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년간 해외 의료봉사 공로로 제34회 아산상(대상) 수상… “‘이타적 삶’에 용기 가져달라”
“전쟁이 나 우리에게 도움이 필요할 때는 오지도 않다 이렇게 난민이 된 후에 와서 약만 주는 게 무슨 소용이냐.”
2000년 아제르바이잔 난민촌으로 의료봉사를 갔을 때 듣게 된 한 청년의 절규는 박세업(60) 글로벌케어 북아프리카본부장의 인생을 바꿨다. 신앙인으로 살아온 박 본부장은 1980년대 부산대 의과대학 재학 시절부터 해외 의료봉사에 관심이 많았다. 대학에서 일반외과로 전공을 정한 것도 “해외 의료선교사로 일하기에는 외과의사가 좋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대학 졸업 후 결혼해 아들 둘을 낳고, 외환위기를 겪으며 정신없이 살던 30대 후반의 박 본부장은 하루 평균 250명 환자가 찾아오는 개인병원 의사의 삶에 익숙해 있었다. 그러다 우연히 떠난 단기 해외 의료봉사에서 ‘젊을 적 꿈’을 되찾았다.
두 아들 학교에 미사일 떨어지기도
40세가 된 해 박 본부장은 경남 창원시에 있던 개인병원을 처분했다. 그러곤 2005년부터 현재까지 아프가니스탄, 모로코 등지에서 의사로, 보건전문가로 활동하고 있다. 지난달에는 그 공로를 인정받아 현대그룹 산하 아산사회복지재단이 주최하는 제34회 아산상 시상식에서 ‘아산상(대상)’을 받았다. 2015년 대한민국 해외봉사상(대통령상), 2020년 제9회 이태석봉사상과 제36회 보령의료봉사상(본상)을 받은 데 이은 4번째 수상이다. 박 본부장은 12월 14일 ‘주간동아’에 “고교 시절 교훈인 ‘웃는 자와 같이 웃고 우는 자와 같이 우는 사람이 되자’를 마음에 새기고 있다”며 “앞으로도 힘들고 어려운 사람 곁에 있겠다”고 수상 소감을 밝혔다.
2005년 박 본부장이 처음 향한 곳은 아프가니스탄이었다. 어느 나라로 떠나야 할지 고민하던 무렵 전쟁으로 아프가니스탄에 환자가 속출하는데 의사가 없어 수많은 사람이 죽어간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아프가니스탄행에는 박 본부장 아내도 지지를 보냈다. 전쟁으로 온갖 위협이 있는 곳이지만 ‘이타적 삶’의 가치를 배울 수 있도록 아들 둘도 동행했다.
“직접 가서 본 아프가니스탄은 예상보다 훨씬 비참했습니다. 하루 종일 폭탄 터지는 소리가 들리고, 끊임없이 자살 테러 소식이 전해졌어요. 도착하고 얼마 안 돼 두 아들이 다니는 학교에 미사일이 떨어지기도 했고요. 미국 기독교 NGO(비정부기구)가 수도 카불에 설립한 큐어국제병원에서 근무했는데 화상, 외상을 입은 환자가 매일 물밀듯이 들어왔던 기억이 납니다.”
큐어국제병원에서 일반외과 과장, 교육 부장을 지낸 박 본부장은 현지 의료진 교육에도 힘썼다. 당시 복강경 수술(절개 없이 복부 안쪽을 볼 수 있는 내시경을 이용한 수술)을 집도할 수 있는 의사는 한국인인 박 본부장뿐이었는데, 함께 일하던 의사에게 이 기술을 전수했다. 박 본부장에게 복강경 수술을 배운 닥터 카말은 현재 아프가니스탄 내 최고 외과의사로 손꼽힌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박 본부장은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2007~2009년 아프가니스탄 바그람 미군기지 내 코이카 한국병원장을 지냈다. 병원장이지만 직접 진료와 수술부터 현지 의료인력 교육까지 담당했다. 이때 길게는 12시간 이상씩 끼니를 거르며 수술에 몰두했다. 그럼에도 죽는 사람이 줄어들기는커녕 오히려 늘어나는 것처럼 느껴졌다.
