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이별 방정식’…한 탈북여성의 굴곡 많은 삶[주성하 기자의 ‘북에서 온 이웃’]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12월 6일 11시 50분


허옥희 ‘114방문요양센터’ 센터장이 자신이 돌보는 어르신과 함께 거리에서 웃고 있다.

“만남은 우리의 꿈이었다. 만남 이후의 삶은 그려보지 못했다. 함께 산다는 것 이상의 의미는 꿈 너머에 있었다. 만남이 너무나 간절했기에 한 번만이라도 함께 밥을 먹을 수 있다면 더 원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 소원이 이루어졌다. 그런데, 정작 행복하지만은 않다. 아이들은 훌쩍 커버렸고, 작은 일에도 상처를 받는다.

날마다 일상에 쫓기며 현재를 산다. 아이들의 마음을 다독이고 헤아리는 일에 무심했다. 우리의 만남이 지난 시간을 보상하고 상처를 치유하리라 믿었다. 가끔 아이들과의 언쟁에서, 쓸쓸한 표정에서 지난날의 상처를 발견하면 나는 한없이 무너진다. 상처는 감추어져 있을 뿐 치유되지 않았음을 느낀다. 어떻게 해야 어두운 그림자를 흔적없이 지울 수 있을까?”

그는 눈물을 흘리며 자판을 두드렸다. 엄마가 겪어야 했던 굴곡의 삶을 어떻게 하면 아이들에게 설명해야 할까. 엄마의 마음을 어떻게 하면 너희들에게 열어 보일 수 있을까.

“지키기 위해 놓아야 했고, 만나기 위해 헤어져야 했던 시간을 돌아보며 의심한다. 만남은 꿈의 실현이었지만, 함께 하는 첫 시작이기도 했다. 가족이어서, 가족이기 때문에 서로의 상처를 건드리기 겁났다. 곪은 상처는 빨리 수술해야 하지만 시간이라는 약에 기댔다. 미숙했던 자신을 탓해보지만 지난날을 되돌릴 수는 없다.”

그는 책을 쓰기로 결심했다. 지난날은 되돌릴 수 없지만 기록은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엄마의 이야기가 말이 아닌 책을 통해 아이들에게 더 잘 전달되길 바랄 뿐이었다. 짬짬이 글을 썼다. 그렇게 한 권의 책이 세상에 나왔다.

지난달 출판된 저서 ‘엄마의 이별 방정식’의 저자 허옥희 씨는 한국에 입국한 3만5000여 탈북민 중 한 명이다. 그는 태어난 곳과 지도자를 잘못 만난 탓에 혈육과 헤어져 타향에서 온갖 고생을 다 하다가 운 좋게 한국에 입국한 2만 여 탈북 여성 중 한 명이다.

가족을 위해, 가족이 다시 모여 살기 위해 온 몸을 내던졌지만, 과거의 쓰린 상처는 그도, 가족들도 수시로 아프게 했다. 그러나 아프다고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치유하고 다시 일어서야 했다. 그는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우린 양반 가문이다.”
허옥희 씨는 1967년 함경북도 청진 시에서 태어났다. 인민학교에 들어갈 즈음 아버지가 사회보장대상자가 됐다. 북한에서 사회보장대상자는 “나이가 많거나 병 또는 신체장애로 노동능력을 잃은 사람, 돌볼 사람이 없는 늙은이, 어린이”로 규정하고 있다. 당시 아버지의 나이는 38세에 불과했다.

아버지의 아버지는 6.25전쟁 때 월남했다. 북한에선 가장 출신성분이 나쁜 계층에 속하게 된 아버지는 남들이 기피하는 청진화학섬유공장 방사직장에서 일하게 됐다. 방사직장은 실을 뽑기 전 누에고치를 삶아 가공하는 곳인데, 각종 산성물질을 쓰고 유해가스에 노출된 곳이다. 이곳에서 20년 버티는 사람은 없다.

허 씨의 부친도 38세에 노동능력을 상실했다. 직장에서 나온 지 얼마 안돼 ‘판문점 도끼만행사건’이 일어났다. 이때 북한은 평양을 비롯한 대도시들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지방으로 보냈다. 명분은 전쟁 때 공습에서 보호한다는 것이지만 실제로 농촌에 내쫓긴 사람은 출신성분이 나쁘거나 허약한 사람들뿐이었다.

