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적 장애가 있는 성폭력 피해자가 성적 자기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을 만큼 장애가 심하지 않더라도 가해자에게 장애인 강간 혐의를 적용할 수 있다는 대법원 판단이 나왔다.
대법원 2부(주심 민유숙 대법관)는 성폭력범죄의 처벌에 관한 특례법 위반(장애인 준강간) 등 혐의로 기소된 A 씨(81)의 상고심에서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고 23일 밝혔다.
A 씨는 2019년 2월 지적장애 3급 B 씨(49)를 다섯 차례 성폭행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A 씨는 2018년 무료급식소에서 알게 된 B 씨에게 “우리 집에 가서 청소 좀 하자”며 주거지로 데려간 뒤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조사됐다. A 씨에게는 성폭력처벌법상 장애인 준강간 혐의가 적용됐다. B 씨가 정신적인 장애로 항거불능·항거곤란 상태에 있다는 점을 이용해 성폭행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장애인 강간죄는 기본 형량이 무기징역 또는 7년 이상의 징역으로 형법상 강간죄(3년 이상의 유기징역)보다 무겁게 처벌된다.
1심은 A 씨의 장애인 준강간 혐의 등을 유죄로 인정해 징역 4년을 선고했다. 1심 재판부는 “B 씨는 피해 당시 지적장애로 인해 의사소통 능력이나 일상생활에서의 문제해결 능력이나 판단력 등이 부족한 상태였고, 성적 자기결정권을 행사하거나 의사에 반하는 성관계에 대해 저항 또는 거부의 의사표시를 하는 것이 현저히 곤란한 상태에 있었다”며 “A 씨도 B 씨가 이러한 상태에 있었음을 인식하고 있었음이 충분히 인정된다”고 판시했다.
반면 2심은 A 씨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성폭력처벌법상의 ‘정신적 장애’는 성적 자기결정권을 행사하지 못할 정도의 정신장애를 의미한다고 전제했다. 그러면서 B 씨가 성적 자기결정권을 행사하지 못할 정도의 지적장애로 인해 항거불능 또는 항거곤란 상태에 있었다고 보기 어렵고 A 씨가 B 씨가 장애로 인해 저항할 수 없는 상태라는 점을 인식하고 있었다고도 보기 어렵다고 봤다.
대법원도 A 씨가 B 씨의 상태를 인식한 채 범행을 저질렀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보고 원심의 무죄 판단을 그대로 유지했다. 다만 정신적 장애와 그로 인한 항거 불능 상태에 대한 원심 해석에 대해선 잘못됐다고 지적했다.
대법원은 “성폭력처벌법에서 ‘신체적·정신적 장애로 항거불능·곤란 상태에 있음’이라 함은 장애 그 자체로 항거불능·곤란 상태에 있는 경우뿐만 아니라 장애가 주 원인이 돼 심리적·물리적으로 반항이 곤란한 상태에 이른 경우를 포함한다”며 “피해자의 장애가 성적 자기결정권을 행사하지 못할 정도인지가 절대적인 기준이 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B 씨의 경우 피해 전후 사정을 볼 때 ‘정신적 장애로 인한 항거불능·곤란 상태’로 볼 수 있다는 취지다.
이번 판결과 관련해 대법원 관계자는 “성폭력처벌법상 정신적 장애가 ‘성적 자기결정권을 행사하지 못할 정도의 장애’로 제한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해 하급심의 혼란을 해소했다”며 “향후 유사 사건의 판단에 지침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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