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걸음 옆 대피공간…현은경 간호사는
차마 환자를 두고 떠나지 못했다
“환자 짜증 다 받아주는 나이팅게일”
지난해 8월 5일 경기 이천 관고동의 4층짜리 상가빌딩에 불이나 5명이 목숨을 잃었다. 숨진이들은 거동이 불편한 4명의 투석환자와 1명의 간호사였다.
“간호사는 충분히 탈출할 수 있었음에도 환자 때문에 병실에 남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관할 소방서장의 브리핑에 모두가 숙연해졌다.
고(故) 현은경 간호사(향년 50·여). 이천소방서 대원들은 그 이름을 잊지 못한다. 그날 연기 속에 쓰러져 있던 현 간호사를 가장 처음 발견한 건 김재무 구조대장(소방경·현 소방사법팀장)과 동료들이었다. 동아닷컴은 이천소방서와 대한간호협회의 도움을 받아 그날의 상황을 재구성 해봤다.
4층 창문 절박한 손…연기 뚫고 진입
그날 오전 10시 17분경 이천 관고동 학산빌딩 3층 스크린골프연습장에서 불이 났다는 신고가 소방에 접수됐다. 불이 난 건물은 중앙 계단을 기준으로 우측과 좌측으로 나뉘는데, 연기는 발화 지점인 우측에 집중됐다.
소방대원들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 3층과 4층에서 연기가 분출되고 있었고, 4층 좌측 창문에서는 사람들이 절박하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4층은 신장투석전문 병원으로, 불이 나기 전 환자 30여 명이 치료를 받거나 대기 중이었다.
관고동 119안전센터 이장열 센터장(소방경)을 포함해 화재진압대 4명이 가장 먼저 건물 안으로 들어가 3층에서 진압을 시작했다. 곧바로 김 대장의 구조팀이 4층으로 진입해 인명 검색을 시작했다.
“대피로 아닌 침대 아래 쓰러져”
구조대는 2개 조로 나눠 1개 조는 사람들이 소리치던 좌측으로 진입, 창문을 깨고 요구조자들을 구출해 냈다. 다른 1개 조는 연기로 가득한 우측으로 진입했다. 그곳이 바로 환자들이 많이 누워있던 ‘투석실’이었다. “오른쪽은 검은 연기가 가득찬 상태로 한치 앞을 볼 수가 없었다.” 김 대장은 당시를 이렇게 떠올렸다.
대원들은 입구에서부터 낮은 자세로 감각에 의해 앞으로 나아가며 사람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투석 환자 침대 아래 쓰러져 있는 1명을 발견했다. 바로 현 간호사였다. 급히 병원으로 이송했지만 그는 깨어나지 못했다.
좌측 공간은 다행히 방화벽에 막혀 연기가 유입되지 않았고, 환자와 의료진 등 생존자 30여 명이 이곳으로 대피해 있었다. 현 간호사 발견 장소부터 이곳까지 거리는 10m 남짓. 정상인이라면 몇 걸음만 뛰어도 무리 없이 대피 가능한 상황이었다. 그에겐 탈출할 수 있는 시간이 충분했다.
김 대장은 “현 간호사가 발견된 곳은 뭔가에 걸려 넘어질 만한 곳도 아니었고, 출입문 부근도 아니었다. 대피 하다가 쓰러진 모습이 아니었다. 위치로 봤을 때 환자를 대피시키느라 이리저리 뛰어다니다가 연기를 흡입해 그곳에 쓰러졌으리라고 본다”고 설명했다.
차마 환자 두고 나가지 못했다
투석은 혈액을 체외로 꺼내 노폐물을 제거하고 다시 체내로 돌려보내는 작업이다. 환자와 투석 장비가 굵은 바늘과 줄로 연결돼 있어 위급상황이 벌어져도 출혈 위험 등으로 즉각적인 행동을 하기 어렵다. 실제로 투석실 바닥 여기저기에는 피가 쏟아진 흔적이 있었다고 김 대장은 말했다.
게다가 환자들은 대부분 고령에 체력이 약하고 합병증을 갖고 있어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대피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다른 환자들이 의료진들의 도움을 받아 대피하는 동안 현 간호사는 아직 피신하지 못한 환자들을 한명이라도 더 구하느라 끝까지 남은 것으로 보인다고 김 대장은 설명했다. 숨진 4명의 환자는 60~80대 고령이었다.
한 대피 환자(67)는 “연기가 치료실 안까지 무섭게 차올랐다”며 “환자 대부분이 고령에 거동도 불편해 대피하는 데 시간이 더 걸렸다”고 증언했다.
김 대장은 “일주일에 2~3번씩 투석하러 와서 몇 시간씩 머무르다가 가는 병원 특성상 간호사님과 환자들의 관계는 일반 병원과 많이 달랐을 것이다. 현 간호사님은 그런 환자들을 두고 차마 혼자서 나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분명히 그랬을 것이다”라며 안타까워했다.
연기가 올라오는 와중에 마지막 순간까지 환자를 돌보는 현 간호사의 모습은 병원 4층 내부 폐쇄회로(CC)TV에도 남아 있다고 한다.