허 씨네 가족은 회령 시내 인근의 한 농촌으로 이주했다. 이곳은 허 씨 어머니의 고향이었다. 허 씨의 외할아버지도 월남자 출신이었다.

도시에 살던 허 씨는 매일 한 시간 넘게 농촌길을 걸어 학교에 갔다. 학급 학생 55명 중 20명이 그처럼 도시에 살다가 쫓겨서 온 애들이었다. 4남매 중 맏이인 허 씨는 동생들의 본보기가 되기 위해서 학교에도 결석 한 번 없이 열심히 다녔고 공부도 열심히 했다. 자신이 할 일이 공부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버지는 회령에 와서 공장 합숙에 불을 때주는 일을 했다. 딸이 “다른 애들 아버지들은 당원인데 아버지는 왜 당원이 아니냐”고 물었을 때 아버지는 한참을 말 못하고 있다가 “우리 허 씨는 대대로 양반 가문이다”고 대답했다. 출신성분이 뭔지 아직 모르는 딸에게 그 말밖에 해줄 말이 없었던 것이다.

북한에서 월남자의 손녀에게 허락된 직업은 노동자 밖에 없었다. 허 씨는 1983년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집 근처의 제지공장에 취직했다. 화약이나 시멘트 포장지를 생산하는 곳이었다. 공장에서 허 씨는 폐수를 정제해 두만강에 흘러 보내는 직장에서 7년 동안 일했다. 그동안 노동당원이 되기 위해 일도 열심히 하고, 남들이 기피하는 돌격대도 자원해 나갔지만 의미 없는 몸부림이었다.

허 씨가 취직했을 때 공장은 건설된 지 1년 밖에 안 된 새 것이었지만, 나중에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을 거치며 공장은 빈껍데기만 앙상하게 남았다. 먹고 살기 어려운 노동자들이 기계는 물론이고, 유리와 못까지 몽땅 뜯어 중국에 팔았던 것이다.

한국에 온지 2년 뒤 한 거리에 나선 허옥희 센터장.
국군포로 시아버지
어느 덧 결혼할 나이가 되자 중매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허 씨는 고향을 벗어나고 싶었다. 그래서 23세 때인 1990년 회령 세천에 있는 탄광에서 목수로 일하는 남자와 결혼했다.

그가 선택한 남자의 기준은 처가를 부양할 수 있는 남자였다. 맏이인 허 씨는 세 명의 동생을 자신이 돌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 부모님이 연로할 때도 자기가 그 책임을 떠맡을 생각이었다. 결혼한 남자는 막내인데,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다.

결혼식을 올리느라 세천으로 가면서 남편이 연애할 때 자신을 보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썼는지 비로소 깨달았다. 그가 살던 마을과 탄광 마을은 80리 떨어져 있고 통근열차가 다녔는데, 제 시간에 다닌 적이 한번도 없었다. 통근열차로 80리를 오는데 최소 반나절, 때로는 하루가 꼬박 걸렸다. 그 기차를 타고 남편은 회령에 와서 허 씨를 잠깐 보고 돌아가곤 했던 것이다.

세천은 작은 분지를 빙 둘러싸고 1만 가구 정도의 작은 집들이 따닥따닥 붙어있는 곳이었다. 허 씨가 시아버지를 만나보니 말투가 이상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는 국군포로 출신이었다.

6.25전쟁 전 대구에서 딸 2명을 키우며 살던 시아버지 김성섭은 1951년 징집돼 싸우다가 포로로 잡혔다. 대다수 국군포로와 마찬가지로 김 씨도 함북의 열악한 탄광에 끌려와 노동을 했다.

세천에는 국군포로들이 여럿 있었다. 허 씨가 결혼해 갔을 때 이들은 모두 은퇴한 늙은이들이었다. 하지만 국군포로끼리는 만나지 못했다. 북한 당국이 늘 감시했기 때문이었다. 길에서 마주치며 인사만 하는 정도였다.

시아버지는 “우리 집 옆에 큰 목재공장이 있었는데”로 시작해 고향 이야기를 종종했다. “지금쯤이면 우리 고향엔 보리가 파랗게 자랄텐데” 또는 “서울대 법대 다니던 처남은 잘 돼 있을 거야”라는 식으로 고향을 떠올렸다.

