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비부머 귀촌타운’ 30년 프로젝트 시동
강남집 처분해 조기 증여로 자식들 살 길 터주고
웰 에이징, 웰 다잉 등 노후 삶의 질 도모
100여 세대 규모 귀촌타운 모델 만들고 싶어
후반 인생은 30년 프로젝트에 바칠 생각
자녀 세대에 부의 이전 돕는 제도 절실
줄줄 새는 지방소멸 방지기금, ‘개념’ 갖고 써야
정영록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65)는 매주 이틀은 서울에서, 나머지는 전남 구례에서 지낸다. 이른바 ‘2도(都)5촌(村)’ 생활이다.
환갑을 맞은 2018년, 5년 뒤 정년퇴직에 대비해 서울 강남의 집을 팔고 구례로 이사했다. 그 뒤로는 매주 화·수요일에 수업을 몰아놓고 화요일 아침 KTX를 타고 서울로 올라왔다가 수요일 오후 내려가는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서울에 오면 결혼한 아들의 집에 묵는다.
“때가 되면 적당히 자리를 내줘야 후세들이 자라날 수 있다는 생각을 오래전부터 해왔습니다. 평소 자식들에게 조기에 자산 일부를 물려줘서 30대 초부터 자립 기반을 만들어 주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고, 환갑 때 실천했지요.
제 집을 팔아 자식들에게 증여해서 주택 구입의 길을 터 주었습니다. 그리고서 은퇴까지는 아들 집 한 칸을 활용하기로 하고 구례로 갔어요.”
퇴직 뒤에는 굳이 서울에서 살 필요가 없었다. 기본적으로 부모 세대가 서울을 비워줘야 청년들이 도시에 정착해 미래를 그릴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청년들이 결혼과 출산을 기피하는 가장 큰 이유는 불투명한 미래입니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자신의 미래 생존에 자신이 없다는 거죠. 이건 나라의 미래가 없어지는 거나 매한가지입니다.”
언젠가 기사를 보고 연락해온 그와 두차례 식사를 함께 한 적이 있다. 그는 한국 사회 전반에 대해 문제의식도 많았고 세대 간에 대결과 착취가 아닌 연결과 융합을 고민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곤 했다.
서울로 올라온 정 교수를 7일 정식인터뷰를 위해 만났다. 얼마 전 그가 베이비부머 귀촌타운 구상안을 보내온 것이 계기였다.
“베이비부머 가정에 ‘자가 전세’ 허용을”
1958년 개띠인 그는 경남 하동에서 학창 시절 상경해 수십 년을 산, 향도이촌(向都離村) 세대다.
700만 1차 베이비부머(1955년~1963년생) 중 상당수가 지방 출신으로 서울과 수도권에 집을 장만했다. 그는 이들의 집만 다음 세대에게 합리적으로 이전돼도 청년들이 미래를 그릴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현업에서 은퇴한 베이비부머 아버지는 더 이상 복닥대는 서울에서 살 필요가 없지만 아이들은 서울에서 살아야 합니다. 아버지는 서울에 집을 한 채 갖고 있지만 아이들은 내 집을 가질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게 현실이지요. 기성 세대가 모두 자기 집을 갖고 수도권에서 버티고 있으니 집값은 좀체 내리지 않고요.
하지만 기성세대 대다수는 전 재산의 70%가 집에 묶인 채로 노후자금 부족으로 쩔쩔매는 경우가 많습니다. 지방 출신이라면 귀촌의 로망을 갖고 있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한 편이 아닙니다.”
이 경우 귀촌을 하려면 집을 팔아 일부를 자녀들에게 나눠주고 본인도 일부 가지고 시골로 내려가야 한다. 여기에 각종 세금까지 내고 나면 가족 전체의 자산은 줄어들고 자녀들은 내집마련의 기회에서 영영 멀어진다.
그래서 그는 2년 전 낸 책 ‘핏팅 코리아’에서 자가(自家) 전세 제도 도입을 주장했다. 부모 세대가 집을 자녀에게 넘기고 자신들은 그 집 전체, 또는 일부에서 세를 사는 개념이다.
자금이 부족한 자녀 세대에게 내 집 장만의 길을 제공해주고 부모 세대는 얼마간 받은 돈으로 지방에 살 집을 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부모의 전세금은 사망한 뒤 상속 처리하면 될 일이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이렇게 하면 ‘증여’라며 세무조사가 들어오기 십상이다.
