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 소멸’ 위기 극복]상생 위한 ‘임팩트 금융’ 〈1〉
농협 컨설팅-저리대출 받은 ‘무주원’, 지역서 13명 고용… 일자리 모델로
초고령 日선 은행이 사회문제 앞장… 농업 자회사 두고 특산품 재배-판매
무주군청이 있는 전북 무주읍에서 차로 30분을 달리자 1만1200m² 면적의 대형 유리온실이 모습을 드러냈다. 덕유산 자락인 해발 450m 고지대. 주변의 논에는 벼 그루터기만 남아있었지만 스마트팜 ‘무주원’의 유리온실에는 로메인, 프리라이스, 루콜라, 바질 등 파릇한 채소가 가득했다.
무주 지역사회에서 13명을 고용해 샐러드 재료인 엽채소와 허브류를 생산하는 한경훈 무주원 대표(33)의 고향은 전남 순천시다. 일본 와세다대에서 경제학을 전공하던 중 수강한 농업경제학 수업이 그를 스마트팜 대표로 이끌었다. 한국보다 먼저 농촌의 위기를 경험한 일본을 보면서 첨단 기술을 적용한 농업으로 농촌을 살려내 보겠다는 ‘청사진’을 그린 것이다.
한 대표는 2018년부터 2년 동안 전북 김제시에서 농림축산식품부와 지방자치단체가 함께 운영하는 스마트팜 청년창업 보육센터 1기생으로 교육을 받았다. 교육이 끝날 무렵 그는 고도가 높아 여름에도 서늘한 무주군에 스마트팜을 짓고 샐러드용 엽채류를 재배하겠다는 계획을 짰다. 하지만 어떻게 수십억 원의 자금을 마련해서 유리온실을 세우고 빠른 시간 안에 수익을 낼 수 있을지 등의 세부안은 불투명했다.
이때 길을 열어준 것이 NH농협은행이었다. 2019년 말 한 대표가 NH농협은행 농업금융컨설팅의 문을 두드리면서 1년에 이르는 긴 컨설팅이 시작됐다. 농업경제학 박사 학위를 가진 컨설턴트인 신황호 농업금융부 차장은 매달 한 대표를 만나고 수시로 전화, 이메일 상담을 하면서 재배와 법인 운영 등 두 가지 측면의 노하우를 전수했다.
무주원은 이런 컨설팅을 거쳐 NH농협은행에서 연 1% 금리로 45억 원의 ‘일반 스마트팜 종합자금’ 대출을 받았다. 이 자금으로 작물의 뿌리를 초대형 수조의 양액에 담가서 재배하는 ‘드라이 하이드로포닉스(Dry Hydroponics) 벤치 시스템’이 현실화됐다.
● 맞춤형 컨설팅과 저리 대출로 스마트팜 현실화, 지역 고용으로 화답
지난해 4월 첫 제품을 출하한 무주원은 벌써 국내 대형마트와 대기업 식품 계열사를 판로로 확보했다. 올해는 20억 원 가까운 매출이 점쳐지며 벌써 지역사회에서 13명을 고용하고 있다. 4명은 30대 청년층, 9명은 50·60대 장년·고령층이다. 관리직으로 일하는 청년층 직원들에게는 인근 아파트에 월세를 내면서 사택도 제공한다. 사택에 살면서 아내와 함께 무주원에서 일하고 있는 재배사 이규철 팀장(30)은 “(무주원은) 안정적인 직장이면서 동시에 앞으로 새로운 농업 창업의 계기가 될 수 있는 일자리”라고 말했다.
무주원은 인구가 2만3700명 수준으로 떨어진 무주군에서도 새로운 일자리 창출 모델로 주목받고 있다. 김일중 무주군 기획팀장은 “고랭지 스마트팜에서 경쟁력이 있다는 점을 감안해 군 차원에서도 청·장년 교육장과 임대농장 사업 등을 준비 중”이라고 말했다.