나중에 한국에 왔을 때 허 씨는 시아버지의 행적을 찾아보았다. 대전 현충원에 전사자 김성섭의 묘가 있었다. 딸들도 찾았다. 기차를 타고 부산에 도착하니 할머니가 나왔다. 아들도 40대가 넘었다.

다섯 살에 아버지를 잃은 딸은 힘들게 성장했다. 가슴엔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가득했다. 허 씨는 자신이 갖고 간 시아버지의 사진을 넘겨주었다. 딸은 자신이 보관하고 있던 아버지 사진을 보여주었다.

그 사진 속엔 키가 훤칠한 와이셔츠 차림의 젊은 남자가 환한 표정으로 있었다. 허 씨가 건넨 사진 속에는 70대가 넘은 허리 구부정한 노인이 있었다. 두 여인은 사진 속 낯선 남자를 말을 잊고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시아버지가 우리 집안에서 제일 성공했을 것이라던 처남은 6.25전쟁 때 미군 통역으로 참전했고, 이후 검사로 쭉 지내다가 사망했다고 한다.
담배 장사
1990년대 초반부터 함북에는 배급이 제대로 공급되지 않았다. 부업도 할 수 없는 탄광마을에선 더 이상 살기 어려웠다. 허 씨는 1991년에 태어난 어린 딸을 데리고 다시 친정집으로 내려왔다. 장사를 하기 위해서였다. 가족을 지키려면 그 길밖에 없었다. 1994년엔 둘째 딸도 태어났다.

그는 처음엔 담배 장사를 하다가 이후 닥치는 대로 벌었다. 식량도 팔고 음식도 팔았다. 그래도 입에 겨우 풀칠하는 수준이었다.

1990년대 중반 허 씨의 동네에는 가족이 죽지 않은 집이 없었다. 허 씨는 전쟁이 나도 이렇게 사람들이 많이 죽지 않았을 거란 생각을 했다. 그의 외할머니도 자식들이 고생하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었던지 1996년에 스스로 곡기를 끊고 단식을 하다가 12일 만에 돌아갔다.

남편도 나중에 탄광을 떠나 회령에 왔지만, 북한에서 남성은 더 엄격하게 조직생활을 해야 했다. 장사는 못하고 늘 도로닦이나 외지 파견과 같은 의미 없는 동원에만 뽑혀 다녔다.

장사를 하면서 허 씨는 전혀 다른 자신을 발견하게 됐다. 지금까지는 나라에서 시키는 대로 고지식하게 살아왔지만, 돈을 벌지 못하면 가족을 잃게 되는 처지로 내몰리자 죽기 살기로 돈을 벌었다.

1996년부터 허 씨는 담배를 만들어 파는 일을 하기 시작했다. 장마당이 정착되면서 북한도 빠르게 분업화되기 시작했는데, 허 씨네 마을은 여과담배를 만들어 파는 동네가 됐다. 누구는 평양 쪽에 가서 ‘힐튼’ ‘말보로’ 등 외국 브랜드를 찍어 인쇄한 담배 포장지를 날라 오고, 누구는 중국에서 여과필터를 들여다 팔고, 누구는 독초를 사서 담배를 말았다.

손으로 여과담배를 만드는 것은 정교한 작업이 필요하다. 특히 풀칠을 잘 해야 했고 담배와 향 배합 비율도 잘 맞춰야 했다. 허 씨네 마을에선 이렇게 담배를 만들어 파는 집이 여러 집 있었는데 수공업으로 만들다보니 집집마다 만드는 담배의 맛이 달랐다.

전국에서 장사꾼들이 들어와 담배를 사갔다. 이들은 담배 포장 수준만 봐도 누구네 집 담배인줄 귀신같이 알아봤다.

허 씨는 처음에는 하루에 대여섯 보루밖에 만들지 못했지만, 나중에 숙련되니 열 보루 이상 만들었다. 하루 담배 2000대를 두 손으로 말고 풀로 붙인 것이다. 대량 주문을 받으면 2~3일 밤을 자지 않고 정신이 몽롱한 채로 담배를 말았다.

허 씨의 담배는 점점 맛이 좋다고 소문이 났다. 장사꾼들이 끊임없이 그의 집을 찾아왔다. 허 씨는 수요를 맞추려고 사람을 쓰기 시작했다. 허 씨의 집에서 사람들이 벽을 마주보고 앉아 하루 종일 일했다. 담배를 전문적으로 마는 사람, 붙이는 사람, 포장하는 사람으로 분업화하니 능률도 올라갔다. 2000년쯤엔 허 씨는 열 명 정도를 고용해 쓰는 자본가가 됐다.

