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클리 리포트]세상 밖으로 나온 은둔고수들이 ‘외톨이’들에게 건네는 조언
가정폭력-경제빈곤 등에 떠밀려… 세상 등지고 ‘자신 방’으로 숨어
“제발 병원에 가봐” 큰돈 준 친구… 아버지처럼 돌봐준 주치의 사랑
주변 도움에 삶 의지 찾고 새출발… 사회적 기업 ‘안무서운회사’ 활동
“은둔형 외톨이를 응원합니다” 12일
서울 마포구 홍대입구역 인근의 한 극장에서 열린 공연 ‘꼭꼭 숨었쇼: 사실 숨고 싶지 않았던 우리들의 콘서트’가 끝난 뒤 출연진
및 공연 관계자, 관람객 등이 함께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사회적 기업 ‘안무서운회사’가 주최한 이날 공연은 은둔형 외톨이
청년들과 은둔을 극복한 당사자 등 8명이 무대에 올라 자신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작사한 노래와 함께 연극을 펼쳤다. 안무서운회사
제공
《“아이들이 저에게 침을 뱉고, 때리고, 변기에 제 물건을 쏟았어요. 그때 주변에는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어요. 그대로 방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제 손으로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들었어요. 그래서 세상에서 고립돼 스스로를 방 안에 가두고 몸에 상처를 냈어요.”
12일 오후 10시경 서울 마포구 지하철 홍대입구역 인근의 한 극장. 장기간 인간관계를 맺지 않고 집 안에만 머무는 ‘은둔형 외톨이’ 경험이 있는 청년 8명이 함께 무대에 올랐다. 이들은 연극을 통해 은둔 경험을 고백하고 자신의 사연을 바탕으로 직접 작사한 노래를 불렀다. “이젠 내가 해줄 수 있는 말, 혹시 괜찮다면 물어봐도 될까요. 그댄 어떤 날이 제일 괴로웠나요. 그때 그날 혼자 어떻게 버텼나요.” 노래를 따라 부르던 관객들이 하나둘 눈물을 훔쳤다.
이날 공연의 제목은 ‘꼭꼭 숨었쇼: 사실 숨고 싶지 않았던 우리들의 콘서트’였다. 공연은 “꼭꼭 숨어라”라는 외침에 관객들이 “머리카락 보일라”라고 화답하며 시작됐다. 꼭꼭 숨었던 이들은 어떻게 과거를 딛고 공연에 나설 힘을 얻었을까. 이날 무대에 올랐던 김초롱 씨(30)와 송경석 씨(37), 정인희 씨(29)를 서울 강북구의 한 셰어하우스에서 19일 만났다. 이들은 중고교나 대학 시절부터 10년가량 방 안에 은둔했던 이력이 있다. 》
○ 세상의 각박함에 숨어버린 청년들
은둔형 외톨이를 향해 주변에선 “의지가 약해서 그렇다” “사지 멀쩡한 애가 나가서 아르바이트라도 하라”며 차가운 시선을 보내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무대에 오른 청년들은 ‘은둔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은둔으로 내몰린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실제로 은둔의 배경에는 학교·가정 폭력이나 경쟁 사회, 빈곤 등의 문제가 자리 잡고 있었다.
정 씨는 집안 사정으로 어린 시절부터 홀로 있을 때가 많았다. 자주 못 보는 아버지는 올 때마다 폭언을 해서 공포 분위기를 만들었다. 돌보는 이 없는 상황에서 게임 중독에 빠졌던 정 씨에게 중학교 1학년 때 우울증이 찾아왔다. 이듬해부터 등교를 거부하고 창문에 두꺼운 커튼을 친 채 방 안에 틀어박혔다. 정 씨는 “몇 년 동안 청소하지 않아 지저분한 방 안에서 컴퓨터 하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누워 있었다”면서 “부모님과도 문자로 의사소통을 했다”고 했다.
김 씨는 외환위기 때 큰 빚을 진 아버지의 가정 폭력으로 우울증을 앓다가 고교 2학년 무렵부터 은둔 생활을 시작했다고 했다. 씻는 것을 거부할 정도로 우울증이 심해져 일상생활이 불가능해졌다. 김 씨는 “극단적 선택을 시도하기도 했다”고 털어놨다.
