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four)에버 육아’는 네 명의 자녀를 키우며 직장생활을 병행하고 있는 기자가 일상을 통해 접하는 한국의 보육 현실, 문제, 사회이슈를 담습니다. 단순히 정보만 담는 것을 넘어 저출생의 시대에 다자녀를 기르는 맞벌이 엄마로서 겪는 일화와 느끼는 생각도 공유하고자 합니다.
6년 전 유럽의 탄소정책을 취재하기 위해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가 있는 벨기에 브뤼셀에서 며칠 체류했던 적이 있다. 다자녀 워킹맘 입장에서 솔직히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EU의 탄소정책이 아니라 벨기에 사람들의 근로시간이었다. 취재 지역에서 본 박물관 같은 공공문화시설은 오후 4~5시 사이면 예외없이 문을 닫았다. 대부분 매장도 마찬가지였다. 대신 6시 즈음 저녁시간이 되면 맥주집이 가득한 거리는 퇴근한 직장인들로 붐볐다.
당시 대사관에서 만난 한 중앙부처 공무원은 “TV가 고장나서 수리를 신청하면 수리기사가 오는 데 열흘 넘게 걸린 적도 있다”며 “가전제품은 가급적 고장 안 나게 써야 한다”고 웃었다. 우스개소리였지만 그만큼 수리기사와 AS센터 직원들의 근로시간이 짧다는 방증이었다. 매일 조금만 일하니 접수 처리도 오래 걸릴 수밖에.
● 정부가 근로시간 개편안 발표했지만…
반면 한국의 근로시간은 어떨까? 누구나 알고 체감하다시피 서구 선진국들에 비해 많이 길다. 한국의 연평균 근로시간은 1915시간으로 2021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자료에 나오는 유럽 국가들의 근로시간 1300~1400시간과 비교해 최소 500시간 길다.
정부도 노동 개혁의 최우선 과제로 근로시간을 꼽았다. 지난해 전문가들 입을 빌려 개편 방향을 공개했고, 최근 확정안을 발표했다. 개편안의 핵심은 연장근로시간의 유연한 운용이다.
현재 ‘주 52시간제’라고 불리는 근로시간 제도는 그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일주일(週) 단위로 근로시간 상한을 관리한다. 52시간은 법정 근로시간 40시간에 주 최대 연장근로시간인 12시간을 더한 시간인데, 이 중 12시간을 일주일 안에서 자유롭게 운용할 수 있게 한 것이 주 52시간제다. 법정 근로시간은 고정된 것이니 사실 엄밀히 이야기하면 ‘주 12시간 연장근로제’라고 해야 할 것이다.
개편안은 이 연장근로시간의 관리 단위 선택지를 늘렸다. 주 12시간에서 월 52시간, 분기(3개월) 140시간, 반기(6개월) 250시간, 연 440시간 가운데 택할 수 있도록 한 것. 개편안이 시행되면 연장근로시간을 훨씬 융통성 있게 쓸 수 있다. 일이 바쁠 때는 연장근로를 몰아서 하고 바쁘지 않을 때는 그만큼 일을 줄이는 게 가능해진다.
단, 아무리 근로를 몰아서 하고 나중에 쉰대도 한 번에 건강권을 해칠 정도로 장시간 무한근로 하면 안되기에 근무일과 근무일 사이 연속으로 반드시 11시간 휴식해야 한다는 단서조항을 달았다. ‘주 최대 69시간 근무’라는 계산도 여기서 나왔다. 4시간 근무하면 반드시 30분 쉬도록 돼있는 기존 휴게시간 규정에 연속 휴식시간 11시간 규정을 반영하면 하루 최대 근로시간이 11시간 30분이다. 이를 휴일인 일요일 제외하고 주 6일간 계속하면 주 69시간 일하는 셈이 된다.
● “주 69시간은 없다?”
