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 경기장에서 서서 보는 관중
결국엔 모두에게 피해 끼치게 돼
합리적인 선택이 불러온 ‘모순’
대한민국 축구의 ‘꺾이지 않는 마음’에 전 세계가 놀랐던 2022 카타르 월드컵이 19일 결승전을 마지막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경기를 지켜보는 관중을 TV 화면으로 보다 보면 죄다 서 있는 장면을 자주 목격하게 됩니다. ‘저렇게 모두가 서서 보는 상황이면 가운데 좌석에 앉아서는 제대로 경기를 관전할 수 없겠구나’라는 생각마저 듭니다. 불합리해 보입니다. 앞사람에게 앉아달라고 요구해야 할까요? 모두가 앉아서 보면 될 것을 왜 다 서서 보는 걸까요? 결론부터 말하면 개인의 입장에서는 앉아서 보는 것보다 서서 보는 것이 합리적이기 때문에 모두가 서서 보는 것입니다.
○ ‘구성의 모순’ 드러나는 축구 경기장
만약 앉아서 보고 있다가 결정적인 장면에서 앞사람이 일어선다면 그 멋진 장면을 앞사람의 등 뒤에서 소리만으로 마주할 수 있습니다. 파울루 벤투 전 축구 대표팀 감독은 직전 경기 퇴장으로 인해 3일 대표팀의 조별리그 3차전이었던 대한민국-포르투갈 경기에선 관중석에 있었습니다. 자주 일어서는 벤투 감독에게 시야를 빼앗긴 뒷좌석 관중이 항의하는 장면이 카메라에 포착되기도 했죠.
경기장을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는 데 걸리는 시간은 단 몇 초에 불과합니다. 이 순간의 환희는 다시 보기로는 절대 느낄 수 없습니다. 결국 합리적인 개인의 선택은 경기를 서서 보는 것입니다. 이처럼 개인에게는 합리적인 선택인데, 개인들이 모인 집단 또는 사회에서 볼 때 불합리한 결과가 나오는 현상을 경제학에서는 ‘구성의 모순’이라고 합니다.
개인이 부자가 되려면 돈을 한 푼이라도 아껴야 합니다. 백화점 근처에는 가지도 말고 신용카드도 만들지 않아야 합니다. 부자들의 절약을 통한 성공 스토리는 감동적이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세상 모든 사람들이 자린고비가 된다면 백화점, 신용카드사 직원들 월급은 누가 줄까요. 절약은 개인에게는 미덕이지만 국가 경제에는 악덕일 수 있습니다. 이를 ‘절약의 역설’이라 부릅니다. 구성의 모순의 대표적 사례입니다.
○용의자들 자백 끌어내는 ‘죄수의 딜레마’
이런 일이 왜 일어나는 것일까요? 1998년 영화 ‘뷰티풀 마인드’의 실제 주인공인 존 내시의 게임 이론이 하나의 설명법이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설명하겠습니다. 여기 두 사람의 범죄 용의자가 있습니다. 둘은 범행을 모의하고 함께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두 사람은 체포되었고 각자 다른 방에서 취조를 받게 됩니다. 노련한 형사들은 고립된 용의자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당신의 친구는 당신이 범행을 주도했다고 증언했습니다. 이렇게 범행을 모두 부인하면 당신이 모든 혐의를 뒤집어쓰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당신은 징역 10년, 당신의 친구는 징역 6개월에 처해질 겁니다.”
이 순간 이들은 공범인 친구와 맺은 약속이 떠오릅니다. “우리가 붙잡히더라도 증거는 거의 없을 거야. 우리가 서로 고자질만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모두 징역 1년 정도로 마무리되겠지. 의리! 절대 배신하지 말자!” 하지만 노련한 형사는 여기에 덧붙입니다. “당신의 친구는 수사 협조에 대한 기여가 참작되어 아마 집행유예로 풀려날 겁니다. 잘 생각해서 결정하세요. 친구의 범행을 말하지 않으면 당신이 모든 죄를 떠안게 됩니다.” 순간 흔들리게 된 용의자는 묻습니다. “만약 제가 모든 걸 말하면 어떻게 되나요?” “아마도 둘 다 징역 3년에 처해질 겁니다.”
고립된 용의자는 합리적으로 계산을 하게 됩니다. ‘끝까지 부인하면 1년 또는 10년, 자백하면 석방 또는 3년. 그럼 평균 형기는 부인할 때 5.5년 대 자백할 때 1.5년.’ 용의자들은 결국 모두 자백을 하고, 징역 3년을 받게 됩니다. 용의자들에게 가장 좋은 결과인 징역 1년은 달성되지 않고 엉뚱한 결과에 도달합니다. 이러한 엉뚱한 결과를 ‘내시 균형’이라고 하고 이러한 상황을 ‘죄수의 딜레마’라고 부릅니다.
○ 장기적 관점과 적극적 소통이 해결책
애덤 스미스는 자유가 보장되는 상황에서는 개인이 이기적인 선택을 하더라도 ‘보이지 않는 손(가격)’의 인도를 받아 시장 전체에 이익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죄수의 딜레마는 이러한 주장에 반대되는 이야기입니다. 개인에게 이익이 되는 합리적인 선택이라도 사회 전체에는 이익이 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절약의 역설처럼 말입니다. 이런 죄수의 딜레마와 같은 상황을 우리는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요.
첫째, 이러한 딜레마 상황은 반복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내시 균형이 유일한 해결책일 것 같지만 상황이 비슷하게 반복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은 딜레마 상황을 벗어납니다. 단기적 이익만 좇을 경우 신의를 잃게 되고 장기적으로는 득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소통입니다. 소통과 협력은 때로 법적 권리로 보장될 정도로 중요한 가치를 가집니다. 한 가지 사례를 들어보겠습니다. 여기 두 어린이가 귤 하나를 두고 싸우고 있습니다. 서로 가져야 한다고 말입니다. 현명한 어머니가 묻습니다. 이유가 무엇이냐고요. 언니는 미술 숙제 재료로 귤껍질이 필요하고, 동생은 지금 당장 귤을 먹고 싶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귤을 까서 언니에게 껍질을, 동생에게는 알맹이를 주었습니다. 역사학자인 유발 하라리는 저서 ‘사피엔스’에서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생각하는 인간이 지구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소통하는 인간이 지구를 지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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