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공계 ‘블랙홀’된 의대] 〈상〉 성적 최상위권 흡수하는 의대
“의사만큼 못벌것”… 4대 과기원-포스텍 5년간 1105명 그만둬
너도나도 의대로… 의대생 43%가 재수-3수 이상 또는 편입
“10년 이상 공부해서 이공계 박사 학위를 따더라도 의사만큼 연봉과 대우를 받을 수 있을까…. 불안감이 커지면서 다시 의대 공부를 하게 됐습니다.”
KAIST에 입학했다가 1년 만에 그만두고 2021년 서울 소재 의대로 진학한 이희원(가명·23) 씨. ‘이공계 꿈나무’로 통했던 이 씨는 재수를 해서 의대로 ‘유턴’했다. 그는 “전자공학이 적성에 잘 맞고 성적도 좋았다”며 “그럼에도 미래에 대한 불안이 컸고, 아버지마저 ‘재수해서 의대에 가라’고 하셨다”고 했다. 이공계에서 두각을 나타내려면 학부 졸업 후 석·박사, 박사후연구원까지 10년 이상을 투자해야 한다. 전문의가 되는 기간(10∼14년)과 큰 차이가 없지만 보상은 크게 낮다고 이 씨는 판단했다.
의사가 우리 사회에서 ‘안정적인 성공의 보증수표’로 인식되면서 의대는 이 씨와 같은 이공계 인재들까지 블랙홀처럼 빨아들이고 있다. 종로학원 등에 따르면 KAIST를 포함한 4대 과학기술원과 포스텍을 다니다 그만둔 인원은 5년간 1105명에 달한다. 이들 중 상당수가 의대에 진학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전국 영재고·과학고 입시 응시 인원, 4대 과학기술원과 포스텍 등록을 취소하는 인원,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에서 반수나 재수하는 인원을 합쳐 보면 한 해 전국 의대 입학 정원(3058명)과 대략 비슷하다는 게 입시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과학 인재를 길러내기 위해 국가가 학비를 지원하는 과학기술원과 영재·과학고 이공계 인재들까지 의대를 선택하고 있는 셈이다.
동아일보가 이달 6, 7일 전국 14개 대학 의대생 246명을 설문조사한 결과도 이와 일치했다. 재수 이상과 편입 비율은 43.3%(109명)에 달했다. 영재·과학고(31명)와 자율형사립고(44명) 등 특목고와 자사고 출신이 30.5%를 차지했다. 한 의대생은 “18년째 의대 정원이 동결되면서 의사는 안정적이면서도 높은 소득이 보장되는 직업”이라고 말했다.
고교 성적이 최상위권인 이공계 학생들이 의대로 집결하는 현상이 심화되면서 사회 전체의 인재 배분도 쏠림이 심각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김정호 KAIST 전기 및 전자공학부 교수는 “우수한 학생들이 의대로 몰리면서 진로 선택의 다양성이 사라지고 있다”고 평가했다.
나로호 박사 9600만원 vs 개원의 3억… 연봉격차로 우수학생 쏠림
서울 상위大 학생들 “의대 갈것” 자퇴 반도체과 최초합격 전원 등록 포기도 의대생 48% “높은 소득 보장돼 선택” 미래산업 키울 인재수급 불균형 커져
“4차 산업혁명 시대에 과학기술이 발전해야 하는데, 똑똑한 아이들이 죄다 의대에 가면 산업이 골고루 발전할 수가 없습니다.”
이공대 교수들의 하소연이다. 의대는 통상적으로 6년 과정을 졸업하고, 국가시험에 응시해 의사 면허증을 취득하면 일정 수준 이상의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보상이 따라온다. 고교 성적이 최상위권인 우수 학생들이 평생 직업으로 높은 소득이 보장되는 의대로만 몰려가자 과학기술 및 첨단산업 발전을 책임질 인력풀이 마르고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 최우수 학생 흡수하는 의대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등 서울 상위권 대학에서도 학교를 중간에 그만두는 학생은 2019년 2901명에서 2021년 4388명으로 51.2% 급증했다. 2021년 기준으로 이들 중 이과 비율이 75.8%에 달해 상당수가 의대 진학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반도체 관련 학과도 ‘의대 쏠림’의 여파를 피해 가지는 못했다. 삼성전자 계약학과인 연세대 시스템반도체공학과는 올해 정시에서 사상 최초로 합격자 전원이 등록을 포기했다. 임성호 종로학원 대표는 “삼성전자와 연계된 학과마저 의대 이탈을 못 막는다”고 밝혔다. 2030년까지 반도체, 배터리, 미래차, 디스플레이 등 4대 핵심 산업에서 약 7만7000명의 추가 인력이 필요하지만 이들 산업에 골고루 진출해야 할 인재들이 의대를 선택하는 셈이다.
