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영등포구 고시원에서 혼자 사는 정성욱 씨(56)는 최근 매일 아침 지하철 1호선 영등포역으로 나간다고 했다. 정 씨는 5일에도 오후 1시경 영등포역에 출근도장을 찍은 후 지인 김모 씨(58)와 만나 저녁까지 담소를 나눴다. 저녁은 자판기 커피 2잔으로 때우고 오후 11시가 지나서야 집으로 향했다. 이날 영등포역에서 동아일보 기자와 만난 정 씨는 “지난해까지만 해도 전기장판을 틀고 집에서 버텼는데 전기요금이 너무 올라 장판마저 틀 수 없게 됐다. 커피 값도 비싸져서 결국 지하철역밖에 갈 곳이 없더라”고 했다.
●한파에 갈 곳 잃은 취약계층
최근 한파에 고물가와 난방비 인상까지 겹치면서 추위를 피해 지하철역으로 모이는 취약계층들이 적지 않다. 지하철역이 ‘한파 피난객’을 위한 피난처가 되고 있는 것이다.
이날 영등포역에는 오전 9시부터 롱패딩과 모자를 입은 이들이 하나 둘 모이기 시작했다. 일부는 벤치 위에 앉았고, 몇몇은 익숙한 이들과 대화를 나눴다. 일부는 쓰레기통에 버려진 음식이 없는지 살펴보기도 했다.
매일 오전 6시부터 영등포역을 찾는다는 윤모 씨(72)는 “난방비를 최대한 아끼려고 잠만 단칸방 집에서 잔다”며 “역 근처에서 매일 무료 급식도 주고 난방도 잘 되는데다 따뜻한 물도 나와 집보다 오히려 편하다”라고 했다. 한파를 피해 나온 이들은 오후 9시 이후가 되자 하나둘 인근 거주지로 돌아갔다.
서울 종로구 종각역과 종로3가역 내 환승통로를 찾는 이들도 적지 않다. 평소 창신동이나 탑골공원을 주로 찾던 고령층이 추위를 피해 지하로 내려오면서 모이는 사람들이 늘었다고 한다. 특히 무료 급식이 나오는 매주 월요일에는 경기도에서 지하철을 타고 오는 고령층이 적지 않다. 경기 의정부시에서 매주 월요일마다 종각역을 찾는다는 김순옥 씨(70)는 “물가가 오르다보니 비슷한 또래가 모이는 모임에 나가려고 해도 낼 돈이 없다. 최대한 아껴기 위해 지하철을 무료로 타고 여기까지 온다”고 했다.
●직장 잃은 중장년도 지하철역으로
지하철역에 모이는 이들 중에는 고령층 외에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 19) 확산 등으로 직장을 잃은 중장년층도 적지 않았다.
공사 현장을 전전하다 일자리를 잃은 이모 씨(47)는 3개월 째 매일 영등포역 벤치에 앉아 시간을 보낸다고 했다. 동아일보 기자와 만난 이 씨는 “홀어머니와 둘이 사는데 직장도 없고 겨울철 난방비 부담도 크다 보니 집에 남아있기 죄송해 역에 나온다”며 “비슷한 처지인 사람들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어느 정도 마음이 풀린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전세계적인 에너지 위기로 연료비가 오른 만큼 취약계층을 대상으로 한 지원을 확대하는 동시에 추위를 피해 갈 곳을 마련해 줘야 한다고 지적한다. 김용득 성공회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빈곤계층을 지하철역에 방치하지 말고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에너지 바우처 지원 등을 통해 난방비 부담을 덜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고 말했다. 정순둘 이화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추위를 피하면서 필요한 복지 지원을 안내할 수 있도록 지역사회복지관의 역할을 확대하는 등 제도적 개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소설희 기자 facthee@donga.com 이승우 기자 suwoong2@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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