송 씨는 넉넉지 않은 가정 형편에서 대학에 진학한 뒤 고생하는 부모님에 대한 죄책감에 심한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했다. 송 씨는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음식을 먹던 게 폭식으로 이어졌다. 원래 마른 체형이었는데 몸무게가 150kg까지 늘더라”며 “사람들이 나를 기피하고 혐오하는 걸 겪고 방에 틀어박히게 됐다”고 했다.
○ 주변의 손길에 마음의 문 열어
이들이 다시 세상 밖으로 나올 용기를 갖게 된 건 가족과 주변인들이 내민 따뜻한 손길 덕분이었다.
정 씨를 동굴 밖으로 꺼낸 것은 은둔 11년째 되던 해 입원했던 정신병원의 주치의였다. 주치의는 검정고시를 준비하던 정 씨를 위해 따로 시간을 내 과외를 해주는 등 정 씨를 아버지처럼 따스하게 대했다. 정 씨는 “주치의 선생님 덕에 마음의 문이 서서히 열리게 됐다”며 “하루는 밖에 나갔는데 다리 근육이 퇴화돼 걷지도 달리지도 못하는 걸 경험하고 충격을 받았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마음을 고쳐먹었다”고 했다.
송 씨의 아버지는 길어지는 자식의 은둔에도 포기하지 않았다. 자전거 타는 걸 좋아했던 송 씨에게 ‘한 번이라도 아들과 자전거를 같이 타는 게 소원’이라며 밖으로 끌어내려 노력했다. 사회복지사로 일하던 중학교 동창은 신장 기능이 떨어졌음에도 투석을 거부했던 송 씨에게 “제발 병원이라도 가보라”며 많은 돈을 쥐여줬다. 송 씨는 “그때 마음이 열렸다. 그 친구의 마음을 봐서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송 씨는 이후 산책을 하고 자전거를 타는 습관을 들이게 됐다. 자신감을 회복하면서 병 치료도 시작했다.
김 씨 역시 가족의 지지가 큰 도움이 됐다고 돌이켰다. 김 씨는 “언제나 내 편을 들어 준 여동생 덕분에 세상으로 나올 수 있었다”고 말했다.
울타리 밖으로 나오는 게 한순간에 되진 않았다. 이들은 “은둔 생활에는 ‘관성’이 있다”고 입을 모았다. 잠시 방심하면 다시 삶의 의욕을 잃고 동굴로 돌아가기 쉽다는 것이다. 정 씨는 “저는 은둔을 벗어난 지 4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극복 중인 상태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은둔이 길었던 이들에게 세상도 녹록지 않았다. 5년 동안 정신건강의학과 치료를 받고 우울증이 호전된 김 씨는 아르바이트를 구하려 이력서를 넣었지만 번번이 떨어졌다. 김 씨는 “사회생활에 공백이 있다 보니 ‘알바 할 나이는 아닌 것 같아요’라며 수상하게 보는 경우가 있더라”고 했다.
이들에겐 은둔형 외톨이 경험을 가진 이들이 교류하는 ‘은둔고수’ 프로그램이 적지 않은 도움이 됐다. 이 프로그램은 원래 은둔형 외톨이 청년들의 자립을 지원하는 일본 사회적 기업 ‘K2인터내셔널’ 한국 지부가 운영했다. 그러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으로 지난해 말 한국 지부가 문을 닫자 지부 직원 등이 사회적 기업 ‘안무서운회사’를 창업해 이어나가고 있다. 12일 공연을 주최한 것도 안무서운회사다.
‘다시 은둔 생활로 돌아갈까’ 하는 생각에 흔들리던 김 씨 역시 은둔고수 프로그램에 참여한 뒤 다시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 김 씨는 “전에는 나만 의지가 없어서 이렇게 산다고 생각했는데, 이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이 많다는 걸 깨닫게 됐고 은둔이 일종의 사회적 문제라는 것도 알게 됐다”고 했다.
○ “‘은둔 스펙’으로 도움 주고 싶어요”
최근까지 은둔고수 프로그램을 통해 세상 밖으로 나온 은둔형 외톨이들은 약 30명에 이른다. 안무서운회사는 은둔형 외톨이 생활을 딛고 일어난 청년들이 어려움을 겪는 이들을 도울 수 있도록 연결해 준다. 또 이들이 독립해 생활할 수 있는 셰어하우스 등도 운영하고 있다.