열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자기 집에 불러 일하는 것은 한계가 있었다. 허 씨는 그때부터 담배 무게를 저울에 달아 집집마다 나눠주며 일을 시켰다. “내일까지 이걸 다 말아서 오라”고 하면 사람들이 밤을 새서 만들어 주었다.

규모가 커지니 돈도 많이 벌었다. 돈을 번 뒤 집을 샀다. 처음엔 아파트를 샀는데 물도 제대로 나오지 않아 고생이 심했다. 그래서 아파트는 군대에서 제대돼 온 남동생에게 주고 단층집을 사서 따로 나왔다.

요양보호사들에게 해야 할 것들을 알려주고 있는 허옥희 센터장.
탈북
장사를 해서 돈을 좀 번다는 소문이 나자 돈을 뜯어내려 찾아오는 사람도 많아졌다. 보안원이 찾아와서 “요즘 국가 담배들이 개인들에게 팔려나간다는데”라고 운을 떼기만 해도 수천 원씩 쥐어주어야 했다.

누가 찾아와서 문을 두드릴 때마다 이번엔 또 누가 뜯어내려 왔을까 싶어 가슴이 떨렸다. 이중삼중의 수탈에 매일 같이 화가 났지만. 한편으로 국가에서 아무런 공급을 주지 않는 ‘미공급 시대’가 좋다는 생각도 했다.

과거엔 강냉이도 겨우 받아먹고 살았는데, 장사를 하는 시대가 되니 일한 만큼 돈을 벌고, 능력에 따라 쌀밥도 먹을 수 있고, 시장에서 금지된 책도 사볼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자신의 변화를 돌아보며 어떤 세상에서 사는가에 따라 인간의 운명도 바뀐다는 것을 체감했다.

화가 나는 일이 생기면 그는 불빛이 훤한 중국을 건네다 보았다. 몰래 한국 영화도 보면서 “저긴 장사를 마음대로 할 수 있어 얼마나 좋을까” 부러워도 했다.

어느 날 본 아동영화는 지금도 그의 기억 속에 생생하게 남아있다. 폭우가 쏟아지자 토끼들이 이사를 가는 장면이 있었는데 그때 “토끼도 살기 어려우면 옆 동네로 이사를 가는데, 명색이 인간인 우리는 저런 자유도 없으니 얼마나 불쌍한가”고 한탄했던 것이다.

2000년대 초반 그의 집을 찾던 장사꾼들의 발걸음이 점점 뜸해지기 시작했다. 나진 등 각지에 외국에서 들여온 기계로 위조담배를 전문 제조해 만드는 공장들이 많아진 것이다. 수제 담배는 더 이상 가격 경쟁력을 유지할 수 없었다.

벌어들이는 액수는 줄어드는데, 설상가상 모아둔 돈마저 많지 않았다. 그동안 번 돈 중에 상당수는 남편이 탕진했다. 아내가 돈을 좀 벌기 시작한 뒤로 남편은 돈을 몰래 빼내 술을 마시기 시작했는데 몇 년 만에 지독한 알코올 중독자가 돼 버렸다. 수없이 이혼 생각을 했지만, 북한에선 이혼이 사실상 금지됐다.

남편의 증세는 점점 심해졌는데, 동네에선 다들 남편이 몇 년 살지 못한다고 걱정했다. 남편은 그 몇 년도 채우지 못하고 어느 날 겨울 술에 취해 얕은 개울을 건너다 물에 빠져 죽었다.

다시 가난해지는 삶에 절망하고 있던 어느 날 공부를 잘해 수재학교인 1고등중학교에 다니던 맏딸이 엄마에게 이렇게 말했다.

“엄마, 나 학교 졸업하면 중국에 갈 거야. 우리 같이 가자. 가본 사람들이 말하는데 저긴 딴 세상이래. 난 무조건 갈 거야.”

허 씨는 심장이 뚝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맏딸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딸은 간다고 하면 무조건 가는 애였다. 2~3년 뒤 어린 딸이 중국에 팔려가는 상상을 해봤다. 그건 견딜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허 씨는 딸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 자신도 더 이상 북한에서 살고 싶은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그는 딸에게 말했다.

