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인생 2막은 유난히 빨리 시작됐다. 30대 후반에 10여 년간 해온 기자 생활을 접고 맥주집을 내겠다고 나섰다.
어릴 적 꿈이 기자였고 나름 재미있게 일했지만, 큰 사건 하나가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흔들어놓았다. 1998년 독일연수 막바지에 영국에서 당한 교통사고로 아내가 중증 장애인이 됐다.
백경학 푸르메재단 상임이사(59)는 평범한 기자에서 산하기관을 포함해 연간 670억의 예산을 다루는 비영리단체의 경영자로 변신했다.
동년배들의 은퇴 시즌, 그의 인생2막은 어떻게 전개되고 있을까. 9일 서울 종로구 신교동 재단사무실을 찾았다.
‘피와 맥주로 세워진’ 재단
사고 직후 아내는 응급수술로 왼쪽 다리를 잘랐지만 염증 때문에 사경을 헤맸다. 최후의 수단으로 두 번 더 절단수술을 받은 뒤에 의식이 돌아왔다. 이후로도 힘든 치료와 재활훈련이 이어졌다. 영국과 독일에서 접한 유럽의 재활병원은 철저히 환자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3년 반 만에 돌아온 한국은 낯설었다. 장애인이 치료받기도, 생활하기도 너무 힘든 나라였다. 뭐라도 해야만 했다. 부부는 언젠가는 환자가 주인이 되는 작은 재활병원을 만들자는 다짐을 하게 됐다.
“당시 집사람이 재활병원에 입원했는데 병원비로 제 월급이 고스란히 들어갔습니다. 병원에 입원했는데 왜 따로 간병인을 고용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어요. 병원은 의사 만나기도 힘들고, 환자가 아닌 의료진이 주인이더군요. 유럽에서는 의료진이 24시간 환자를 가족처럼 보살폈죠. 더 늦기 전에 유럽 같은 병원을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병원을 만들려니 먼저 재단이 필요했고 재단을 만들려면 ‘재산’이 있어야 했다. “재산을 마련하자!”
마침 2002년 월드컵을 앞두고 주세법이 바뀌면서 소규모 양조가 풀린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독일에서 양조학을 전공했던 후배가 떠올랐다. 월드컵 전에 독일식 하우스 맥주를 만들겠다는 생각에 마음이 급해졌다. 2001년 말 회사에 사표를 내고 이듬해 7월 독일의 맥주축제 이름을 딴 ‘옥토버훼스트’ 1호점을 강남에 열었다.
2005년 드디어 푸르메재단이 출범했다. 8년에 걸친 소송 끝에 아내의 교통사고 피해보상금을 받았고, 아내는 이중 절반인 10억 7000만 원을 재단에 내놓았다. 여기에 백 씨의 옥토버페스트 지분 10%가 더해져 재단의 ‘기본재산’이 되었다.
“그래서 우리끼리는 농담삼아 푸르메를 피와 맥주로 이뤄진 재단이라고 말해요.”(백 씨)
국내유일 어린이 재활병원
-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았죠. 손꼽아 본다면.
“푸르메가 어린이의료사업을 할 수 있게 해주신 분, 이철재 사장님이 가장 고맙죠. 아무런 조건 없이 도와줬어요. 당시 우리나라에 장애어린이들이 재활치료를 받을 수 있는 곳이 별로 없었어요.
이철재 사장은 미국 유학 시절 교통사고로 하반신이 마비됐지만 벤처창업에 성공한 사업가인데, 먼저 연락을 해오셨어요. 부자라면 현금을 기부했겠지만, 그 분은 자신이 가진 회사 주식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 10억 원을 마련해주셨어요. 동아일보에 기사가 났고 그걸 보고 감동한 김정주 NXC(넥슨의 지주회사) 대표가 더 큰 기부를 해주셨지요.”
2월 말 미국에서 유명을 달리한 김정주 대표는 든든한 후원자였다. 2016년 서울 상암동에 문을 연 국내 최초의 어린이 재활병원 건립에 일찌감치 200억 원을 기부해 마중물 역할을 했다.
재단은 ‘푸르메재단 넥슨 어린이 재활병원’이란 병원이름으로 고마움을 표했다.
