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은 아직도 인종문제와 관련해서 보수적인 분위기가 남아 있는 사회입니다. 그런 영국에서 24일 최초로 인도계 이민자 출신인 리시 수낵(42·사진)이 차기 총리로 확정되었습니다. 리즈 트러스가 취임 44일 만에 영국 최단명 총리로 이름을 남기고 사임한 지 며칠 만입니다.
수낵은 9월 당 대표 경선에서 트러스 전 총리의 ‘경제성장을 위한 감세’ 주장을 ‘동화 같은 계획’이라고 공개적으로 비난하며 정치적 입지를 굳혔습니다. 그는 재정 건전성을 강조하면서 법인세 인상, 국민보험(NI) 분담금 비율 인상을 주장했습니다. 세금을 더 거두어 경제를 활성화하자는 거였지요.
처음에는 트러스의 주장에 힘이 실렸습니다. 그러나 트러스 전 총리의 감세 정책은 재정 공백에 대한 대안이 없었습니다. 영국 통화인 파운드화의 가치가 급락하고 국채 이자가 올라 시장에 혼란이 일어났습니다. 덕분에 수낵의 인기가 치솟았습니다. 뉴욕타임스는 “수낵의 경제위기 예언이 총리실로 가는 길을 열어줬다”고 평가했습니다.
수낵은 조부 때 인도 펀자브 지방에서 영국으로 건너온 이주민 3세입니다. 인도는 과거 영국의 식민지였습니다. 그런 인도계 이주민이 영국의 총리가 된 겁니다. 게다가 백인이 아닌 첫 영국 총리입니다. 이 때문에 인도의 유력 언론들은 현재 수낵의 인도계 혈통을 강조하며 뜨거운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수낵은 스스로도 이민자 출신임을 내세워 자신이 사회적 약자를 대변한다고 종종 주장해 왔습니다.
하지만 수낵은 영국 사우샘프턴에서 태어나 명문인 영국 옥스퍼드대와 미국 스탠퍼드대를 졸업한 전형적인 엘리트 정치인입니다. 졸업 이후 금융계로 진출해 세계적 투자기업인 골드만삭스에서 애널리스트와 헤지펀드 파트너 등으로 일했습니다. 2015년 총선으로 의회에 들어왔고 2020년 보리스 존슨 전 총리가 재무장관으로 발탁하면서 인지도가 높아졌습니다.
게다가 수낵 가문은 아직도 카스트라는 신분제도가 남아있는 인도에서 최상위 계층인 브라만 계급이었습니다. 영국으로 이주한 후에도 아버지가 의사, 어머니는 약사로 부유한 유년시절을 보냈습니다. 심지어 부인은 인도 정보기술(IT) 대기업 인포시스 창업자의 딸로, 부인이 가진 인포시스 지분만 1조 원이 넘습니다. 수낵 자신의 말처럼 소외계층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다른 백인들과 마찬가지로 수낵이 호화로운 엘리트일 뿐이라는 반응도 많습니다. 하지만 기독교가 주류인 영국에서 힌두교도인 그가 총리가 된 것만 해도 신선합니다. 특히 인도가 영국의 200년 이상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한 지 75년 만에 인도계 이주민인 수낵이 영국의 총리로 내정된 것은 어쩌면 영국 사회에 작지만 의미 있는 하나의 중요한 획을 그은 사건인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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