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세잔의 작품 ‘사과와 오렌지’를 ‘만져 본’ 느낌이다. 원작은 평면 캔버스에 그려진 정물화지만 이 작품은 달랐다. 동그란 스티로폼에 점토를 덧대고, 그 위에 물감을 칠해 만든 입체적인 사과와 오렌지는 캔버스 위로 툭 튀어나와 있었다. 사과와 오렌지 밑에 깔린 흰 천 역시 마찬가지였다.
11일 서울 구로구의 서울생활문화센터 신도림 다목적A홀에서 조금 특별한 전시회가 열렸다. 실로암시각장애인복지관이 주최하는 ‘제9회 촉각명화 정기기획전, 촉각으로 만나는 세계 미술관’이다. 촉각명화란 시각장애인이 그림을 만져서 감상할 수 있도록 명화 원작을 입체적으로 제작한 것이다. 이날 전시회장 곳곳에는 기존 미술관에 붙어 있는 ‘작품에 손대지 마시오’라는 안내와는 달리 ‘만져보세요’라는 안내판이 붙어 있었다.
● 손끝으로 감상하는 세계 명화
이번 전시회에는 런던 내셔널 갤러리, 파리 오르세 미술관, 뉴욕 현대 미술관에서 볼 수 있는 명화 12점을 촉각명화로 제작한 작품이 전시된다. 12점의 촉각명화는 자원봉사자 40여 명이 만들었다. 촉각명화 하나당 제작시간이 2개월 가량 걸렸다.
제작자들은 원작의 느낌을 생생히 살리기 위해 노력했다. 빈센트 반 고흐의 ‘우편배달부 조셉 룰랭의 초상’을 촉각명화로 제작할 때는 특히 우편배달부의 턱수염 표현에 신경썼다. 고흐가 짧게 끊은 붓터치로 덥수룩하고 곱슬거리는 턱수염을 그린 것처럼 촉각명화 제작자들은 여러 색깔의 털실을 짧게 끊어 붙여 턱수염을 표현했다.
장 프랑수아 밀레의 ‘이삭 줍는 여인들’의 촉각명화도 마찬가지다. 노끈을 이용해 이삭다발을 만들었고, 들판은 잔디 질감의 시트지를 이용했다. 이삭을 줍는 세 여인의 저고리와 치마는 부드러운 천으로 만들었다.
● 당연한 일상이 누군가에겐 ‘60년 만의 선물’
복지관은 2016년부터 촉각명화 전시회를 시작했다. 그동안 “그림을 보고 싶다“는 시각장애인들의 요구가 꾸준히 제기됐다. 특히 시각장애인 자녀를 둔 부모들이 “아이가 한 번도 그림을 본 적이 없어서 아쉽다“는 이야기를 많이 했다고 한다. 이인애 실로암시각장애인복지관 촉각교재팀장은 “비장애인에게 전시를 본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상이지만 시각장애인에게는 아니다”라며 “시각장애인도 똑같이 전시를 누릴 수 있게 하기 위해 명화를 감상하는 방식을 시각에서 촉각으로 바꿔본 것”이라고 말했다.
촉각명화 전시회는 시각장애인에게 새로운 경험을 선사하고 있다. 앞서 열린 전시회를 찾았던 한 전맹 시작장애인은 “60년 만에 그림을 처음 봤다”며 기뻐했다. 특히 후천적으로 시각장애를 갖게 된 이들은 “(앞이 보이던) 과거에 봤던 그림을 오랜만에 다시 접하니 기분이 좋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이번 전시회는 같은 내용으로 장소만 달리해 1, 2부로 나눠 열린다. 1부는 11일부터 20일까지 서울 구로구의 서울생활문화센터 신도림 다목적A홀에서, 2부는 23일부터 30일까지 서울 관악구의 실로암시각장애인복지관 S갤러리에서 열린다.
● 장애인 문화예술 경험 중요하지만 아직 현실은…
장애인복지 전문가들은 장애인들의 문화예술 향유 경험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문화예술활동 자체가 갖는 즐거움을 추구하면서 장애인이 사회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낼 수 있는 방법이라고 본다. 과거 장애인의 문화예술을 ‘재활을 위한 치료‘의 영역으로만 바라보던 관점에서 한발 더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국내 장애인 문화예술활동 실태는 아직 열악하다. 보건복지부와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2020년 장애인실태조사’에 따르면 지난 1년 동안 대중음악 감상과 영화관람을 제외한 모든 영역의 문화행사(미술 전시회, 연극·무용·뮤지컬 관람 등)에 단 한 번도 참여한 적이 없는 장애인이 전체의 약 97%인 것으로 조사됐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은 당시 보고서를 통해 “장애인이 문화예술 소외계층에 머무르지 않고 문화향유의 기회를 누릴 수 있도록 다양한 방안이 모색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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