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돼지열병 차단에 한계… 年 40억 ‘멧돼지 울타리’ 존치해야 할까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11월 8일 03시 00분


감염 매개 멧돼지 남하 막기 위해 경기-강원-경북에 2806km 조성
설치 지역서 감염 멧돼지 지속 발견
훼손 잦고 지형 탓 원천봉쇄 어려워
다른 동물들 생태통로 단절 우려도

아프리카돼지열병(ASF)에 감염된 멧돼지를 막기 위해 설치한 철제 울타리가 잘려 나간 모습. 올해 7∼10월에 발견된 울타리 파손 지점만 620곳에 달한다. 한국포유류연구소 제공
아프리카돼지열병(ASF)에 감염된 멧돼지를 막기 위해 설치한 철제 울타리가 잘려 나간 모습. 올해 7∼10월에 발견된 울타리 파손 지점만 620곳에 달한다. 한국포유류연구소 제공
경기 파주부터 경북 울진에 이르기까지 들과 산을 가로질러 2806km.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태백산맥(600km) 길이의 4배가 넘는 ‘이것’의 정체는 무엇일까. ‘멧돼지 울타리’다. 정부는 2019년부터 아프리카돼지열병(ASF)에 감염된 멧돼지의 이동을 막기 위해 파주 휴전선 접경 지역을 시작으로 강원 화천∼고성, 홍천∼양양, 경북 문경∼울진 등 태백산맥 동서 지역을 가로지르는 2806km 구역에 광역 차단 울타리를 세웠다.

하지만 올해 4월부터 추가 울타리 설치를 중단했다. 4월에만 전국에서 130마리의 ASF 감염 멧돼지가 발견됐다. 왜 설치를 멈췄을까.
○ 1662억 원 들인 멧돼지 울타리

ASF는 돼지과(科)만 감염되는 전염성이 높은 감염병이다. ASF에 걸린 돼지는 40.5∼42도의 고열과 피부 출혈 증상을 보인다. 감염 후 모두 10일 내로 폐사한다. ASF가 ‘돼지 흑사병’으로 불리는 이유다. 하지만 현재 개발된 백신이나 치료제가 전무하다. 양돈 농가에서 발병하면 전수 살처분 외에는 막을 방법이 없다.

이에 정부는 검역을 강화하는 등 국내 유입을 차단해왔다. 그러나 2019년 10월 국내에서도 처음으로 ASF 돼지가 발견됐다. 당시 경기 연천 비무장지대에 있던 멧돼지 폐사체에서 ASF가 검출됐다. 곧이어 파주 양돈 농가에서 ASF 감염 돼지가 발견됐고, 멧돼지가 전파의 주범으로 지목됐다.

민관 인력을 동원한 멧돼지 포획 작전이 시작됐다. 정부는 이와 함께 멧돼지가 더 이상 남하하지 못하도록 발견 지역 이남에 철제 울타리를 치기 시작했다. △1차 민통선 접경(파주∼화천) △2차 화천∼고성 △3차 화천∼춘천∼인제 △4차 홍천∼양양, 강원 남부 △5차 문경∼영주∼울진, 충북 충주∼경북 상주∼영덕 등 5차례에 걸쳐 2806km의 울타리가 순차적으로 개설됐다. 관련 예산만 3년간 1622억 원이 투입됐다. 2020년 국립환경과학원은 “울타리의 ASF 멧돼지 차단 효과는 99.5%”라고 발표했다.
○ 경북 울진까지 내려간 감염 멧돼지
하지만 울타리가 점점 남하한 것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ASF 감염 멧돼지는 울타리 이남에서 계속 발견됐다. 2020년 4월 화천∼고성 울타리를 세운 지 넉 달 만인 8월 그 이남인 춘천과 인제에서 ASF 멧돼지가 나왔다. 이 해에 춘천과 인제에서만 각각 15마리, 39마리의 ASF 멧돼지가 확인됐다.

지난해 11, 12월에는 문경∼영주∼울진 울타리를 세웠다. 그러나 올해 1, 2월 울타리 이남인 충북 보은, 경북 상주에서 ASF 멧돼지가 나타났다. 올해 11월 현재 ASF 멧돼지의 활동 범위는 울진까지 남하한 상태다.

이성민 한국포유류연구소 소장은 “산이 많은 우리나라에서 울타리를 쳐 멧돼지를 완벽히 막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며 “외국에서 효과를 봤던 이유는 비교적 탁 트인 평야 지형에 설치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박선일 강원대 수의학과 교수는 “멧돼지는 힘이 세서 울타리에 약한 부분이 있다면 밀어 넘어뜨리거나 땅을 파서 넘어갈 수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 파손된 울타리가 적지 않다. 울타리 관리를 맡고 있는 환경보전협회에 따르면 올해 7∼10월 석 달간 확인한 울타리 파손 지점만 620곳에 달했다. 울타리 유지 및 보수비로 연간 40억 원의 환경부 예산이 책정됐을 정도다.

울타리가 다른 야생생물의 생태통로를 단절시키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지난해 10월 인제에서는 멸종위기 1급인 산양이 산에서 내려왔다가 멧돼지 울타리에 막혀 오도 가도 못하고 도로를 서성대는 모습이 발견됐다.
○ 울타리 존치 여부 “고민 필요한 시점”
이런 문제들이 제기되면서 환경부가 일단 추가 울타리 설치를 중단하기로 한 것이다. 남은 숙제는 기존 울타리를 어떻게 할지다. 환경부 ASF 자문위원으로도 활동한 오연수 강원대 수의학과 교수는 “ASF 유입 초기에는 분명 울타리의 효과가 없었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제는 그 역할을 다했다고 본다”며 “철거할지, 아니면 생태계와 조화롭게 운영하는 방안을 찾을지 등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고 말했다.

오 교수는 또 “농장 관리가 강화되면서 멧돼지보다는 농장에 출입하는 사람이 ASF 바이러스 매개체가 될 가능성이 높아졌다”며 “농가 방역에 더욱 치중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실제 올해 9월 농장 감염이 발생한 경기 김포는 멧돼지 활동 지역과 동떨어져 있다. 이에 따라 환경부는 멧돼지 울타리에 대한 용역 연구를 8월에 시작했다. 환경부 관계자는 “내부 논의, 전문가 의견 등을 종합해 중장기적인 울타리 정책 방향을 결정할 것”이라고 전했다.

#멧돼지#울타리#아프리카돼지열병#감염 돼지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