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24년 전 발생한 ‘제주 변호사 피살사건’ 공범으로 지목된 조직폭력배 출신 50대 남성이 법원의 판단을 다시 받게 됐다. 원심은 살인 혐의를 유죄로 인정했지만 대법원은 “증명이 부족하다”며 무죄 취지로 사건을 파기환송했다.
대법원 2부(주심 천대엽 대법관)는 12일 오전 살인, 협박 혐의로 기소된 김모씨의 상고심 선고기일을 열고 징역 12년을 선고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광주고법으로 돌려보냈다.
1999년 11월5일 제주의 한 도롯가에 세워진 차량에서 검사 출신 변호사 이모씨(당시 44세)가 흉기에 찔려 사망한 채 발견됐다.
당시 경찰은 광범위한 수사를 했지만 단서를 찾아내지 못했다. 이 사건은 살인죄 공소시효 연장에 관한 논의가 있을 때마다 ‘대구 어린이 황산테러 사건’ 등과 함께 대표적인 미제사건으로 언급돼 왔다.
그러던 지난 2019년 8월 제주 폭력범죄단체 ‘유탁파’ 행동대장급 조직원이었던 김씨는 SBS ‘그것이 알고싶다’에 “자신이 이씨 사망과 관련돼 있다”는 취지의 제보를 했다.
김씨는 취재진과 인터뷰에서 “이씨를 혼내주라는 지시를 받아 친구 손모씨와 준비했고 상해만 가하려 했는데 손씨가 혼자 일을 벌이다 잘못돼서 이씨가 사망했다”며 “손씨는 괴로워하다가 2014년 8월쯤 극단선택을 했다”고 말했다.
해당 내용은 2020년 6월 전파를 탔고 방송 이후 전면 재수사가 이뤄졌다. 김씨는 이듬해 6월 캄보디아에서 국내로 강제송환됐다. 김씨는 “공소시효가 끝난 줄 알고 인터뷰에 응했다”며 “인터뷰로 피해자 사망 경위 등을 밝히면 유족에게 사례비를 받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고 말했다.
공소사실에 따르면 김씨는 1999년 8~9월 누군가로부터 현금 3000만원과 함께 ‘골치 아픈 일이 있어 이씨를 손 좀 봐 달라’는 지시를 받았다. 이후 김씨는 2~3개월간 동갑내기 조직원 손씨와 함께 범행을 공모했고 손씨는 그해 11월5일 새벽 미리 준비한 흉기로 이씨의 복부와 가슴을 세 차례 찔러 이씨를 살해했다.
1심은 심리 끝에 검찰 공소사실이 범죄의 증명이 없는 경우에 해당한다며 김씨의 손을 들어줬다. 김씨의 주요 진술 내용은 신빙성이 인정되지만 살인의 고의를 인정하기엔 부족하다고 봤다. SBS 취재진을 협박한 혐의만 유죄로 판단하고 징역 1년6월의 실형을 선고했다.
검찰과 김씨의 항소로 열린 2심에서는 살인 혐의가 유죄로 바뀌었다. 재판부는 원심을 파기하고 김씨에게 징역 12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범행 현장 상황, 피해자가 입은 상처 부위·내용·정도, 부검감정 의견 등을 종합하면 손씨의 살인 고의를 충분히 인정할 수 있다고 봤다. 여기에 김씨의 주요 진술 내용과 그 신빙성, 손씨의 실행행위 내용 등을 종합하면 김씨에게 적어도 살인의 미필적 고의가 있다고 봤다.
재판부는 “김씨가 범행을 모의·실행하는 과정에서 적어도 손씨의 행위로 이씨가 사망할 수도 있다는 점에 대한 미필적 인식이나 예견을 하고 이를 용인하며 기능적 행위지배로 실행행위를 분담했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대법원은 ‘살인 유죄’ 판단을 다시 뒤집고 무죄 취지로 사건을 하급심으로 돌려보냈다. 협박 혐의로 선고된 징역 1년6월의 형은 확정했다.
대법원은 “김씨 진술 중 범행을 지시한 사람과 관련한 내용, 손씨 도피에 관한 내용 등은 객관적 사실과 배치돼 신빙성을 갖췄다고 볼 수 없다”며 “객관적 증거나 구체적 정황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김씨가 범행에 쓰인 흉기 특징을 구체적으로 진술한 점은 “언론 보도로 알게 된 내용을 말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봤다. 또 김씨가 이씨를 미행하면서 알게 된 정보를 공개한 점은 “사실과 다르다”고 일축했다. 김씨가 사건현장을 자세히 묘사한 것도 “자신이 어릴 적 살던 곳 부근이라 원래 알던 정보를 얘기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만일 항소심 판단처럼 김씨 주요 진술의 신빙성을 인정하더라도 정황증거만을 종합해 손씨와 김씨의 살인 고의와 공모 사실을 인정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대법원은 “김씨 제보 진술의 취지는 ‘상해를 공모했는데 일이 잘못돼 피해자가 숨졌다’는 것으로 이미 살인의 고의가 없었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손씨에게 살인의 확정적 고의가 있었다면 뒤에서 목에 칼을 들이대는 순간 목 부위를 찔러 살해하기가 더 쉬운 방법일 텐데도, 굳이 피해자를 돌려세운 후 복부와 가슴을 공격했다는 것은 쉽게 이해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대법원은 “손씨에게 살인의 미필적 고의를 인정할 여지는 있지만, 미필적 고의는 싸움 과정에서 생긴 인식과 용인으로 이뤄진 것”이라며 “특히 현장에 있지 않았던 김씨에게까지 함부로 살인의 고의와 공모 사실을 인정할 수는 없다”고 판시했다.
대법원 관계자는 “무죄추정의 원칙을 강조했다는데 의의가 있다”며 “간접증거만으로 살인 고의와 공동정범을 인정하기 위한 기준을 제시해 유사한 사안을 심리하는 하급심에 지침을 주는 사례가 됐다”고 판결 의미를 설명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