‘기부는 근근히 먹고 살만한 분들이 실천한다’는 말이 있다. 부자들은 세금감면이니 사회적 명예 등을 따지지만, 조건없이 기부하는 것은 대부분 보통사람들이라는 것. 재활병원 건립에는 시민 1만 명, 200개 기업이 정성을 모아줬다.
“불치병으로 아이를 먼저 떠나보낸 한 부부는 보험회사에서 받은 보험금을 기부했고 이해인 수녀님은 시집 인세를 내주셨어요. 재단 홍보대사인 가수 션 씨는 한 해 20개가 넘는 마라톤을 뛰면서 기금을 모아줬어요. 이렇게 나머지 230억 원이 기적같이 모금됐습니다.”
재단의 초대 이사장을 맡아준 김성수 성공회 주교는 그의 평생 스승이 됐다. 대기업에 기금을 부탁하러 갔다가 성과없이 돌아서며 어깨가 처진 백 씨에게, “본래 성직이나 사회사업이나 앵벌이”라며 “계속 두드리다보면 사람들 마음이 움직이게 된다”고 위로해주곤 했다.
‘구조적 적자’라는 숙명
하지만 어린이 재활병원은 ‘구조적 적자’라는 숙명을 안고 있었다. 수익을 내려면 비싼 검사와 수술을 많이 해야 하는데 재활병원은 그런 게 있을 수 없다. 유수의 대형병원들이 재활병원을 운영하지 않는 이유다.
“우리 병원이 자리잡았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어요. 지속가능해야 하는데 그게 어려워요. 재활치료의 기본이 물리치료와 작업치료인데 수가가 굉장히 낮거든요. 치료할수록 적자가 나는 구조예요.”
푸르메 재활병원은 애초에 연간 30억 원 정도의 적자요인을 안고 있었다. 일부는 서울시와 마포구의 지원을 받고 나머지는 모금 등으로 메우려 각오했던 터였다. 그런데 코로나19사태로 환자가 크게 줄면서 2020년 53억, 2021년 51억 적자를 기록했다. 지난해 병원 설립 5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김정주 대표에게 긴급지원을 요청해 도움을 받기도 했다.
이처럼 어려울 때면 늘 선한 사람들이 나타나 힘을 보태줬지만, 정부나 지자체는 그의 기대와는 딴판이었다.
“어린이재활병원은 꼭 필요한 곳이죠. 공공이 할 일을 우리가 앞장서서 하는 것이니 만큼 때가 되면 지원을 해줄 거라고 내심 믿었어요. 그런데 도와주지 않더라구요.”
오세훈 서울시장은 5월 ‘약자와의 동행’을 내세우며 2026년까지 6000억 원을 들여 공공병원 2개를 짓겠다고 했다. 백 씨 생각은 그럴 돈으로 현재 잘하고 있는 공공병원 성격의 민간병원 10개를 지원해주면 훨씬 적은 비용으로도 환자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될 수 있다. 또 중증 어린이치료에 대해 보험 수가를 1.5배 정도 올려주는 ‘시범수가’만 적용해줘도 당장의 적자 고민은 해소된다.
“정부는 우리 재활병원이 사회복지시설 용지에 지어졌으니 요양병원이라며 어린이 재활병원에 적용되는 시범수가를 적용해줄 수 없다고 합니다. 국내 유일한 어린이재활병원을, 마포구가 내준 땅이 의료시설용지가 아니란 이유로 인정해줄 수 없다는 논리죠. 그럼 부지의 용도를 바꿔달라고 마포구에 요청했지만 힘들다는 입장입니다.”
공무원들의 무책임과 관료주의는 21세기를 사반세기나 지나가는 시점에도 여전한가 보다.
그때 그 사고가 없었다면?
사실 그와는 대학시절부터 아는 사이다. 그는 기사를 통해 사회를 고발하고 바꿔보겠다는 꿈을 가졌고 현재도 계속 새로운 꿈을 꾸고 있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평생의 노력과 재산을 투여해 아내와 같은 장애인들이 제대로 치료받을 길을 뚫어왔다.
