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대공존의 길 찾는 기성세대
소멸위기 지방출신 은퇴자 대상… 최근 감세 통해 귀향 유도 운동
수도권 과밀해소-집값 안정 기대… 멘토로 경험 전수해 ‘일자리 윈윈’
자녀에 집 넘겨주고 전세살이도… “손주 위해 연금 3년 늦게” 설문에
“우리 사회의 여러 문제를 생각하다 보면, 부모님 세대가 빨리 돌아가시는 게 가장 좋은 해결책인 것 같아요.”
저녁 식사 중 20년 이상 어린 후배 입에서 나온 얘기가 귀에 꽂혔다. 명문대생들에게 부모의 적정 사망 연령을 묻자 ‘63세’가 가장 많았다는 우스개가 고령자들 커뮤니티에서 돌아다닌다는 얘기를 하던 중이었다. 그도 여느 청년들처럼 30세를 훌쩍 넘겼지만 결혼도 내 집 마련도 엄두가 나지 않는다고 했다. 저출산 고령화, 부동산 폭등, 연금과 건강보험의 재정 고갈 위기, 일자리 문제 등 한국 사회가 맞닥뜨린 고민들을 아무리 들여다봐도 답이 없고, 이런 결론에 도달하더란다. 이들에게 100세 시대가 논해지는 요즘 현실은 얼마나 숨이 막힐까. 알코올 기운에 나온 ‘아무 말 대잔치’ 중 하나였지만 계속 마음 한구석에 남았다.
한국에서 1차와 2차를 합한 베이비붐 세대는 1955년부터 1974년까지 매년 100만 명가량 태어났다. 이들은 고도 경제성장과 의학 발전 등에 힘입어 자산을 모았고 평균수명도 늘었다. 반면 이들의 2세들은 부모 세대보다 수가 적고, 경제의 성장동력이 줄어들면서 취업이나 투자 기회 등의 측면에서도 ‘부모 세대보다 가난한 첫 세대’가 될 것으로 점쳐진다. 연금과 고용 등 희소한 경제자원과 기회를 둘러싸고는 세대 갈등 조짐마저 엿보인다. 부모 세대와 자식 세대가 공존할 길은 없을까.
○은퇴 세대의 귀향으로 지방 소멸 막자
“향우회를 해보면 알아요. 잘나가는 사람들은 모두 서울에 진출해 살고 있죠. 이런 식으로 고향이 비어간다면 머잖아 대한민국은 공멸할 수밖에 없습니다.”(강보영 대한민국시도민회연합 이사장)
인구의 수도권 집중과 지방 소멸, 출산율 저하는 닭과 달걀의 관계다. 지난해 10월 행정안전부가 전국 89곳(기초단체)을 인구 감소 지역으로 지정한 가운데, 고향을 떠나 서울에 뿌리를 내린 재경 지방향우회들이 고향 살리기에 발 벗고 나섰다. 은퇴 세대의 귀향을 유도해 고향의 기사회생을 도모하겠다는 것.
이를 위해 2019년 재경 향우회들의 연합인 대한민국시도민회연합을 결성하고 지난해 말 ‘지방 소멸 위기대응을 위한 특별법안 초안’을 내놓았다. 법안에는 지방 소멸 위기 특별지역으로 이주하는 개인과 기업에 파격적인 특혜를 준다는 내용이 담겼다. 예컨대 특별지역에 전입하는 주민에게는 양도소득세 취득세 상속·증여세 감면 혜택을, 기업에는 법인세 취득세 감면과 기업 상속 요건 완화 혜택을 주도록 했다. 건강보험료나 관내 문화 관광시설 입장료 인하 등 풍요로운 문화생활을 위한 지원책, 노년 지방살이에 가장 큰 걸림돌인 의료 문제 해결을 위해 지역 의료 인프라에 대한 폭넓은 지원책도 담겼다. 강 이사장은 “관건은 실효성”이라며 지방에 이사 갈 결심을 할 정도가 되려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정도로 혜택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마강래 중앙대 교수(도시계획부동산학)도 저서 ‘베이비부머가 떠나야 모두가 산다’에서 지방을 살릴 주역으로 은퇴를 맞는 베이비부머에 주목했다. 마 교수에 따르면 1차와 2차 베이비붐 세대 약 1680만 명 중 절반이 수도권에 거주하고 그중 절반인 약 440만 명이 지방 출신이다. 다양한 조사에서는 이들이 적게는 30%, 많게는 50∼60%가 귀향 의사를 밝히고 있다고 한다. 이들 중 10%(44만 명)만 귀향해도 수도권 과밀을 해소하고 부동산 가격을 안정시키는 동시에 지방 쇠퇴를 막고 국토균형발전에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베이비부머에게도 귀향은 새로운 기회일 수 있다. 지방에는 중노년층이 인생 2막을 시도할 일거리가 상대적으로 많고 조금 덜 벌더라도 생활비를 아낄 수 있다. 익숙한 지역이라면 옛 친구나 동료들과 더불어 여가를 즐기고 지역사회에 기여하며 살던 곳에서 늙어가는 ‘에이징 인 플레이스’도 가능하다.
