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먹는 음식인데 제품명 뿐만 아니라 유통기한도 모른 채로 구매해야 해요. 유통기한이 지난 두유인지도 모르고 사서 먹었다가 탈이 난 적도 있습니다. 식품에 점자 표기가 없는 건 단순한 불편을 넘어 시각장애인을 불안하고 위험하게 만듭니다.“ (시각장애인 조모 씨)
“편의점에 점자가 적힌 식품이 없다보니 라면 하나를 사더라도 먹고 싶은 걸 고를 수가 없어요. 잘못 사서 버린 경우도 많고 그냥 다른 사람에게 주기도 합니다.“ (시각장애인 최상민 씨)
4일은 ‘시각장애인의 세종대왕‘이라고 불리는 송암 박두성 선생(1888∼1963)이 1926년 한글 점자를 만들어 반포한 날을 기념하는 ‘한글점자의 날‘이다. 한글점자가 반포된지 100년 가까이 지났지만 여전히 국내 점자 표기, 특히 식품에 대한 점자 표기는 갈 길이 멀다. 대다수 식품에 제품명 등이 점자로 표기돼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있더라도 가독성이 크게 떨어져 시각장애인들이 고충을 겪고 있다.
● 식품 10개 중 6개 점자 표기 없어
현행법상 식품에는 점자 표기 의무가 없다. 의약품의 경우 점자 표기를 의무화하는 약사법 개정안이 지난해 국회를 통과하면서 2024년부터 의무화가 시행된다. 더불어민주당 강선우 의원이 식품에도 점자 표기를 의무화하는 내용의 ‘식품 등의 표시·광고에 관한 법률(식품표시광고법)’ 개정안을 발의했지만 현재 국회 계류 중이다.
의무가 없다보니 시중에 판매 중인 식품 상당수에는 점자 표기가 없다. 한국소비자원이 9월 음료, 컵라면, 우유 총 321개 제품을 조사한 결과 200개(62.3%) 제품에 점자 표기가 없었다. 시각장애인 김모 씨(50·여)는 “라면을 살 때면 일반라면인지 짜장라면인지 집에 와서 끓여봐야만 알 수 있다“고 토로했다. 시각장애인 이승민 씨(39)도 “음료수인 줄 알고 구매했는데 알고보니 맥주인 경우도 있었다“고 전했다.
식품업체가 자발적으로 점자를 표기했더라도 가독성이 크게 떨어지는 경우가 많다. 점자의 높이와 점자 간 간격이 표준 규격에 맞지 않아 읽기가 어려운 것이다. 한국소비자원이 시각장애인 20명을 대상으로 점자가 표기된 음료, 컵라면, 우유 78개 제품의 가독성을 3점 만점으로 평가한 결과 72개(92.3%)가 2점 미만의 낮은 평가를 받았다.
● 식품 포장재 얇아지며 점자 표시 더 어려워
식품은 포장재 특성상 점자 표기가 어려운 경우가 적지 않다. 포장재가 대부분 단단한 박스인 의약품과 달리 비닐이나 플라스틱으로 포장된 경우가 많아서다. 비닐에는 점자를 인쇄하기가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연주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 사무총장은 “최근 ‘친환경‘의 중요성으로 식품 포장재를 얇게 만드는 추세라 점자를 표기하기가 더욱 어려워지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장애인 복지 현장에서는 점자 표기가 어려운 경우 음성 변환이 가능한 QR코드를 활용하자고 제안한다. 한승진 실로암시각장애인복지관 정보미디어팀장은 “QR코드를 찍으면 제품명과 유통기한 등이 음성으로 안내되게끔 하되, 시각장애인들이 QR코드의 위치를 인지하도록 테두리를 양각으로 표시하는 방법이 있다“며 “이미 의약품에 이 같은 방법을 활용하고 있기 때문에 식품에 대해서도 기술적으로 가능하다”고 말했다.
관계당국인 식품의약품안전처는 식품 포장 재질별로 점자를 표기할 방안과 기술에 대한 연구를 추진하고 있다고 밝혔다. 식약처 관계자는 “일단 편의점과 마트에서 매장 내 어느 구역에 음료와 식품, 생필품이 있는지에 대한 정보부터 점자로 안내하는 시범사업도 추진 중“이라며 “올해 안으로 시범사업에 참여할 업체 모집을 마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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