의대 열풍은 사교육비 지출에서도 드러난다. 본보 설문조사 결과 의대생의 경우 고교 재학 기간 월평균 100만 원 이상의 사교육비를 지출한 비율은 44.3%(109명)에 달했다. 14.6%(36명)는 한 달에 사교육비로 200만 원 이상을 지출했다. 2021년 고교생 1인당 월평균 사교육비(41만9000원)의 2배 이상이다. 중2 자녀를 키우는 한 학부모(서울 서초구)는 “초등학교 때 중학교 과정을 전부 배우고, 영재고나 과학고를 거쳐 의대에 진학하는 코스가 ‘정석’인데 사교육 없이는 힘들다”고 말했다.
● 개원의 3억 원 vs ‘나로호’ 연구원 9600만 원
본보 설문조사를 보면 ‘의대 진학을 결심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이유’를 묻는 질문에 응답자의 48.4%(119명)가 ‘높은 소득 수준’을 선택했다. ‘입시 성적에 맞춰서’(42.6%), ‘아프고 어려운 사람을 돕고 싶어서’(37.0%), ‘높은 사회적 지위’(27.2%)가 그 뒤를 이었다.
보건복지부의 보건의료인력 실태조사에 따르면 2020년 기준 의사의 평균 연봉은 2억3070만 원이다. 개원의로 좁히면 2억9428만 원에 달한다. 반면 한국 최초 우주발사체 ‘나로호’를 쏘아 올린 한국항공우주연구원의 정규직 연구원 1인당 평균 보수는 9595만9000원(2021년·공공기관 경영정보 공개시스템 공시)에 불과하다. 박사급 연구원 초봉은 5000만 원대다. 의사와 공공기관 연구원은 안정성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지만 소득은 2배 넘게 차이가 난다.
하지만 임상 의사로 활동하기까지 걸리는 기간과 박사 자격을 취득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비슷하다. 본격적으로 소득이 발생하는 전문의가 되기까지 대학 입학부터 10∼14년이 걸린다. 이공계 박사 자격은 대학 입학부터 10여 년이 소요된다. 서울 소재 의대에 재학 중인 배모 씨(29)는 2018년 KAIST 수학과를 졸업한 뒤 의대에 편입했다. 수학과 교수를 꿈꿨던 배 씨의 KAIST 졸업 학점은 4.3점 만점에 4.0점이었다. 배 씨는 “학부 때부터 공부를 잘하고, 유학을 다녀와 연구 실적을 쌓아야만 교수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엘리트 코스를 달려도 교수가 된다는 보장이 없다”고 말했다.
● 불확실성의 시대, 안정 찾아 의대로
높아진 의대 선호도는 경제 성장이 둔화되는 한편,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커졌기 때문이라고 전문가들은 분석했다. 1997년 외환위기, 2008년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내 삶은 누구도 책임지지 않고 내가 챙기는 것’이라는 인식이 강해지면서 전문직 자격증 선호도가 올라갔다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의사는 사회적 지위, 경제적 소득, 인지도 등 여러 측면에서 가장 평균이 높은 직업으로 꼽힌다. 의사 부모는 물론이고 이공계 박사 부모마저 의대 진학을 권하는 이유다.
김중백 경희대 사회학과 교수는 “한국 사회가 미래 지향적, 도전 지향적인 분위기가 아니다 보니 학생들이 미래에 대한 불안을 상쇄하는 선택을 하게 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동아일보 설문조사에서도 의대생들은 대다수가 미래의 모습으로 개원의(46.7%)와 교수(41.1%)를 선택했다.
의사과학자(4.1%)나 스타트업(6.5%) 등 사회 전체의 부를 창출할 수 있으나 실패 가능성이 높은 분야에는 진출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의학계 내부에서도 의대로의 인재 쏠림이 심각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 지방 의대 관계자는 “이공계의 우수한 인재들이 경쟁해 어렵게 의대에 들어오지만 정작 꼭 필요한 필수의료는 공백이 생기고 있다”며 우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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