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가 2016년 풍수해저감종합계획을 발표하면서 지난해까지 집행하겠다고 밝혔던 수해 대책 예산이 절반도 집행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비가 그치면 수해대책이 우선순위에서 밀린다’는 속설이 사실로 확인된 것이다. 전문가들은 “정부와 지자체의 지속적 관심과 장기적 투자 없이는 침수 피해가 되풀이될 수밖에 없다”고 경고했다.
동아일보 취재팀은 서울시가 2016년 수립한 풍수해저감종합계획을 입수해 분석했다. 풍수해저감종합계획(2018년부터 ‘자연재해저감종합대책’으로 명칭 변경)은 지방자치단체의 방재 분야 최상위 계획이다.
당시 서울시는 지난해까지 총 1조1117억 원을 들여 하천 정비와 펌프장 설치 등 수해 방지 사업을 벌이겠다고 했다. 그러나 올 2월 공개된 서울시의 ‘자연재해저감종합대책 시행계획’에 따르면 실제 집행된 예산은 5070억 원(45.6%)에 그쳤다.
또 서울시는 2026년까지 총 240개 지구의 수해방지 사업을 계획했으나 이 중 134곳(55.8%)은 아직 사업에 착수하지 않은 것으로 파악됐다. 지난해 말까지 사업이 완료된 지구는 83곳(34.6%)이었고, 23곳(9.6%)은 사업이 진행 중이었다.
서울 동작구 사당동, 서초구 방배동 등이 포함된 ‘사당역 일대’는 2011년 폭우 당시 큰 피해를 입어 사업 대상으로 선정됐다. 계획대로라면 2019년까지 1659억여 원이 투입돼 대심도 터널과 빗물 저류조 설치 등이 완료됐어야 했다. 그런데 실제로는 2019년에야 사당천 단면 확장 사업 등이 시작돼 지난해까지 130억4000만 원만 투입됐다. 서울시 관계자는 “국비 확보 등 예산 문제와 지역 주민의 (사업 반대) 민원, 부지 선정 지연 등의 문제로 사업 착수가 지체됐다”고 해명했다.
대림동, 5년간 수해방지 예산 집행 ‘0원’… 올 침수 신고 2520건
예산 수립하고도 실제 사업 전무 ‘1위’ 신림동도 예산의 22%만 투입 “사업 집행 과정, 수시로 공개해야” 정부 “위험지구 지정에 신고 수 반영”
수해 방지 사업이 지연된 곳에선 집중호우 때마다 어김없이 침수 피해가 되풀이됐다.
동아일보가 입수한 행정안전부 자료에 따르면 서울 동작구 사당동은 2011년 주택 침수 피해 신고가 총 1174건(전국 3위) 접수됐는데, 올해도 8월까지 1442건(전국 3위) 접수된 것으로 나타났다. 주민들은 정부와 지자체의 대책이 미비해 피해가 반복되고 있다고 입을 모았다.
취재팀이 지난달 찾은 사당동 주민 최준열 씨(57)의 집 1층 벽면에는 성인 허리 높이의 얼룩이 가로로 길게 새겨져 있었다. 올여름 폭우로 침수됐던 흔적이다. 최 씨는 2011년 폭우 때 빌라 1층 차고에 뒀던 자가용이 침수돼 폐차했는데, 올 8월에도 같은 이유로 차를 폐차했다고 하소연했다. 사당동에 30년 넘게 살았다는 그는 “이 동네 사람들은 항상 비 걱정을 안고 산다”고 했다. 인근에 사는 안송자 씨(73)도 “15년 동안 거주하면서 침수 피해만 벌써 세 번 입었다”며 “(침수 피해 반복을 호소해도) 공무원들이 우리 같은 사람 말은 안 들어 준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 투자 미뤄지며 침수 피해 반복
동작구 상도동 역시 2016년 서울시가 세운 계획에 따르면 ‘상도동 지구’로 지정돼 하수관로 정비 사업 등에 2020∼2022년 75억3000만 원이 투입됐어야 한다. 하지만 사업 투자액은 2017년 7억 원에 그쳤다. 계획예산 대비 10분의 1도 투입되지 않은 것이다.
그 결과 올해도 피해가 되풀이됐다. 상도동은 2010년 344건(20위)의 주택 침수 신고가 있었는데 올해도 8월까지만 1147건(6위)의 침수 신고가 접수됐다. 상도동 성내시장 인근 반지하에 24년간 거주한 유모 씨(72)는 “올 8월 폭우 때 집의 절반가량이 물에 잠겼다”며 “과거에도 여러 차례 바닥에 고일 정도로 물이 찼다”고 털어놨다.
올해 침수 신고 건수 전국 1위였던 관악구 신림동(3601건)과 2위였던 영등포구 대림동(2520건)도 계획 대비 투자가 적은 편이었다. 신림동은 ‘도림천4지구’로 지정돼 2020∼2022년 373억3300만 원이 투입될 예정이었지만 실제로는 지난해까지 80억9000만 원(21.7%)만 집행됐다. 대림동은 2020년에 5억3200만 원의 투자가 집행될 예정이었지만 실제로는 지난해까지 5년 동안 한 푼도 투입되지 않았다.
○ 5곳 중 4곳은 10년 전 기준도 못 맞춰
서울시는 지난달 수방 대책을 발표하며 서울 전역의 방재성능목표를 현재 시간당 95mm에서 100mm까지 끌어올리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방재성능목표는 시간당 처리할 수 있는 강우량 목표치로 하수관로와 빗물펌프장 등 방재설비를 설계할 때 기준이 된다.
