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한 두 편만 보내면 지하철에 탈 수 있었는데, 이젠 세 편 정도는 그냥 보내야 탈 수 있다.”
3일 오후 6시 반 서울 지하철 2호선 강남역 환승구간으로 들어선 허정현 씨(32)는 “이태원 핼러윈 참사 이후 만원 지하철을 비집고 타는 사람이 확실하게 줄었다”며 이렇게 말했다. 그는 “지난주까지만 해도 지하철에 타려고 뒤에서 밀어 붙이던 사람들이 줄을 선 채 가만히 기다렸다가 타는 모습을 보고 놀랐다”고도 했다.
근처에 줄을 서 있던 직장인 문경진 씨(31)도 “(사고 이후) 열차가 붐비면 이번 편은 그냥 보내고 차라리 다음 열차를 타자는 생각이 든다”며 “이전처럼 몸을 구겨서 탔다면 10~20분 빨리 집에 갈 수 있겠지만 참사를 계기로 경각심이 커진 것 같다”고 했다.
● 참사 이후 달라진 지하철 풍경
이태원 핼러윈 참사 이후 출퇴근 시간대 수도권 전철의 풍경이 달라졌다는 경험담이 이어지고 있다. 참사 이전엔 발 디딜 틈 없는 전철에 몸을 구겨 넣기 위해 앞사람을 밀어 넣거나 서둘러 환승하려는 인파가 무질서하게 뒤엉키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동아일보가 3일 퇴근시간대 서울 전철역들을 취재한 결과 인파가 밀집된 공간에서 최대한 질서를 지키며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이들이 확연히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광화문에서 일하는 이지윤 씨(24)는 “5호선 광화문역 출근길에서 사람들이 이전과 달리 서로를 밀치지 않고 천천히 이동하는 게 몸으로 느껴졌다”며 “서로 말은 안 해도 이태원 참사를 염두에 두고 행동하는 것처럼 느껴졌다”고 했다.
취업준비생 김예랑 씨(26)도 최근 만원 지하철을 그냥 보내는 일이 잦아졌다고 했다. 김 씨는 “붐비는 지하철에 몸을 웅크려 타는 일이 잦았지만, 참사 이후엔 밀집된 공간이 위험하다는 생각이 든다”며 “어제도 열차 안에 1명 정도 설 수 있는 공간이 있었지만 타지 않았다”고 했다. 지하철 1호선 신도림역에서 만난 지하철 경찰대 근무자는 “확실히 이태원 참사 이후 시민들이 통제를 잘 따라주고 있다”고 했다.
● “경각심보다 중요한 건 제도와 안전시설”
이태원 참사 이후 일상생활 전반에서 ‘안전 민감도’가 높아졌다는 시민도 늘었다. 사람이 붐비는 공간을 가급적 피하고 위급상황에서 대처할 방법을 사전에 준비해두자는 움직임이 확산되는 것이다.
대학생 이여란 씨(23)는 2일 친구의 졸업 전시회를 찾았다가 엘리베이터 안에서 이태원 참사가 떠올랐다. 10층 학생식당에 가려고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순간적으로 사람이 많이 몰렸기 때문이다. 이 씨는 “직접 경험하지 않은 일이 트라우마처럼 떠올랐다”며 “내려갈 때는 계단을 이용했다”고 말했다.
압사 사고가 날 수 있는 상황에 미리 대비하는 시민들도 늘고 있다. 직장인 김형주 씨(27)는 “예전에는 지하철에서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백팩을 앞쪽으로 멨다면, 이제는 혹시 모를 압사 사고에 대비해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차원에서 그렇게 한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시민들의 경각심이 높아진 것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안전사고 예방으로 이어지려면 제도적 뒷받침과 안전시설 보완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윤상철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는 “이번 참사로 시민들도 곳곳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는 걸 피부로 느낀 것 같다”고 했다. 윤명오 서울시립대 재난과학과 교수는 “개인의 의식보다 중요한 건 시스템과 환경”이라며 “이번 참사를 계기로 지하철 역사 등의 안전시설을 점검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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