-말씀하시는 자가전세 제도라는 게 결국 증여세를 감면해 달라는 얘기가 되지 않을지요?
“맞습니다. 그런데 이렇게라도 해서 한국의 중산층을 튼튼하게 지켜야 하지 않을까요. 지금대로라면 중산층은 은퇴와 동시에 하류층으로 편입되기 쉬워집니다. 그 자녀 세대는 안심하고 결혼출산을 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요. 악순환의 반복이지요. 전 세대가 불행합니다.”
-부의 대물림, 빈부격차 심화라는 문제도 지적될 수 있겠는데요.
“그건 또 다른 방법으로 해결해야 하겠지요. 전 국민의 빈곤화보다는 나은 것 같기도 하고요.”
“베이비부머의 귀촌으로 지방 소멸 막아보자”
지방이 소멸된다고 여기저기서 목소리를 높인다. 지방에 미리 자리잡은 그로서는 피부로 느끼는 일상이다. 그가 자신뿐 아니라 또래 베이비부머들이 은퇴후 살 곳에 대한 여러 조건을 생각해본 이유이기도 하다.
그의 구상은 기성세대의 귀촌으로 지방소멸을 막는 동시에 질 높은 노후를 살아갈 터전을 만들자는 것.
이 고민은 은퇴를 앞두고 인생 후반전을 생각하는 시기, 상당히 오래전부터 진행됐다고 한다. 그 결과물이 베이비부머의 귀촌타운(그는 이를 ‘베부쉼·베이비부머 쉼터’라 부른다) 구상이다. 내용은 매우 구체적이다.
먼저 귀촌타운은 입지가 중요하다. KTX역과 병원이 15분 거리 내에는 있어야 한다. 주변에 놀 곳인 문화시설이 있고 쇼핑몰과 극장, 관광지와 숙박시설 등 남성과 여성이 수요가 다른 여러 조건이 부합돼야 한다.
그가 노후 거주지로 고향인 경남 하동 대신 전남 구례를 택한 이유도 KTX역이 있고 30분 거리에 종합병원이 있는 등 여기 딱 부합하는 구례의 조건 때문이다.
단지 규모는 최소한 100가구 이상은 돼야 한다. 어느 정도의 익명성이 보장돼야 하기 때문이다.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는 눈이 있다고 느껴지는 일상은 도시인에게는 매우 부담스럽다.
각 층 5가구씩 25평(방 2개) 정도의 주택을 5층 높이로, 4~5개의 주거동을 만든다. 고령자 주거시설이니만큼 엘리베이터는 필수다.
주거동 한 가운데에 공동식당과 복지관, 도서관, 문화시설, 편의점 등 커뮤니티 시설이 들어간 건물이 하나 들어간다. 이 건물 위로는 10층 정도로 청년 임대주택을 넣어주는 방안도 고려해볼 만하다.
“100세대 이상 규모면 어느 정도 수요 창출이 되니 지역 분들에게 질은 높지 않더라도 약간의 일자리를 제공할 수도 있습니다.
이밖에 셔틀버스를 운행하고 보건소 지소를 주 1~2회 여는 등 생각해야 할 것은 많지요. 이곳에서 입주자들은 웰 에이징과 웰 다잉까지 추구할 수 있습니다.”
정 교수의 이 모든 플랜의 주인공은 철저히 베이비부머에 맞춰져 있다.
“이런 일을 실현가능하게 해줄 세대가 누구일까 생각해보니 베이비부머였습니다. 베이비부머는 한국 역사에서도 특별한 세대입니다.
전체의 10%가 대학 교육을 받은 첫 세대이자 1인당 GDP(국내총생산)를 1만 달러에서 3만 달러로 이끈 중추 세대입니다.
대다수가 고향을 떠나 서울에 정착한 세대이자 제대로 연금을 받는 첫 세대이기도 합니다. 대략 일 인당 150만 원 정도 되니 이 돈으로 시니어타운에서 생활이 가능하죠.
의식도 있고 돈도 있고 체력도 있고 사회 공헌에 대한 생각이 남아 있는 이분들이 지금 대거 은퇴중이잖아요.”
“돈이 넘쳐나는 지방, 먼저 보는 자가 임자”
-이런 타운을 무슨 돈으로 짓는지요?
“민관합작 투자 형태로 해서 입주자들은 건축비를 내고 정부는 부지를 제공해주는 방식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입주자들은 영구 임대주택 개념이죠. 건축비는 다음 사람이 들어올 때는 보증금 역할을 하면 됩니다.
