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미국 실리콘밸리 새너제이 샌타클래라 컨벤션센터에서 열린 ‘디자인콘(DesignCon) 2023 국제학술대회’는 마치 KAIST 전기및전자공학부 테라랩(Teralab)을 위한 축제 같았다. 테라랩의 박사과정 4명이 대상격인 최우수논문상을 수상했기 때문이다. 지난해 대회에서도 테라랩 출신 1명이 최우수논문상을 수상했는데, 올해는 전체 대상 수상자 8명 중 절반을 차지한 것이다.
1일 테라랩을 이끄는 김정호 교수(62)를 만나 비결을 들어봤다. 반도체 산업의 미래를 예측해 연구 방향을 정하고, 미국 빅테크(Big tech) 등에 35명을 취업시킨 비결도 궁금했다.
김 교수는 고성능 반도체 설계 전문가이자 현재 오픈AI의 챗GPT에 사용중인 2.5/3차원 AI(인공지능) 반도체 분야의 세계적 석학이다. IEEE Fellow(미국전자공학회 석학) 이기도 하다. 서울대 전기공학과에서 학사와 석사 학위를 받은 뒤 미국 미시간대에서 전자공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다음은 김 교수와의 일문일답.
―디자인콘은 어떤 상인가.
“디자인콘은 반도체 및 패키지 설계 분야에서 세계적 권위를 인정받는 국제학회다. 1989년 미국 실리콘밸리의 효시였던 휴렛팩커드(HP) 주최의 고속통신 논문상으로 탄생해 운영되다 1998년부터 기초부터 응용에 이르기까지 전자 설계 분야 전 영역으로 논문 공모 범위가 확대됐다.”
―디자인콘 최우수상을 휩쓴 비결은….
“산업 연계형 연구 덕분인 것 같다. 이 대회에는 인텔·마이크론·램버스·텍사스인스트루먼트(TI)·AMD·화웨이·IBM·앤시스(ANSYS) 등 글로벌 빅테크 기업 연구원과 엔지니어들이 대거 도전한다. 이 대회에서 경쟁력을 가지려면 산업 마인드가 있어야 한다. 이번 수상작 중 두 편은 이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클러스터 연구과제로 채택됐다.”
―삼성전자 경력이 산업연계형 연구에 도움이 되는가.
“1994년 삼성전자 D램 설계팀에서 수석연구원으로 반도체 설계 연구를 하다 1996년 KAIST로 이직했다. 그 후 줄곧 삼성전자 및 SK하이닉스 등과 협력 연구를 해왔다. 한화시스템과 국방인공지능 융합 연구센터를 운영한다.”
김 교수의 연구 역량은 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있다. 이미 국제학회에서 20여 회에 걸쳐 ‘베스트 페이퍼 어워드’를 받았다. 마이크로소프트(MS) 아카데믹이 2020년 조사한 전 세계 반도체 분야별 연구자 순위에서 김 교수는 HBM, 실리콘 관통 전극(Through Silicon Via), 접지 잡음(Ground Noise), 신호선 설계(Signal Integrity), 전력선 설계(Power Integrity) 분야에서 모두 1위를 기록했다. 그 밖에 시스템-인-패키지(SiP), 3차원 집적회로(3D IC) 분야 2위, 전기 인터페이스(Interposer) 분야 3위로 조사됐다.
―주력 연구 분야는….
“고대역폭 메모리(HBM)를 비롯한 차세대 AI 반도체 연구다. HBM 설계와 패키지(칩의 보호) 분야에서 우리가 세계를 선도하고 있다고 자부한다. HBM은 D램을 여러 층으로 쌓아 올려 데이터 처리 속도를 높이는 역할을 한다.”
―테라랩이 원천 기술을 가지고 있다는데….
“반도체 설계 자동화 기술인 ‘5I 융합 솔루션’이 시스템반도체 분야에서 원천 기술로 인정 받고 있다. 5I는 신호선 설계(SI), 전력선 설계(PI), 기계·열 설계(TI), 전자파 설계(EMI), 구조 설계(AI)를 말한다. 이런 여러 핵심 기술을 융합해 최적의 반도체 설계를 해낸다.”
―테라랩의 최고의 목표는 뭔가.
“챗GPT 같은 인공지능이 반도체를 100% 자동으로 설계하는 기술을 확보하는 거다. 대량의 고성능 반도체를 생산하게 하는 설계 자동화야말로 반도체 주도권을 좌우하는 초격차 설계 기술력이다.”
―연구진과 연구비 규모에서 테라랩이 국내 톱 클래스인가.