“우리 다 같이 가자. 그런데 함께 가면 위험하니 엄마가 먼저 가서 자리 잡고 너희를 데리고 올 거야.”

허 씨는 2006년 1월 두만강을 넘었다. 맏딸에겐 간다고 말을 했지만, 둘째에겐 말도 못했다.
“나를 팔아줘.”
넘어갈 때 연길에 살고 있는 동네 친구를 찾아 일자리를 부탁해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연길에선 감시가 심해 자리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는 다시 과거 자신의 신세를 졌던 아는 동생을 찾아 심양으로 향했다. 과거 중국에 살다 북송돼 감옥생활을 했던 그 동생은 갈 곳이 없어 한 달이나 허 씨네 집에서 머물렀었다. 심양에 가니 동생이 식당을 소개해주었다. 그는 우선 300위안을 받기로 하고 청소하는 일을 시작했다.

그런데 중국은 막연하게 상상하던 그런 곳이 아니었다. 우선 말을 모르니 안전하지 못했다. 매일같이 언제 북송될지 모르는 공포에 떨어야 했다. 국경도시인 회령에 살던 그는 북송되면 어떤 처벌을 받는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어느 날 그가 일하는 식당에 공안 두 명이 신고가 들어왔다며 들어왔다. 당시 그는 1층에서 청소를 하고 있었는데, 공안들은 어떤 신고를 받았는지 2층과 3층을 뒤지고 갔다. 천만다행으로 체포되지 않았지만, 여기에 더 머물 순 없었다. 그렇다고 어딜 가도 말을 모르기 때문에 발을 붙일 방법도 없었다. 집에서 기다리는 딸들에게 돈도 보내줘야 했다. 최악의 상황에 내몰린 그는 동생에게 말했다.

“나를 팔아줘. 북송돼 고문 받고 짐승 취급을 당하는 것보다 차라리 한족과 사는 게 낫다고 봐. 많은 탈북 여성들이 중국 시골에 팔려간다고 하는데, 나도 좀 팔아서 3000위안만 나를 주고 나머지는 네가 다 가져.”

동생도 방법이 없었다. 허 씨를 데리고 있다간 자기도 더 위험해지는 것이다. 그는 북한 여성들을 파는 브로커를 찾아 데리고 왔다.

브로커는 그를 차로 몇 시간 걸리는 외진 산골에 데리고 가더니 그곳에 이미 시집와 있는 어느 탈북 여성의 집에 맡기고 사라졌다. 이어 현지에서 다시 중매를 서주는 브로커가 나타났다. 그가 어떻게 말했는지 몇 시간이 되자 남자들이 하나 둘 나타나 그를 살펴보고 사라졌다.

저녁에 또 한 할머니가 와서 그를 살펴보더니 다음날 아침에 또 나타났다. 그리곤 브로커와 합의를 보았는지 그를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갔다. 30대 중반의 아들이 장가를 못 가자 모친이 나서서 북한 여자를 산 것이다. 집에 가보니 너무 기가 막혔다. 마을에서 가장 남루한 집이었고, 천정은 연기로 새까맣게 그슬려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심양의 브로커는 시골 브로커에게 허씨를 넘겨주고 1만 위안을 받았고, 이중 3000위안을 허 씨에게 주었다. 시골 브로커는 허 씨를 36세라고 속이고 1만6000위안을 받았다.

당시 한족 동네에선 탈북 여성은 좀 살다가 말을 익히면 달아난다고 기피하는 분위기였다. 허 씨도 그 동네에서 계속 살 생각이 없었다. 말만 좀 익히면 도망가려 했다. 브로커도 허 씨에게 “도망치게 되면 나를 다시 찾으라”며 전화번호를 적어주었다. 그가 도망가면 다시 딴 곳에 팔 생각이었던 것이다.

사연을 알게 되면서 허 씨는 새 남편으로 인연을 맺은 한족 남성과 그의 어머니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이 가난한 집에서 감당하기 어려운 1만6000위안을 들여 여자를 샀는데 내가 달아나면 이 사람들은 뭔 죄란 말인가.”

시어머니와 남편은 그를 극진하게 대했다. 그렇지만 그는 북에 남겨둔 두 딸을 생각하며 늘 냉정해지려 마음을 가다듬었다.