공용 부분인 상가와 청년임대 주택 부분은 지자체가 복지사업 개념으로 지어줄 수 있다고 봅니다.
입주자들은 건축비 1억5000만 원 정도, 월 생활비로 1인당 100만 원 정도 지출하면 되지 않을까요. 이런 것을 지방에 있는 폐교 부지 같은 곳을 활용해 시범 운영을 해봤으면 하는 거지요.”
서울 기준으로 보자면 토지 무료 제공에 복지 시설이 설치된다면 엄청난 특혜처럼 여겨지지만 지방에서는 그렇지도 않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지자체들이 가진 공공 부지가 많아요. 제가 아는 지역은 지금도 예산을 들여 청년 복지주택이라며 20호를 짓고 있는데, 20호로는 수요 창출이 안 되니 이미 실패가 예견되죠.
지방소멸방지기금이 전국에 해마다 1조 원씩 뿌려지지만 어디서 어떻게 쓰이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차라리 지방에 정착하는 도시민을 위한 인프라 마련에 지원하는 게 현실적이 아닐까요.”
항간에서는 지방소멸 방지기금은 제안서 잘 쓰는 곳으로 몰린다고 한다. 그래서 제안서 예쁘게 써주는 홍보대행사들이 전부 지방으로 가 있다는 말까지 나도는 현실이다.
“문제는 목적의식과 개념입니다. 지방에는 지금 돈이 철철 넘쳐요. 대부분 먼저 보는 사람이 임자지요.
50m 도로 만드는데 3년간 지지고 볶고 하는 걸 보고 있자면 ‘도대체 왜? 누굴 위해?’라는 물음표가 꼬리를 물고 일어납니다.
미래 세대에게 도움이 되는지, 지역 발전에 기여할지 여부보다 자신의 업적, 자리보전이 더 중요하죠. 온갖 토목사업을 보면서 ‘누군가의 이해관계가 작동했겠지’라고 짐작할 뿐입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예술인이 살지 않는 텅 빈 예술인촌, 아이들이 외면하는 테마파크, 관광단지라는 명목으로 90억 들여 지은 텅 빈 건물 등 지방에서 피 같은 예산을 투입했지만 흉물만 남기고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사업에 대한 예시는 끝없이 이어진다.
안도 다다오의 ‘나오시마’처럼… 30년 프로젝트 각오
정 교수는 중국경제 전문가로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로 근무하던 2011년부터 2년 반, 주중 한국대사관 경제공사로 일한 이력을 갖고 있다.
요즘 구례에서의 생활은 하루 2시간 천은사 둘레길을 산책하고 섬진강을 바라보며 그의 표현에 따르면 ‘멍때리기’를 한다고 한다. 부인과 함께 하는 활동이 갈수록 늘고 있다.
“귀촌타운이 전국에 보편화돼 지방의 미관을 새롭게 바꾸고 ‘내가 살고 싶은 동네’로 바뀌었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습니다. 군 단위에 들어서는 흉물스런 고층 아파트 대신 야트막한 귀촌타운이 퍼지면 좋겠어요. 그러려면 한 군데부터 성공해야 하겠지요.”
그는 일본의 지역재생 성공 사례를 예로 들었다. 20년 전 안도 다다오 등 건축가를 중심으로 한 프로젝트를 통해 폐허였던 섬이 예술의 섬으로 재탄생한 일본 가가와현의 나오시마(直島)나 쓰러져가던 오지 온천마을이 일본 최고 관광지로 거듭난 구마모토의 구로카와(黑川) 사례가 그것이다.
그는 귀촌타운을 자신의 후반생 30년 프로젝트라고 말한다. 성공한다면 자신도 그곳에서 살고 싶다는 ‘사적인’ 욕심도 있다. 이런 계획을 말하면 주변 지인들 중 참가하겠다는 사람이 10여 명은 된다고 말한다.
“제 눈에는 구례가 귀촌타운을 만들기엔 천혜의 후보지인데, 지자체에서는 관심이 없어 보이네요(웃음). 구례나 하동, 강원도의 한군데 더 해서 세군데쯤 선정해 모델을 한번 만들어보고 싶습니다. 제 후반생을 바쳐 내가 살고 싶은 동네를 바꿀 수 있다면 인생 전체가 의미가 있지 않겠어요. 궁극적으로는 제 자신의 행복을 위한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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