인간, 이렇게 사는 게 맞는 길 아니었을까. 후배에게 이런 얘기 했더니 ‘뼈 때리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 고통, 그 고난을 겪어야 한다면 자신은 피하고 싶다’고.
-만약 그날의 사고가 없었다면 지금 백경학 씨는 어디서 뭘하고 있을까요?
“그냥 기자생활 했을 것 같아요. 정치부나 사회부보다 문화부 종교담당 기자를 재미있게 했을 것 같아요.”
-지금 나이(59세)면 언론계에 남았다 해도 곧 정년일 텐데요.
“음…. 그래도 다른 것 하지 않고, 기자로서 살았을 거예요. 굳이 돈을 만들겠다며 맥주집을 열려는 모험은 안했겠죠. 그때 그 사고로 인해 격랑과 파고에 맞서 싸우게 됐죠.
아내가 세상을 살아가야 하니 더 강해져야 했고, 겨우 7살인 딸아이 붙잡고 살아나가야 했으니까. 어떤 게 최선이고 내가 감당할 수 있을까 생각했습니다. 다행히 벼랑에서 떨어지지 않았고 주위 분들이 늘 힘을 보태 주셨어요. 하지만 돌아보면 참 힘들었어요.”
고통은 현재진행형이다. 그의 부인은 나이가 들어가면서 ‘도깨비 통증’이라는 환상통(phantom pain)에 시달린다. 절단장애인에게 많은 증세로, 없어진 발등과 발목을 수백개 바늘로 주기적으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온다고 한다.
갈수록 자주, 오래 지속되는 통증에 시달리는 아내를, 그는 안타깝게 지켜볼 수밖에 없다.
재활에서 자활로 -장애청년들의 일자리가 될 농장 사업
그의 관심은 재활에서 자활(自活)로 뻗어가고 있다. 재활치료를 열심히 받은 어린이들이 청년이 되면 평생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그가 농장 짓는 일에 나선 이유다. 우연히 농사가 자폐나 발달장애 청년에게 도움이 된다는 걸 알게 됐다. 직원들과 함께 네덜란드 스마트팜을 둘러보며 해답을 찾았다.
“오래된 작은 농장들을 개조해 암 뇌졸중 치매 정신장애환자, 발달장애 청년을 보호하는 ‘케어팜’을 만들었더군요. 병원에 누워있는 것보다 자유롭게 농사짓고 닭 모이주고 자연을 호흡하는 게 비용도 적게 들고 행복하다는 확신이 들었죠.”
이런 농장을 만들겠다고 캠페인을 시작하자 발달장애 아들(33)을 둔 이상훈 장춘순 부부가 경기도 여주시 오학동의 농장 부지 3800평을 기부했다. 재단에서 장애청년들이 행복하게 일할 수 있는 농장을 잘 만들어달라는 부탁과 함께.
이 땅에 건축비 130억 원을 들여 1200평 유리온실과 카페 식당 게스트하우스 프로그램실 등을 짓고 9월에 오픈식을 했다.
인근 SK하이닉스에서 건축비와 운영비를 도와줬고 농장에서 생산된 토마토와 버섯은 모두 사주는 등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종종 농장을 방문한 분들이 장애청년들이 하루 4시간 일하고 월급 100만 원씩을 받는다고 하면 ‘외국인 노동자 4명 고용하면 될 텐데’라며 혀를 차세요. 하지만 우린 생산성이 아니라 이 청년들의 행복을 원하는 거예요. 추구하는 가치가 다른 거죠.”
현재 장애청년 53명이 일하고 푸르메 직원 13명이 이들과의 가교역할을 해준다. 4시간 일하고 회사에서 밥 먹고 2시간은 돈쓰는 법 수업을 듣는 농장은 장애청년들에게는 꿈의 직장인 셈이다. 그래서 53명은 나름 ‘엄격한 선발시험’을 거쳤다.
“토마토와 저울을 주고 500g을 달아 보라고 해요. 400g만 달았더라도 개념 이해한 거면 합격. 하지만 아예 그런 개념을 모른다면 곤란하지요. 또 ‘저 화장실 다녀와도 돼요?’ 정도의 자기표현, 의사소통은 돼야 합니다. 부지를 기부한 부부의 아들 덕희 씨도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해 농장에 출근하고 있어요.”