두 달쯤 지난 뒤 허씨는 시름시름 않기 시작했지만 신분증이 없어 병원으로 갈 수도 없었다. 시어머니가 동네 한약집에 가서 한 달 분 약을 사와서 하루 세 번 꼬박꼬박 약을 달여 주었다. 쓴 약을 삼키면 사탕을 입에 넣어주었다.

허 씨는 북한에서 두 딸이 기다린다고 말했다. 남편은 두 말하지 않고 얼마나 필요하냐고 물었다. 1000위안이 든다고 하자 남편은 밖에 나가 친구에게서 그 돈을 빌려왔다. 그러나 돈을 보내는 브로커 비용 300위안이 더 필요한 허 씨는 밖에 나가 자신의 머리를 200위안에 팔았다.

짧은 머리가 되어 나타난 허 씨를 보고 시어머니는 사연을 물었다. 그날 저녁 식탁에 앉은 세 사람은 아무 말도 없었다. 서로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밥을 다 먹었을 때 시어머니가 슬그머니 100위안을 식탁 위에 올려놓고 일어섰다.

그때 허 씨는 이런 사람들을 버리고 달아나려던 자신을 끊임없이 자책했다. 꽁꽁 얼었던 마음이 정에 서서히 녹기 시작했다. 남편은 북한에서 두 딸을 데려오면 자기가 잘 키우겠다고 말했다. 2008년 2월 둘 사이에 아들이 태어났다.

한국에 입국한지 2년 뒤인 2011년 어린 아들과 함께 월미도를 찾은 허옥희 센터장.
가족의 완성
어느 날 한국에서 전화가 왔다. 심양에 살던 동생이 그동안 한국에 갔던 것이다.

“언니. 거기 있지 말고 빨리 여기로 와. 내가 선을 알려 줄게.”

그런데 그때는 몸이 아파 갈 형편이 못됐다. 두 번째 전화가 왔을 때는 출산을 앞두고 있었다. 세 번째 전화를 받았을 때 아이가 6개월 정도 됐을 때였다.

허 씨는 끊임없이 고민했다. 한국에 가서 새 삶을 살 수 있는데, 이렇게 낙후된 타국의 농촌에서 평생 농사짓는 아낙네로 살고 싶지 않았다. 더구나 북에서 데려오려는 딸들까지 그렇게 살게 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떠나자고 하니 ‘마마’라고 부르며 방바닥을 기어 다니는 아들이 밟혔다.

남편에게 몰래 “내가 한국에 가서 자리 잡고 당신과 아들을 데리고 오겠다”고 말하자 그는 눈물만 뚝뚝 흘리며 아무 말도 못했다. 탈북 여성들이 다 도망친다는 말을 들었는데, 드디어 자기에게도 그런 운명이 오는구나 싶었던 것이다.

시어머니에겐 말도 꺼내지 못했다. 설득해서 될 문제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세 번째로 거절하면 한국으로 가는 선이 영영 막힐 것 같았다.

2008년 10월 허 씨는 모질게 마음먹고 데리러 온 사람을 따라 집을 나섰다. 그를 따라 동남아 국가를 거쳐 이듬해 1월에 한국에 도착했고, 5월에 사회에 나왔다.
처음 정착한 곳은 대전이었다. 그의 머리 속엔 자식들을 데려와 한 집에서 살게 하겠다는 마음 밖에 없었다.

닥치는 대로 일했다. 차 부품업체에 들어가 120만 원을 받고 일했다. 반찬을 살 돈도 아까워 죽만 쒀서 먹었고, 세탁기 살 돈이 가까워 손으로 빨래를 했다.

집 앞에 있는 과일 가게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탐스러운 사과를 사먹고 싶었지만 그때마다 딸을 생각하며 참았다. 나중에 그는 딸이 한국에 온 뒤에야 처음으로 그토록 사고 싶었던 사과를 사먹었다.

그렇게 악착같이 일해 6개월 만에 700만 원을 모았다. 그리고 여권이 나오자마자 주변 사람들의 돈까지 빌려 1000만 원을 들고 중국으로 향했다.

처음 찾아간 곳은 시어머니와 남편이었다. 두 사람은 자신들은 물론 아들까지 두고 도망간 북한 며느리에 대한 원망이 가득 차 있었다. 기어 다니던 아들은 먼지를 뒤집어쓰고 마당에서 놀고 있다가 허 씨를 보자 아버지 품으로 숨어버렸다.