김 씨 역시 안무서운회사에서 사외이사로 재직하면서 은둔 청년 문제 공론화를 시도하고 은둔 청년 및 가족을 대상으로 강연도 하고 있다. 그는 “얼굴을 공개하고 내 얘기를 하는 게 처음에는 굉장히 꺼려졌다. 그런데 어느 날 회사로 찾아온 사람이 ‘인터뷰를 보면서 큰 도움을 받았다’고 하더라”며 “그때 큰 보람을 느꼈다”고 했다. 정 씨 역시 안무서운회사 매니저로 일하며 은둔 청년들을 돕기 위한 각종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송 씨는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다른 이들을 돕고자 사회복지사 자격증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 그는 “힘들던 시절 나에게 손을 내밀어줬던 친구와 내 병을 치료해준 사회에 늘 감사한 마음이 있었다”며 “은둔 경험을 바탕으로 체계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돕고 싶다”고 말했다.
청년들에게 마지막으로 아직 방 안에서 세상과의 교류를 거부하는 이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묻자 이 같은 답이 돌아왔다.
“못 나올 수 있어. 노력해도 쉽지 않아. 나오는 게 정말 대단하고 쉽지 않은 일이라는 걸 알아. 그러나 자책만은 하지 마. 책임은 세상에도 있는 거야.”(정 씨)
“네 잘못이 아니야. 지금 당장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할 수 있어, 정말이야.”(송 씨)
韓, 은둔형 외톨이 실태파악 못해… 서울-광주시만 지원
‘은둔형 외톨이’ 늘어나는데 지원은 태부족 다른 지역 거주자는 사각지대로… “관계맺기 교육 전문가 양성 필요” 日, 1990년대 은둔형 외톨이 주목… 지자체와 단계별 맞춤 정책 펴
한국보다 먼저 ‘히키코모리’(은둔형 외톨이)가 사회 문제로 대두된 일본은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함께 단계별 맞춤 지원 정책을 펴고 있다. 이에 비하면 한국은 관련 정책이 상대적으로 미비한 실정이라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일본은 1980년대부터 등교 거부가 사회 문제로 떠올랐고, 1990년대 들어 은둔형 외톨이 문제가 본격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정부 차원에선 2001년 후생노동성이 관련 가이드라인을 만들며 대응에 나섰다.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의 해외동향리포트 일본 편에 따르면 일본에는 지역 사회의 은둔형 외톨이를 조기에 발견하고 지속적으로 방문해 당사자와 가족에게 상담 등의 지원을 하는 ‘히키코모리 지역지원센터’가 전국 지자체 67곳에 설치돼 있다. 또 ‘지역청년 서포트 스테이션’을 설치해 15∼39세 ‘니트족’(구직단념자)을 대상으로 자립 상담 및 취업 훈련 등을 지원하고 있다. 최근에는 은둔형 외톨이 고령화 문제에 정책적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
반면 한국에선 은둔형 외톨이가 얼마나 되는지조차 제대로 파악되지 않은 상태다. 2020년 광주시가 전국 최초로 은둔 청년 실태조사를 실시했지만 아파트 거주 가구에 대해서만 서면 조사로 진행해 한계가 있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에 보건복지부는 2023년 은둔 청년 실태조사를 진행하며 규모 파악에 나선다는 방침을 세웠다.
지원 프로그램도 부족하다. 전국에서 관련 지원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지자체는 서울시와 광주시 정도에 불과하다. 서울시는 은둔 청년이 타인과 교류할 수 있도록 공동생활을 지원하고 전문가 심리상담, 미술치료 프로그램 등을 운영한다. 서울시에 따르면 이 프로그램에 참여한 청년은 지난해 70여 명에서 올해 531명으로 크게 늘었다. 광주시는 은둔형외톨이지원센터를 통해 개인 상담 및 생활습관 개선 프로그램 등을 진행하고 있다. 백희정 광주시 은둔형외톨이지원센터 사무국장은 “최근 다른 지역 거주자 5명이 프로그램 참여를 문의해 왔지만 지자체 프로그램이어서 돌려보내야 했다”며 “정부 차원에서 관련 프로그램을 운영한다면 거주지 관계없이 지원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일반적인 인식과 달리 은둔형 외톨이는 청년만의 문제가 아니다. 오상빈 광주동구청소년상담복지센터장은 “최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등의 여파로 은둔형 외톨이 문제가 전 연령대에 걸쳐 나타나고 있어 실태조사가 시급하다”면서 “관계 맺기 교육이 가능한 전문가 양성도 필요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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