을 거쳐 호주에 판매할 전략을 세웁니다. 그가 선택한 수입 물품은 항공기 부품인 ‘헬리컬 기어’입니다. 헬리컬 기어는 톱니가 빗살 형태로 틀어진 원통형 기어로 항공기나 선박의 감속 장치로 주로 쓰입니다.
일당은 멕시코 생산된 필로폰을 3kg 단위로 진공 포장해 역시 현지에서 제작된 헬리컬 기어 속 빈 공간에 채워 넣는 방법으로 마약을 숨겼습니다. 부품 가운데 원통형 공간에 빈틈없이 꼭 맞게 채워져 있는 모습은 애초에 이 헬리컬 기어가 필로폰 밀수를 위해 제작됐음을 짐작케 합니다.
이 씨는 이 헬리컬 기어를 국내에 수입하기 위해 박 씨를 시켜 여동생 명의로 자동차 부품 업체를 2019년 7월 31일 서울 강남구에 설립합니다. 또한 사촌동생 명의로 수출업체를 2020년 1월 31일 설립했습니다.
수입과 수출업체를 따로 만든 이유는 해당 부품을 국내에서 생산된 것처럼 꾸미기 위함입니다. 대표적인 ‘마약 수출국’으로 꼽히는 멕시코에 비해 한국은 비교적 마약 범죄가 덜한 나라입니다. 이 씨는 한국에서 수출되는 물건은 세관의 통관 절차가 덜 까다롭다는 점을 악용해 필로폰을 숨긴 헬리컬 기어를 국내 생산품인 것처럼 서류를 조작했습니다. 필로폰을 숨긴 부품을 수출하기에 앞서 필로폰이 들어있지 않은 부품 6대를 호주에 수출해 정상적인 무역인 것처럼 보이도록 하는 치밀함도 보였습니다.
●호주 현지서 적발
이 씨는 2021년 1월 4일 필로폰이 든 헬리컬 기어 3대를 호주로 수출합니다. 마약 밀수 목적으로 국내 수입 업체를 설립한 지 약 1년 5개월 만입니다. 이후 2021년 4월 9일까지 필로폰이 든 헬리컬 기어 총 20대 중 11대를 호주에 수출합니다. 이렇게 호주로 넘어간 필로폰은 약 498kg이었습니다.
2021년 5월. 순조로워보였던 밀수출 계획에 차질이 생겼습니다. 호주 현지에서 이 씨 일당이 수출한 헬리컬 기어 11대 속에 다량의 필로폰이 숨겨져 있단 사실이 적발된 겁니다. 이후 국내 수사기관의 수사도 시작됐습니다.
수출에 차질이 생겼단 소식은 베트남에서 사업을 계획하던 이 씨에게까지 전달된 것으로 보입니다. 호주 당국이 필로폰을 적발한 뒤인 2021년 5월 17일. 이 씨 지시를 받는 국내 일당은 경기 포천시 소재 창고에 보관돼 있던 나머지 헬리컬 기어 9대를 급하게 경기도 양주로 옮기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이 헬리컬 기어 9대는 강원 횡성군, 경기 고양시 등으로 옮겨지다가 같은 해 7월 6일 부산세관 직원들에 의해 고양시 덕양구 소재 창고에서 압수됐습니다. 공범 박 씨는 현장에서 긴급 체포됐습니다. 추적을 주도한 부산세관 수사팀 소속 이동현 주무관은 이 공로로 관세청 개청(1970년) 이래 처음으로 7급에서 6급으로 특별승진했습니다.
●추가 범행 모의 정황도
이후 검찰은 베트남 경찰과의 공조 수사 끝에 올해 2월 주범 이 씨를 베트남 현지에서 검거하고 3월 재판에 넘겼습니다.
재판 과정에선 이 씨가 국제 마약 밀수 조직과 깊이 연루된 정황도 드러났습니다. 이 씨가 마약을 판매하려한 상대는 다국적 조직원이 속해 있는 범죄조직입니다. 호주 수사기관은 지금도 이 조직을 소탕하기 위해 호주 현지에서 수사를 진행 중입니다.
호주 수사기관과의 공조 등을 통해 이 조직 소속 조직원과 이 씨가 주고받은 메시지 내용이 드러났습니다. 이 씨는 조직원 ‘Oscar‘(메신저 대화명)에게 수시로 메시지를 보내 필로폰의 위치와 보관 상태를 보고하고 수출 일정과 수량, 방법을 논의했습니다.
이 씨는 Oscar와 추가 범행을 모의하기도 했습니다. 이들은 마약을 숨길 새로운 물건으로 브라질에서 한국으로 수출되는 망간,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수입되는 크로뮴과 아보카도 등을 물색했습니다. 재판부는 “(이 씨가) 마약류를 은닉할 새로운 물품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해당 무역상품 및 무역절차에 관해 해박한 지식을 드러내고 있다”며 “오랜 기간 여러 국가에서 다양한 물품을 취급하며 무역업을 한 (이 씨의) 경력이 드러난다”고 했습니다.
외국 국적의 밀수 피의자를 우리나라 법정에 세워 최고 형량을 받도록 하는 일이 쉽지는 않았습니다. 부산지검 관계자는 4일 동아일보와 통화에서 “호주 수사기관과 수사 자료 공유가 잘이뤄져 주요 증거들을 확보할 수 있었다”며 “해외 수사기관과 검찰이 쌓아온 협력 관계가 잘 활용된 사례”라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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