○부모-청년 세대, ‘윈윈’하는 일자리와 부의 이전
한쪽에서 청년 취업을 걱정하면 다른 한쪽에서는 중노년 취업과 노인 빈곤을 거론한다. 일자리는 세대 간 ‘제로섬 게임’일 수밖에 없는가.
경제학자인 정영록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한국의 청년 세대와 베이비붐 세대를 가장 큰 전략자산으로 꼽고 이들의 힘을 결합시키는 다양한 아이디어를 내놓고 있다. 그는 최근 저서 ‘핏팅(fitting) 코리아’ 등을 통해 “세계적으로도 진귀한 경험과 노하우를 가진 베이비부머들을 소환해 이들이 ‘조연’급 사회적 기여와 역할을 하되 주연인 청년들을 돕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국의 베이비부머들은 경제력과 사회에 대한 공적 책임감을 갖고 있습니다. 희생과 양보로 청년 세대를 돕는다면 한국 역사상 최초의 성숙한 어른 세대가 될 수 있어요.”
구체적으로는 대기업이나 기술인력 출신 베이비붐 세대가 중견·중소기업과 스타트업에 기술 멘토나 상담역으로 재취업해 기업의 경쟁력 강화에 도움을 주고, 청년들은 ‘공공서비스 의무제’를 통해 직장 경험을 쌓으며 노하우를 전수받는 방식을 제안했다. 또 그는 베이비부머들이 가칭 ‘세대 승계 기금’을 만들어 후계 세대가 쓸 재원을 확보해주는 한편 자녀에게 집을 넘겨주고 일부를 전세로 사는 ‘자가(自家)전세’ 등 부의 이전 방법도 적극 고민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그는 2년여 전 아들에게 서울의 집을 증여하고 자신이 부분전세로 들어갔다. 은퇴를 앞두고 노후의 터전은 전남 구례에 마련했다. 은퇴하면 굳이 서울에서 살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다.
○“아이들을 위해서라면” 고령자가 먼저 양보
연금과 건강보험에서도 세대 간 이해관계는 대립 양상을 보인다. 고령인구가 많은 나라에서 민주주의 제도는 젊은이들에게 불리하게 작동된다. 고령자들의 표의 힘이 크기 때문이다. 웬만한 정치인들이 노인 관련 법안에 손대지 못하는 이유다. 고령자가 먼저 나서 청년 세대의 어려운 상황을 이해하고 조금은 손해 보거나 희생하는 길을 자처한다면 어떨까.
노년의 삶과 자세에 대한 저작을 많이 내고 있는 일본의 작가 이쓰키 히로유키(五木寬之·91)는 85세에 낸 저서 ‘혐로(嫌老)사회를 넘어서’에서 “유럽에서 보이는 난민이나 이민에 대한 증오가 일본에서는 노인 혐오가 될 가능성이 있다”며 노인들 스스로 현명해질 것을 주문했다. 그의 경우 한때 스포츠카 마니아였지만 65세에 면허증을 반납했고 의료보험이나 사회복지도 경제적 여유가 있다면 이용하지 말아야 한다며 스스로 실천에 옮기고 있다. 이기심을 버리고 가진 것을 나눈다는 자세가 본인도 세상도 편하게 한다는 것.
올 9월 동아일보 취재팀 조사에서 “연금을 3년 늦게 받자” “보험료 10만 원 더 내자”는 제안에 반대가 압도적으로 많았으나 각기 ‘손주들도 연금 받게’ ‘아이, 청년들을 위해’라는 문구를 붙이자 고령층 과반이, 청년층 절반 이상이 찬성한 것으로 나타났다.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인간의 마음에는 ‘나만 손해 볼 수 없다’는 각박함도 있지만 뿌리 깊은 공동체 의식도 있다. 한 발짝만 떨어져서 보면 남을 위하는 게 곧 자신을 위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최근 화두가 되고 있는 고령자 지하철 무임승차 논란도 한 번쯤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1984년 65세 이상 고령자 무료 정책이 도입될 때 고령인구는 4%에 불과했다. 하지만 베이비부머들이 순차적으로 고령자가 되면서 고령인구 비율은 2025년 20%, 나아가 2045년이면 37%를 넘기게 된다. 이런 제도가 지속가능할 수는 없다. 해외에서도 고령자들의 외출은 건강에 도움이 되므로 적극 권장하지만, 대중교통 요금은 할인제나 쿠폰제 등을 통해 제한을 두고 있다. 베이비부머 사이에서 스스로 무료 승차를 양보하자는 주장이 나온다면 바뀔 수 있다. 기성세대와 미래세대의 공존을 위해 각자 선 자리에서 그 나름의 모색들이 이뤄지는 가운데 2022년이 저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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