하지만 이 역시 말이 앞선 것으로 현실과 거리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동아일보 취재팀이 정보공개청구를 통해 서울시 자료를 확인한 결과 대부분의 지역이 여전히 10년 전 세운 시간당 95mm 목표도 달성하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서울시는 2010, 2011년 집중호우 당시에도 방재성능목표를 75mm에서 95mm로 상향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서울시에 따르면 서울 전역 239개 배수분구(빗물이 모여 빠져나가는 구역) 중 시간당 처리 강수량 95mm 기준을 충족한 곳은 올 11월 현재 55곳(23%)에 불과했다. 174곳(72.8%)은 정비 사업이 시작되지도 않은 상태였다. 올해 침수 피해가 컸던 신림동의 경우 관내 배수분구 5곳 중 1곳만 정비가 완료됐고 나머지 4곳은 기준 미달이었다.
권현한 세종대 건설환경공학과 교수는 “대규모 수해가 발생할 때마다 지자체가 방재성능목표를 높이겠다고 발표하는데 공염불에 그치지 않으려면 실제로 침수위험지역의 방재성능이 향상됐는지 점검하고 투자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 “수방 예산, 예산 30% 정도만 실제로 투입”
전문가들은 폭우 직후에 정부와 지자체에서 각종 대책이 나오지만 시간이 지나면 수해 방지 예산이 우선순위에서 밀리기 일쑤라고 지적한다. 이승수 충북대 토목시스템공학과 교수는 “수해 방지 사업은 다른 사안에 밀려 계획된 예산의 30% 정도만 실제 투입되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했다.
결국 수해 방지 사업이 성과를 내려면 정확한 사업성 평가를 기반으로 계획을 수립한 후 지속적인 관심과 예산 투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장석환 대진대 스마트토목공학과 교수는 “사업의 지속성을 담보하기 위해 계획된 예산이 어떻게 집행되는지 주민들에게 수시로 공개하도록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한편 행정안전부는 실제 침수 지역과 침수위험지구 지정이 동떨어져 있다는 동아일보 보도에 대해 14일 설명자료를 내고 “현행 침수위험지구 지정 기준에 지역별 침수신고 현황 등 과거 피해 지역이 우선 포함될 수 있도록 관련 지침을 개정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전국 읍면동별 주택 침수 신고 건수와 침수위험지구 지정 내역은 동아닷컴 홈페이지(www.donga.com/dspecial/1)에서 확인할 수 있다.
올 8월 기록적 폭우 이후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는 거액의 예산이 투입되는 수해 방지 대책을 다수 발표했다. 하지만 해외 사례 등을 보면 수해방지 대책의 핵심은 ‘대규모 공사’가 아니라 ‘주민 공감대 형성’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주민들의 공감이 있어야 지속적이고 장기적인 수해방지 대책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해외에서도 ‘침수 위험 지역으로 지정되면 재산권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주민 반대가 수해방지 대책 추진의 장애물로 작용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하지만 주요국들은 침수 지도 작성 및 수해방지 대책 수립 과정에서 상당한 시간과 노력을 들여 주민 의견을 수렴하고 설득해 나간다.
영국은 2007년 약 6조 원의 경제적 손실을 안긴 대홍수가 발생하자 ‘다목적 침수 관리 계획’을 마련하기 위해 물길과 호우를 분석한 뒤 ‘침수 지역’을 설정했다. 영국 역시 처음에는 침수 지역 공개가 재산권에 악영향을 준다는 주민 반대 여론이 상당했다. 그러나 지역별로 토론회를 여는 등 1년 넘게 주민 의견을 수렴하고 설득한 끝에 대책을 수립했고, 2009년부터 계획을 시행할 수 있었다.
영국은 또 2010년 ‘침수 및 물 관리법’을 제정하고 지자체마다 ‘지역 침수 위원회’를 두게 했다. 지자체는 주민 동의 없이는 침수 방지 계획을 시행할 수 없고, 침수 대책을 수립하려면 이 위원회를 통해 주민 의사를 반영해야 한다. 법은 또 정부가 침수 위험성과 개선 목표, 상세 투입 예산 등을 공개하도록 했다.
허리케인 등으로 인한 침수 피해가 잦은 미국은 1968년부터 국가침수보험프로그램(NFIP)을 통해 침수 관련 정보를 정기적으로 수집해 위험지역을 정하고, 침수지도(Flood Maps)를 작성하고 있다.
침수지도 공개 전에는 침수위험지역으로 선정된 지역 주민 의견을 반드시 수렴해야 한다. 지자체 의견이 반영된 예비 침수지도가 만들어지면 이를 지역 주민에게 공개한 후 90일의 이의 신청 기간을 갖게 한 것이다. 이 기간 위험지역 지정의 타당성부터 지역 경제에 미칠 영향까지 폭넓은 의견이 오고 간다.
주민 의견이 반영된 침수지도가 만들어지면 정부는 이를 바탕으로 수해 방지 대책을 세운다. 또 침수지도는 주민 공동체 등으로 구성된 ‘협력기술파트너’가 의견을 제시하면 수시로 수정될 수 있다.
이승수 충북대 토목시스템공학과 교수는 “영국의 경우 위험지구 지정 및 대책 수립 과정에서 지역 주민과 적극적으로 의사소통하기 때문에 이해관계를 넘어 합의된 결론을 도출해 낼 수 있는 것”이라며 “한국도 시간이 걸리더라도 다양한 주민 의견을 경청하고 이해 당사자들이 참여한 가운데 침수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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