딸에게도 간호학과 권유할 만큼 자부심
현 간호사는 25년 넘게 환자를 돌본 베테랑이었다. 그는 1972년 춘천에서 농사를 짓는 가정의 1녀 2남 중 장녀로 태어났다. 춘천간호대(현 한림성심대 간호학과)를 졸업하고 1994년부터 홍천현대아산병원 정형외과 병동에서 근무했다. 이곳 투석전문 병원에는 2006년에 입사해 숨지기까지 15년간 근무했다.
대한간호협회 측은 “고인은 평소 투석으로 지쳐 예민한 환자들이 소리를 지르고 물건을 집어 던져도 환자의 마음을 잘 이해하고 위로해 주는 진정한 나이팅게일이었다. 동료·후배 간호사들도 이구동성으로 고인을 롤 모델로 생각할 정도로 투철한 직업관과 동료애를 지닌 선배로 기억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힘든 직업이었지만 딸에게도 간호학과를 권유할 만큼 일에 자부심이 컸다. 딸(26)은 “어머니는 수간호사를 맡을 수 있는데도 평간호사로 남아 궂은일을 도맡아 해 평소에도 후배들이 많이 따랐다”며 “어머니는 평소에도 환자들과 가까이 지냈고, 제게도 간호학과 진학을 권유할 만큼 하시는 일에 대한 자부심이 컸기에 마지막까지 사명을 다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친정父 팔순 하루 전, 휴가 나온 子 못 본채…
현 간호사가 숨진 날은 친정아버지의 팔순 잔치를 하루 앞둔 날이었다. 군 복무 중인 아들(22)도 휴가를 나왔다. 그날 퇴근 후 오랜만에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이기로 예정돼 있었다. 장례식장에서 남편 장재호 씨(54)는 “장인어른의 팔순을 앞두고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며 허공을 바라본 채 눈물을 흘렸다. 아들은 “연기가 차오르는 상황에서도 환자를 두고 나가지 않으셨던 어머니가 자랑스럽다. (하지만) 너무 보고 싶다”고 했다.
경기도간호사회 전화연 회장은 “아들이 휴가 나오길 얼마나 손꼽아 기다리며 휴가 나온 저 아들을 얼마나 보고 싶었을까. 보지도 못하고 어떻게 눈을 감았을까. 가슴이 저렸다”고 했다. 고인의 동료였던 허 모 간호사는 “첫 직장 투석실에서 뵈었던 현은경 선생님은 신입인 저에게 많은 것을 알려주신 분”이라며 “현 선생님은 간호사로서 사명감이 굉장히 높았고, 누군가 해야 하는 일에 항상 먼저 앞장서셨다”고 회고했다.
고인은 가정에서도 자녀들에게 100점짜리 엄마였고, 남달리 부부애가 좋아 주변의 부러움을 샀다고 한다. 사건 후 6개월. 갑작스럽게 가족 곁을 떠난 ‘엄마’이자 ‘아내’의 빈자리는 너무 컸다.
장 씨는 “가정에서의 집사람 모습은 엄마의 역할을 충실히 하는 그 엄마였다. 누구나 보통 생각하는 그 엄마. (울먹) 자식을 위해 서방을 위해 희생을 했던 그 엄마의 모습밖에는 드릴 말씀이 없다. 그래서 더 힘들다. 저는 집사람만 의지해서 27년을 살아왔는데 사라져 버리니까 그 빈공간이 너무나 힘든 시간이 되고 있다”며 울먹였다.
이어 “사건 6개월이 돼가고 있는데 아직 힘들다. 오죽하면 이사까지 생각하고 있다. 도저히 그 집에 살 수 없어서. 그 이전 그 이후의 시간 계속 그 사람을 생각 안 할 수가 없다”며 아내를 그리워했다.
사건 직후 대한간호협회에서 마련한 온라인 추모관에는 약 3000개의 추모글이 달렸다. 6개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달리고 있다. 투석 환자의 보호자라고 밝힌 한 추모객은 “현 간호사님은 평소에 일 처리가 빠르셨고 항상 환자 먼저 생각하시는 분이셨다. 현 간호사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잠을 이루지 못했다. 현 간호사님은 진정한 간호사였다. 당신을 잊지 않겠다”고 글을 올렸다.
현 간호사는 지난해 말 의사자로 인정됐다. 의사자는 직무 외의 행위로 자신의 생명이나 신체상의 위험을 무릅쓰고 위기에 처한 다른 사람의 생명과 신체, 재산 등을 구하기 위해 직접적이고 적극적인 행위를 하다가 사망한 사람을 대상으로 보건복지부가 인정한다. 이천시(시장 김경희)는 지난달 처음으로 ‘자랑스러운 이천인상’을 만들고, ‘희생 부문’에 현 간호사를 선정해 상패를 수여했다.
■ ‘따뜻한 세상을 만들어가는 사람들’(따만사)은 기부와 봉사로 나눔을 실천하는 사람들, 자기 몸을 아끼지 않고 위기에 빠진 타인을 도운 의인들, 사회적 약자를 위해 공간을 만드는 사람들 등 우리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이웃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주변에 숨겨진 ‘따만사’가 있으면 메일(ddamansa@donga.com)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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