-농장에 가면 어떤 느낌이 드세요?
“행복하죠. 아이들이 참 이뻐요. 처음엔 눈도 안 마주치던 친구들이 다가와 먼저 인사를 하지요. 과자 같은 걸 내밀며 ‘보고 싶었어요. 사랑해요.’라고. 청년들은 또래집단을 통해 사회성을 배우게 됩니다. 일자리와 월급이 그들에게 자존감을 높여줘요. 어느 어머님이 하신 말씀인데, ‘너 이거 왜 또 샀어? 하니 ’내가 번돈이니 내가 알아서 쓸거에요‘하는 대답을 듣고, 너무 행복하다고 하세요. 조금씩 자립하는 아들이 대견한 거죠.”
누구나 장애인이 될 수 있다
서울 종로구 효자동 사거리 모퉁이에 4층짜리 푸르메재단 건물이 서 있다. 320평 건평에 1층은 장애인치과, 2층은 어린이재활의원, 3층 장애인복지관, 4층 재단 사무실이 자리하고 있다. 1층 로비 구석에는 발달장애 청년들이 운영하는 카페도 있다.
종로구 땅을 빌려 재단이 75억 원을 들여 새 건물을 지은 뒤 기부체납했다. 푸르메재단은 이곳과 상암동의 어린이재활병원, 여주의 푸르메 소셜팜 등 여러 장애인을 위한 시설 운영을 책임지고 있다.
-‘인구 10%가 장애인’이란 표현은 정확한 건가요.
“선진국은 그보다 높습니다. 한국은 등록장애인 264만명(2021년)이니 5~6% 정도인 셈인데 통계에 잡히지 않는 장애인이 많습니다. 발달장애 아이 엄마들은 아이가 나아질 거라고 믿죠. 장애인 등록이 낙인효과를 가져오거나 형제자매가 불이익을 받을까 걱정합니다.
노화나 질병으로 인한 기능부전도 모두 장애예요. 암 수술 받은 뒤 누워 지내게 되면 외국에서는 장애인 등록을 합니다. 장수사회에서 장애인은 늘어날 수밖에 없어요.”
-일이 궤도에 올랐는데, 은퇴를 생각해본 적 있나요?
“65세 정도면 물러나려고요. 어느 틈에 ‘쉰세대‘가 됐다고 느껴요. 저는 어떤 사안을 결정할 때 나이든 기부자들이 뭘 원할까를 생각하죠. 이게 20년 전 사고방식이예요. 젊은 세대는 현금 기부도 있지만 페이스북에 있는 재단관련 기사에 ‘좋아요’를 눌러주는 것도 기부라고 생각해요. 이런 감각을 아는 새로운 사람이 꾸려가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물론 저는 뒤에서 밀어주고 돕는 일을 해야지요.”
-재단의 최초 출자자인데, 회사라면 주식을 팔거나 배당을 받을 텐데 재단은 어떤가요.
“재단은 만들어진 순간 사회의 것이지요. 자체 생명력을 갖고 꾸려질 거라고 봅니다. 딸아이는 공무원으로 취직해 스스로 살아갈 힘을 기르고 있어요. 아이가 대학에 입학한 뒤 푸르메재단에서 자원봉사를 하겠다기에 다른 곳에서 하라고 했어요. 상임이사 딸이라고 하면 직원들이 신경쓰지 않겠어요.”
10년 후를 바라보며 그에게는 꿈이 몇 개 더 있다. 푸르메 병원과 농장 모델을 가난한 동남아국가에 세워보는 일, 북한 장애어린이 재활을 돕는 일 등이다. 언젠가 그의 날개가 더 넓은 곳으로 펼쳐지기를 기대해본다.
인생 후반, 더 중요해지는 ‘돈 건강 행복’ 풍요로운 100세 인생을 맞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이 돈과 건강, 그리고 행복입니다. 이 모든 것은 어느 날 갑자기 갖춰지는 게 아니고 30~40대부터 차근차근 조금씩 준비해나가야 합니다. ‘100세 카페’에서는 특히 인생 2막을 잘 맞이하기 위해 미리미리 준비해야 할 돈과 건강 행복 이야기를 나눠보고자 합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