“종일 수술해 한 사람을 살려놓으면 밖에서는 수백 명이 죽어나갔어요. 가난해 병원 근처에도 와보지 못하고 죽는 사람도 수두룩했습니다. 더 많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는 외과의사라는 포지션 외에 다른 무언가가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깊어졌죠. 주변 의사들에게 고민을 털어놓으니 ‘네가 하고 싶어 하는 게 바로 보건이라며 존스홉킨스대에서 공부해보길 권하더군요.”
50세 늦깎이 ‘보건대학원생’ 되다
박 본부장이 존스홉킨스대에서 보건학 석사 과정을 마친 나이는 50세였다. 박 본부장이 늦깎이 대학원생이 되는 바람에 형편이 어려워지자 아내는 베이비시터로 일했다. 마지막 학기에는 도저히 공부를 지속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친구들의 경제적 지원으로 무사히 학위를 땄다. 가족과 친구들에 대한 미안함, 간절함이 더해져 통상 2년 반이 걸리는 석사과정(100학점 취득)을 박 본부장은 11개월 만에 마쳤다.
“석사학위를 취득하니 여러 기관, 단체에서 러브콜이 쇄도했어요. 그 가운데는 안정적으로 월급을 받을 수 있는 보건사업도 있었습니다. 공부하는 동안 진 빚이 있었기에 솔직히 흔들렸어요. 하지만 마음을 다잡고 한국 의료봉사단과 NGO가 전혀 없는 모로코로 가기로 했죠. 모로코 주변에는 모리타니아, 말리, 부르키나파소 등 가난한 나라가 밀집해 있어 추후 활동 반경을 넓히면 되겠다 싶기도 했고요.”
박 본부장은 올해로 10년째 모로코에서 보건 전문가로 활동하고 있다. 가장 주력하는 보건사업은 결핵 퇴치다. 모로코는 알제리, 튀니지 등 인접 국가와 달리 여전히 결핵 발생률과 유병률이 높아 사망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지금까지 박 본부장이 치료한 모로코 내 결핵 환자만 2만7000명에 이른다. 코로나19 사태가 한창이던 2020년에는 모로코의 확진자를 돌보기 위해 한국에서 열리는 작은아들 결혼식에도 불참했다.
“두 아들에게는 늘 미안한 마음입니다. 하지만 어려서부터 제가 봉사하는 모습을 지켜봤고 저와 일해본 경험도 있어 저를 많이 이해하는 편이에요. 큰아들은 정보기술(IT), 작은아들은 디자인 분야를 공부했는데 지금도 여러 방면으로 저를 도와줍니다. 큰아들은 현재 제가 환자를 만날 때 쓸 전자의료차트(EMR)를 제작하고 있고, 작은아들은 홍보에 필요한 동영상과 출판물 등을 수시로 만들어줍니다.”
한국인 최초 모로코 의사면허 취득
박 본부장은 ‘아산상’ 수상 이틀 뒤인 11월 19일 곧장 모로코로 향했다. 8월 한국에서 고질병이던 허리협착증과 척추측만증 수술을 받고 재활을 하느라 꽤 오랜 기간 모로코를 떠나와 있었기 때문이다. ‘아산상’ 수상 소식은 재활 과정 중에 알게 됐다. 박 본부장은 모로코로 돌아가자마자 결핵 퇴치, 문맹 퇴치, 시골 여자기숙사 지원 등 자신이 자리를 비운 사이 현지 직원들이 맡아 운영하던 사업을 점검하는 데 여념이 없다.
올해 초 박 본부장이 문을 연 저소득층 클리닉의 환자들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3월 박 본부장은 한국인 최초로 모로코 현지 의사면허를 취득해 직접 진료를 볼 수 있게 됐다. 박 본부장은 “최근 12년간 보건 전문가로만 활동하다 다시 흰 가운을 입으니 감회가 새롭다”고 말했다. 영어, 프랑스어, 페르시아어, 모로코어, 아랍어 등 5개 국어를 구사하는 박 본부장은 어떤 환자가 오든 함께 웃을 수 있다.
박 본부장은 해외 의료봉사에 관심 있는 한국 의사들에게도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이제는 의료인이라는 이유만으로 희생을 강요할 수 없는 시대입니다. 그렇다고 의료인이라면 필수적으로 갖춰야 할 ‘이타적 삶’에 대한 철학까지 변질되는 것은 아닙니다. 4차 산업혁명 시대 선진 의료 기술을 가진 여러분이 용기를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머물고 있는 진료실을 박차고 나가 새로운 삶에 한 번쯤 도전해보라고 동료, 후배 의사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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