허 씨가 온 진짜 목적은 이들이 아니라 북한에 남겨둔 두 딸을 데려오는 것이었다. 그는 남편과 함께 연길로 갔다. 그곳에서 브로커를 찾아 딸을 데려오는 작전을 짰다.

남편이 직접 두만강에 나가 강을 건너온 두 딸을 맞았다. 첫째 딸은 강을 건너면서 신발을 잃어버렸다. 남편은 자기 신발을 벗어주고, 자신은 양말만 신고 밤새 산을 함께 넘었다. 연길에서 두 딸과 상봉할 때의 그 감격은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다. 삼촌 집에 맡겨져 자란 두 딸도 엄청나게 고생했다. 3년 10개월 만에 나타난 엄마에 대한 원망이 너무나 컸다.

고마운 것은 딸들이 자기들을 맞아주고 어둠 속 산길을 함께 넘었던 남자가 엄마의 남편이라는 사실을 담담하게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허 씨는 두 딸을 데리고 직접 중국 남부 도시로 향했다. 이동을 안내하는 한족 브로커들의 손에 20살과 17살 된 딸을 차마 맡길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두 딸이 동남아 국가로 가는 버스를 타는 것까지 보고 그는 한국에 들어왔다.

딸들도 몇 달 뒤 무사히 한국에 들어왔다. 한국에 와서야 허 씨는 딸들에게 중국에 남동생이 있다는 사실을 털어놓았다. 그러자 맏딸이 말했다.

“엄마, 난 다 받아들일 수 있어. 동생이 있으면 좋지.”

허 씨는 중국의 남편과 아들도 다시 몇 달 뒤 국제결혼으로 데리고 왔다. 드디어 허 씨가 그렇게도 꿈꾸던, 한 집안에서 모여 사는 가족이 완성된 것이다.
“이게 제 잘못인가요.”
그러나 그 꿈은 얼마 안돼 깨졌다. 딸은 몇 달 뒤 대학 입시를 준비한다며 입시 준비학원으로 갔고, 둘째도 대안학교에 가서 공부한다며 기숙사로 나갔다. 다시 뿔뿔이 흩어진 것이다. 곧 딸들은 또래와 어울려 다니며 한국 사회에 빠르게 녹아들었다. 가족이 한자리에 모이긴 쉽지 않았다.

대학에 입학해 3년쯤 다니던 맏딸은 탈북자라는 꼬리표가 싫다며 호주로 건너가 현지에서 대학을 다닌 뒤 한 회사에 다니고 있다. 둘째도 서울에서 대학을 나와 회사에 취직해 잘 다니다가 얼마 전에 결혼했다.

허 씨는 집에서 16살 된 아들과 함께 산다. 세 살 때 한국에 온 아들은 이젠 중국말을 다 잊어버리고 완전히 한국 아이가 됐다. 허 씨는 한국에 온 뒤 아들의 중국 성 씨를 자신의 성으로 바꾸었다.

자라면서 “엄마, 나는 왜 누나들과 성이 달라?” “엄마, 작은 누나 방에 있는 가족사진 속 남자는 누구야” 등 쉽게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을 던질 때면 가슴이 아팠지만, 지금은 아들도 자신의 처지를 이해하고 있다. 이중국적자라 몇 년 뒤 성년이 되면 자신이 직접 국적을 선택해야 하는데, 한국 국적으로 선택하라는 엄마에게 “그때 가서 보자”는 말만 해 속을 썩이고 있다.

남편은 아직도 한국말을 잘 하지 못한다. 그는 한국에 오자마자 건설현장에 취직해 열심히 돈을 벌고 있다. 지금도 “내가 돈을 잘 벌지 못해 당신이 나가 돈 벌게 한다”며 자책하는 착한 마음은 그대로다.

허 씨는 중국에서 딸을 데리고 온지 얼마 안돼 서울로 이사를 했다. 임대아파트를 교환하기 위해 SH공사에 찾아갔을 때 여직원이 가족관계를 적으라고 했다.

한족인 남편과 아들, 탈북자인 두 딸을 적어 내자 여직원이 의아한 눈빛으로 쳐다보며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고 말하려다 말꼬리를 흐렸다. 그 눈빛과 말을 허 씨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나도 내 인생이 이렇게 될 줄 어떻게 알았겠어요. 살다 보니 이렇게 됐는데, 이게 제 잘못인가요.”