청년들의 이탈과 지방 소멸을 막기 위한 1순위 과제로 ‘일자리 창출’이 꼽히고 있는 가운데 무주원은 은행이 농촌에서 얼마나 큰 역할을 할 수 있는지를 한눈에 보여준다. 은행의 자금 지원과 컨설팅을 발판 삼아 농촌 지역에 새로운 일터가 둥지를 터 고용이 발생하고, 또 다른 창업의 꿈이 움트는 ‘선순환’이 이어진 것이다.
실제로 금융 전문가들은 재무적 수익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긍정적인 영향력을 꾀하는 은행들의 ‘임팩트 금융’에 주목하고 있다. 지난해 12월 보스턴컨설팅그룹(BCG) 역시 임팩트 금융과 관련한 리포트에서 “금융사는 많은 사회적 문제에 광범위하고 상당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고유한 위치에 있다”며 “사회적 기회를 포착하는 은행은 가치 창출과 위험 관리 측면에서 상당한 보상을 거둘 수 있다”고 밝혔다.
우리은행이 투자한 스마트농업 솔루션 기업 ‘퍼밋’도 농촌 일자리 확대에 힘을 보탠 ‘임팩트 금융’ 사례다. 2017년 설립된 퍼밋은 스마트팜과 관련한 기술을 개발해 농가에 보급하는 역할을 하는 ‘스마트팜 솔루션 기업’. 스마트팜 시설 구축을 통해 농가 소득을 기존보다 20∼30% 정도 높이는 것이 주요한 목표다. 천안의 중부지사에서 정기적으로 세미나를 열어 농민들과 스마트 농업 기술을 공유하고 있다.
이현웅 퍼밋 최고운영자(COO)는 “스마트농업의 확산은 자연스레 젊은층에게 농업의 진입장벽을 낮추는 효과가 있다”며 “퍼밋의 4개 직영 농장 팜 매니저를 지역에서 채용하고 있는데 스마트농업을 배우고 나간 뒤에 창농을 하면서 일자리가 창출되는 선순환 구조도 만들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우리금융지주는 퍼밋 설립 초기부터 총 20억 원의 투자를 진행한 바 있다.
● “일본처럼 지방 소멸 막는 ‘임팩트 금융’ 역할 필요”
이미 일본에서는 은행들이 인구 감소나 저성장 같은 사회 문제 해결에 적극적으로 나서며 임팩트 금융을 실천하고 있다. 미야자키은행의 경우 농장업 자회사인 ‘유메아이팜’을 통해 아보카도 재배에서부터 판매까지 직접 하고 있다. 농촌에 취업하는 취농인(신규로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에게 아보카도 재배 노하우를 전수해 수입에 의존하는 고급 야채인 아보카도를 미야자키 특산품으로 자리매김하게끔 일조했다. 또 은행이 중심이 돼 지방 기업이나 농가의 국내외 판로를 개척하는 지역상사 설립에 나서기도 한다.
김혜미 하나금융경영연구소 연구위원은 “일본 은행들은 고령화와 젊은 인력의 도시 유출 등으로 구인난에 직면한 지방 기업들을 위해 인재 소개업에까지 진출했다”며 “금융이 인구 감소와 저성장 등의 사회 문제 해결에서 큰 역할을 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금융 전문가들도 최근 ‘고금리 이자장사’로 비판받고 있는 국내 은행들이 ESG(환경, 사회, 지배구조) 활동 중에서 특히 사회적 역할에 집중하도록 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서지용 상명대 경영학부 교수는 “미국에서는 지역 은행의 사회공헌 점수를 평가해 점수가 높은 은행들에 점포 확대권을 준다”며 “국내에서도 사회 인프라를 만들거나 취약계층을 돕는 은행에 대해서는 인허가권이나 영업 규제 측면에서 인센티브를 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임팩트 금융
은행이 자산과 노하우를 활용해 각종 사회 문제 해결 등 사회 전체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을 일컫는다. 특히 한국과 일본 등에선 은행이 저출산과 지역 소멸 같은 사회문제 개선에도 기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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