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수도권의 한 국제학교가 최근 대화형 인공지능(AI) 서비스 프로그램 ‘챗GPT’를 이용해 영문 에세이를 작성한 후 제출한 학생들을 전원 0점 처리한 것으로 확인됐다. 국내 교육기관에서 챗GPT 부정행위가 확인된 건 처음이다.
8일 동아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A국제학교는 재학생 7명이 지난달 말 영문 에세이 과제를 작성하면서 챗GPT를 사용한 사실을 적발했다. 학교 측은 과제에 AI 프로그램이 활용됐는지 확인하는 교사용 프로그램을 사용해 챗GPT 사용 사실을 알게 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학교 측은 “챗GPT 사용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GPT제로(Zero)’ 프로그램으로 에세이 과제를 점검하겠다”고 공지했다. GPT제로는 미 프린스턴대 재학생이 개발한 챗GPT 활용 적발용 애플리케이션(앱)이다.
이 학교의 한 교사는 “지난달부터 챗GPT를 활용해 영문 에세이 과제를 하는 학생이 늘었다”고 말했다. 이 학교 재학생 B 군은 “구글보다 빠르게 과제를 할 수 있기 때문에 많은 학생들이 최근 챗GPT 사용을 시작했다”며 “문장이나 단어 몇 개를 바꾸면 아직 적발이 안 되고 있어 여전히 사용하는 학생도 적지 않다”고 했다. A학교 측은 “과제 대필이나 표절 문제는 AI 활용 논란이 불거지기 전부터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며 “표절 검사 프로그램을 사용해 학생들의 과제에 정당한 점수를 줄 수 있도록 노력할 계획”이란 입장을 밝혔다. 학교 측은 이번 사안과 관련해 추가 징계는 내리지 않기로 했다.
이미 미국에선 과제 시 챗GPT를 활용하는 학생들이 늘면서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다. 영문 과제가 많은 국내 대학의 경우 봄 학기가 시작되면 유사한 일이 생길 것으로 예상돼 국내 교육계도 대책 마련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챗GPT로 못풀 시험문제만 낼것”… 국내서도 AI 대필 비상
챗GPT 대필 0점 처리… AI로 쓰기 쉬운 에세이 과제 변경 “대필 한번만 걸려도 낙제” 지침도 대학선 “검증 프로그램 쓸지 고민중” 전문가들 “AI 활용교육 병행해야”
대필 사례가 국내에서도 현실화되자 신학기를 앞두고 국내 교육기관 상당수에서 챗GPT 악용을 막기 위해 비상이 걸렸다. 특히 한국어는 아직 미흡하지만 영어는 전문가 이상의 작문 실력을 보여준다는 점 때문에 주로 국제학교와 대학 영어 수업 등에서 ‘챗GPT 대필’을 막기 위해 고심하는 모습이다.
●‘챗GPT 비상’ 걸린 교육계
서울의 한 국제학교는 지난달 교사 전체 회의에서 최근 늘고 있는 학생들의 챗GPT 활용에 어떻게 대응할지 논의했다. 회의 후 교사들은 챗GPT를 사용해 쉽게 작성할 수 있는 서술형 에세이 과제를 없애고 다른 형태의 과제로 바꾸는 등 과제 형태를 다양화했다.
부정 사례가 적발될 경우 제재 수위를 높이는 방안도 검토되고 있다. 제주의 한 국제학교는 교사용 표절 검사 프로그램을 활용해 챗GPT로 작성한 과제가 한 차례라도 적발될 경우 해당 학생을 낙제 처리하겠다는 방침을 정했다. 다른 제주 국제학교도 교사들이 챗GPT 대응 지침을 만들기로 했다. 이 학교 관계자는 “챗GPT가 학생들 사이에서 어느 정도 파장을 불러일으킬지 좀 더 살펴본 후 교사용 대응 가이드라인을 만들 것”이라고 했다.
영문 과제 및 시험이 빈번한 대학가에서도 3월 신학기 시작 전 대응책 수립에 분주한 모습이다. 이경전 경희대 경영학·빅데이터응용학과 교수는 “새 학기 중간고사 문제를 낼 때 챗GPT로 먼저 돌려보고 챗GPT가 풀 수 없는 문제만 시험에 낼 것”이라고 밝혔다. 권석준 성균관대 화학공학과 교수는 “챗GPT가 답변한 내용을 그대로 복사해서 붙이면 부정행위로 간주하겠다”는 공지를 새 학기 강의계획서에 추가했다.
챗GPT 표절을 확인하는 프로그램이나 앱을 활용하겠다는 경우도 적지 않다. 최근 미국 주요 대학들도 챗GPT를 이용한 표절을 적발하기 위해 ‘GPT제로’ 등을 활용하고 있다. 챗GPT를 개발한 오픈AI도 최근 챗GPT가 작성한 글인지 아닌지 판별하는 도구를 공개했다. 다만 아직까지 정확도가 높지 않고, 일부만 바꾼 경우 적발하기 쉽지 않다는 점이 한계로 꼽힌다. 또 2021년 자료까지만 학습한 챗GPT 외에 실시간 업데이트가 가능한 구글 ‘바드(Bard)’ 등 새 AI 출시가 이어질 전망이어서 어렵게 마련한 대응책의 실효성이 얼마나 갈지도 의문이다.
●“무조건 막기보다 활용법 가르쳐야”
전문가들은 AI 기술을 사용하지 못하게 막기만 하는 데는 한계가 있을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적절하게 활용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게 중요하다는 취지다. 정제영 이화여대 교육학과 교수는 “인터넷이 처음 도입됐을 때와 마찬가지로 시대의 흐름은 막을 수 없을 것”이라며 “표절에 대한 윤리 교육을 강화하고 출처를 명기하도록 하는 저작권 교육을 병행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양정호 성균관대 교육학과 교수도 “AI 사용을 무조건 제재할 게 아니라 AI를 어떻게 활용할지 가르치는 게 더 중요하다”며 “발전된 기술을 공공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쓸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게 중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
AI 활용 능력 자체를 평가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도 나온다. 이경전 교수는 “AI는 잘 사용하면 득이 된다”며 “AI를 활용해 고차원의 답변을 도출할 수 있는 능력도 높이 평가하고 더 나은 결과물을 도출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향후 교육 과정 개편에 이 같은 변화를 고려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왔다. 홍후조 고려대 교육학과 교수는 “AI 활용이 빈번해지면 초등학교 3학년과 중학교 3학년의 답변 수준이 같아지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며 “교육 과정이나 과제 제출 등을 어떻게 조정해야 할지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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