“KAIST 랩 가운데에서 일단 가장 연구자가 많고 가장 많은 연구비를 수주하는 걸로 안다. 석사과정 10명, 박사과정 13명 등 모두 23명의 연구진이 공동 연구 과제를 수행하면서 각기 학위 논문을 준비한다.”
―테라랩 출신 35%가 구글 등 빅테크에서 근무한다.
“지금까지 100명의 제자를 배출했는데 그 가운데 35명이 구글, MS, 애플, 테슬라, 램버스, 퀄컴, NVIDIA, 마이크론 등 글로벌 빅테크에 취업해 반도체 설계 엔지니어로 일한다. 그런 까닭에 연말과 여름휴가 기간을 미국에서 많이 보낸다. 제자들이 실리콘밸리 등지에서 워크숍을 열고 사제의 정도 나눈다. 제자 40명가량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한국기계연구원, 국방과학연구소(ADD), KAIST 등에서 일한다. 지난해 연말 삼성전자 DX부문 최연소 임원 승진자도 제자였다. 국내외에서 테라랩의 탁월성과 독창성을 인정해주는 것 같아 기쁘다.”
―테라랩에 6가지 모토가 있다는데….
“신나게 일한다, 창의적으로 일한다, 미리 앞을 내다보자, 융합기술을 하자, 산학협력이 중요하다, 국제 리딩그룹이 되자 이다. 선후배 관계는 수평적이고 토론 분위기는 자유롭다. 학생들은 경쟁하기 보다 더 관심 있고 뛰어난 분야가 있으면 서로 가르쳐주면서 상생한다.”
―카페에서 기말고사를 치르기도 하는데….
“캠퍼스 없는 대학이 생기는 마당에 굳이 전통적인 강의실 교육을 고집할 필요 없지 않은가. 미래학자들도 ‘3A 대학(Anyone, Anytime, Any place)’을 미래 대학의 모습으로 제시한다. 실리콘밸리의 많은 ‘대박’ 아이디어가 카페와 식당에서 나왔다. 카페에서 기말시험을 치르기도 한다. 학교 보직을 맡았을 때는 교내 많은 건물 1층에 카페를 유치했다. ”
기자는 2019년 12월 25일 과제 발표로 대체한 김 교수의 기말시험을 현장을 취재한 적이 있다. 장소는 KAIST 인근의 카페였다. 커피와 다과를 즐기면서 과제 발표가 이뤄졌다.
―‘미리 앞을 내다보자’가 모토의 하나다.
“미래를 예측할 수 있어야 과학기술과 산업 분야에서 국제 리딩그룹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주된 연구 주제인 반도체 뿐 아니라 다양한 최신 분야의 기술을 끊임없이 배우고 융합해 본다. 고성능 반도체 구현을 위해 SI와 PI가 필요할 것이라는 예측에 따라 10년 전부터 SK하이닉스와 공동으로 HBM 설계 기술을 개발한 것이 한 사례다. AI가 다른 분야와 접목되지 않던 시절, AI 융합의 미래를 예측하고 연구를 해왔다.”
―반도체 분야의 미래는 어떨 것인가.
“2030년 이후에는 이종(異種) 칩(Chip)을 하나의 패키지로 통합하는 ‘3D 이종 집적화(Heterogeneous Integration) 패키징’ 기술이 대세로 자리를 잡을 것이다. 동종의 칩을 집적화 하던 과거와는 달리 이종 칩을 집적화하면 다양한 기능을 하나의 칩에서 구현할 수 있다. 이렇게 하면 인공지능 반도체의 성능과 효율을 높일 수 있다. 그리고 이 방법이 반도체 무어의 법칙을 이어간다. 테라랩은 이러한 차세대 반도체 개발 추세에 맞춰 맞춤형 인재를 양성하겠다.”
―미래 예측의 노하우를 소개해 줄 수 있나.
“미래 예측에 기존의 논문은 그다지 큰 도움이 안 된다. 대개 5년 이상 지난 주제들이라서 그렇다. 진짜 중요하고 돈이 되는 아이디어는 일부러 논문으로 발표하지 않는 경우도 많다. 기업과의 협업 및 소통이 오히려 중요하다. 기업이 어디에 투자하는지, 어떤 전공자를 뽑는지, 어떤 방향으로 조직을 개편하는지 하는 동향은 중요한 참고자료다. 이런 과정을 통해 줄기 기술, 대세 기술을 예측하고 연구 방향을 설계하는 한편 산업계의 연구 및 경영 방향에 대해 자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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