허 씨와 남편은 2019년 2500만 원을 들여 중국에 사는 시어머니에게 좋은 집을 지어주었다. 허 씨가 들어갔을 때 제일 한심했던 집이 지금은 동네에서 제일 좋은 집으로 바뀌었다.

“저는 북한에 있을 때 동생 두 명에게 집을 사주었어요. 그리고 중국에도 지어주고 하니 제 인생에 집을 세 채나 가족들에게 해주었네요.”

본인도 지금 서울 강동구에 새 집을 분양받아 잘 살고 있다.

허옥희 센터장이 거리에서 자신이 운영하는 방문요양센터를 홍보하고 있다.
“우리의 잘못이 아닙니다.”
서울에 올라와서 허 씨가 택한 직업은 간호조무사였다. 40세가 넘으니 취직도 안 되고 마땅히 할 수 있는 일이 없을 때 평생 일할 수 있는 요양보호사라는 직업을 선택했다.

짬짬이 사회복지사 자격증도 땄다. 이후 간호조무사로 2년, 요양원에서 1년 일한 뒤 2015년 1월 미사리 인근인 하남 신장동에 ‘114방문요양센터’를 만들어 센터장이 됐다. 지금은 사회복지사 1명과 요양보호사 25명이 센터에서 일하고 있다.

처음 일을 시작했을 때는 말투를 보고 보호자들이 “중국 사람이 이런 일도 하냐”며 물어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그러나 이젠 말투를 많이 고쳐 물어보는 사람도 많지 않다고 한다.

노인들을 상대하는 직업적 특성상 늘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할 수밖에 없다.

“나는 어떤 노인으로 늙어야 하는지 계속 생각하게 돼요. 그리고 돈이 있다고 늙어서도 행복한 것은 아니더군요. 돈이 있어 더 불행한 노인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나는 어떻게 늙어야 하는지, 자식에게 어떤 엄마가 돼야 하는지 계속 생각할수록 자식들과의 관계가 계속 걸렸다.

딸들을 데려왔지만, 이들은 그들의 인생을 살게 되고, 엄마도 계속 밖으로 나가 일을 하다보니 생각만큼 서로가 다가가지 못했다. 서로 간 갈등도 많았다.

“엄마의 입장에선 내가 너희들과 좋은 곳에서 살기 위해 어떤 희생을 치렀는지 알게 하고 싶은데, 딸들은 지금도 사춘기에 자기들을 오랫동안 두고 사라진 엄마를 원망하는 마음이 있어요. 만나고 보니 내가 북에 두고 올 때의 그 애들이 아니었어요. 둘째 같은 경우는 엄마가 갑자기 사라지고 많은 고생을 겪다보니 충격이 컸던 것 같습니다. 자식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니 그 애들은 엄마가 잔인하다고 생각할 수 있어요.”

그런데 이제 다 자라 성인이 된 딸들과 서로 마주 앉아 속을 터놓고 얘기하긴 쉽지 않았다. 그래서 그가 생각한 것이 엄마의 마음을 담은 책을 내는 것이었다.

“제가 한국에 와서 살아보니 정말 좋은 점이 많은 곳입니다. 북한에선 정부가 시키는 대로 해야 했지만, 여기선 하겠다고 마음먹으면 뭐든지 할 수 있고, 자기 주도적으로 살 수 있어요. 여기선 나를 위해 살 수 있다는 말이죠. 저를 보면 40세가 넘어서도 배울 수 있고, 또 글을 써서 책을 내고 싶으면 이 나이에 책도 낼 수 있지 않습니까. 이곳이 꿈을 이룰 수 있는 기회의 땅이니 다른 탈북민들도 북한에서처럼 수동적으로 살지 말고 꿈을 가지고 주도적으로 인생을 살아갔으면 좋겠어요.”

그가 책을 낸 동기는 또 있다.

“주변에 보면 중국을 거쳐 오다보니 저와 비슷한 처지의 탈북 여성들이 꽤 많아요. 중국에서 원치 않은 삶을 살았고, 한국에 오면서 애들과 이별한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삶을 두고 자신들이 큰 잘못을 한 것처럼 기를 펴지 못하고 사는데 용기를 주고 싶은 마음도 있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 수밖에 없었던 것이 우리의 잘못만은 아니거든요. 우리에게도 당당하게 살 권리가 있거든요.”

동아일보·남북하나재단 공동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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