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광화문 한글가온길에는 한복을 입고 보따리를 든 사람이 새겨진 기둥이 있습니다. 바로 일제강점기 우리말과 글을 지키는 데 앞장선 주시경 선생(1876∼1914·사진)의 부조입니다.
주시경은 1876년 황해도 봉산에서 6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습니다. 배를 곯을 정도로 가난했는데 12세 때 서울 큰아버지 집에 양자로 가면서 인생의 전기를 맞이합니다. 양반집 아이들이 다니는 서당에서 공부할 수 있게 된 겁니다.
당시 조선의 교육은 한문과 유학 중심이었습니다. 주시경은 소리 나는 대로 적을 수 있는 우리글을 놔두고 뜻도 이해하기 어려운 남의 나라 문자를 배워야 하는 게 불만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그때부터 한글과 국어교육에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1894년 배재학당에 입학한 주시경은 본격적으로 새로운 학문을 배우면서 생각의 폭이 넓어집니다. 특히 일찌감치 한글의 우수성을 주장하던 미국 출신 선교사이자 독립운동가인 호머 헐버트와 만나 세계 여러 나라가 자기 나라 말과 글을 쓴다는 것을 알게 되고 국어국문 연구에 눈을 뜨게 됩니다.
한편 1896년 독립신문사 창간을 준비하던 서재필이 배재학당 강사로 오면서 그는 인생의 또 다른 전기를 맞이합니다. 누구든 쉽게 읽을 수 있는 한글 신문을 만들자고 하는 서재필에게 주시경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말을 소리 나는 대로 쓰고, 띄어쓰기를 잘하면 됩니다.”
주시경은 독립신문 창간에 깊이 간여합니다. 그는 교정 보는 사람이 되어 꼼꼼하게 글을 살피고, ‘논설’을 제외한 국문판의 나머지를 담당했습니다. 한글 표기법 통일의 필요성을 느껴 1896년에는 독립신문사 안에 ‘국문동식회’를 만들어 한국어 문법을 정리했습니다. 근대한국 최초의 국문법 연구 단체입니다.
주시경은 나라의 바탕이 말과 글이라고 생각했습니다. 1910년 대한제국이 일제에 의해 강제 병합당하자 그는 우리말 강의에 힘썼습니다. 자신을 원하는 곳이면 방방곡곡 어디든 달려갔습니다. 조선어강습원을 차려 일요일에도 쉬지 않고 가르쳤습니다. 늘 보따리를 들고 다녀 사람들은 그를 ‘주보따리’라고 불렀습니다. 심지어 집에 있을 때조차 말모이(사전) 작업을 하느라 잠시도 쉬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과로에 시달리던 주시경은 1914년 급작스러운 복통으로 사망합니다. 그러나 그의 뜻은 제자들에 의해 조선어연구회, 조선어학회를 거쳐 광복 뒤 한글학회로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그가 생전에 했던 말모이 작업은 한글학회의 ‘큰사전’ 편찬의 기틀이 됩니다.
9일은 한글날입니다. 한글은 ‘으뜸가는 글, 하나밖에 없는 글’이란 뜻입니다. 이 이름을 지은 주시경 선생의 우리말 사랑도 함께 기리는 날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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