문제는 이 근로 사례가 부각되면서 마치 개편안이 근로시간을 늘리는 연장안인 것으로 잘못 알려지게 됐다는 점이다. 필요에 따라 아주 적은 시간부터 69시간까지 운용하라는 게 핵심인데 주 최대 상한인 69시간만 사람들의 머릿속에 남았다. 현 근로시간 문제를 해결한다며 낸 대책이 오히려 근로시간 문제를 더 심화시켰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사실 정부가 거듭 해명하고 있는 것처럼 주 69시간 근무가 흔히 나올 수 있는 사례는 아니다. 주말 휴일 하루를 제외한 엿새 동안 연속으로 오전 8시부터 오후 9시까지 근무하는 식이어야 하는데 어쩌다 한 번이면 모를까 이런 근무를 자주 반복해야 하는 직업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정부는 지난해까지 최근 5년간 사업체노동력조사 결과도 근거로 들었다. 조사에 따르면 상용근로자들의 주평균 근로시간은 52시간은커녕 40시간도 안됐다. 연장근로시간 상한은 일주일 12시간인데 조사 결과 한 달간 연장근로시간 평균도 10시간에 불과했다. 현재도 근로자 평균 실근로시간은 법적 상한에 크게 못 미치고 있다는 뜻이다.
연장근로를 하면 근로자에게 그에 준하는 가산수당을 줘야 하기 때문에 사업주 입장에서도 근로시간을 늘리는 게 마냥 좋은 일은 아니라는 주장도 나온다. 개편안 자체가 ‘강제’가 아니라 ‘선택’지를 주는 것이기에 근로자가 싫어하고 사업주도 부담스러워 한다면 사업장에 연장근로시간 단위 확대안을 도입할 수 없다.
● 기록에 없는 ‘공짜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편안 시행이 불안한 이유는 현재 우리 노동 현장에 기록되지 않는 실제 근로시간, 이른바 ‘공짜근로’와 ‘공짜야근’이 만연해있기 때문이다.
정부가 우려를 불식하기 위해 공개한 사업체노동력조사 결과만 봐도 그렇다. 이 결과는 노동자들이 실제 체감하는 근로시간과 간극이 크다. 노동자들이 평균 주 40시간도 일하지 않는다는 것은 주 5일 일반적인 사무직 근무 형태를 가정할 때 매일 오후 5~6시 ‘칼퇴근’한다는 것인데 이 정도면 주 최대 근로시간이 44~48시간이라는 유럽 수준이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퇴근했다고 하고 계속 일을 했든가 아니면 집에서 일을 해서 근로시간이 안 잡힌 거겠지.” 조사 결과를 보자마자 지인은 이렇게 말했다. 비단 그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영세한 사업장은 물론 큰 사업장에서도 실 근로시간이 제대로 관리 안 되는 경우가 많다.
지금도 공식적으로 집계되는 근무시간보다 실근로시간이 더 긴 근로자가 많다. 근로시간 개편안과 그 취지를 제대로 이해한 사람들도 법정 주 상한 근로시간이 늘어나면 자연스레 공짜근로에 대한 심리적 부담이 줄어들고 공짜근로와 실근로시간이 더 늘어날 수 있다는 우려를 품을 수밖에 없다.
● 핵심은 정확한 근로시간 측정 및 집계
결국 정부 개편안이 정부 의도대로 근로시간 총량은 늘리지 않으면서 ‘일할 때 일하고 쉴 때 쉬는’ 장점을 살려 작동하려면 근로시간이 먼저 정확하게 기록돼야 한다. 근로시간 기록이 정확해지면 연장근로시간 단위를 월 이상으로 늘려도 주 69시간 같은 극한 근로가 자주 발생할 수 없다. 정부가 연장근로시간 단위가 클수록 연장근로시간 총량은 줄어들도록 설계해놨기 때문이다. 연 단위로 관리할 경우 총 연장 근로시간이 440시간이라 주 평균으로 따지면 8시간 30분 일하는 셈인데 현행 주 12시간보다 크게 짧다.
초과근로시간을 모아 장기휴가를 간다는 일명 ‘근로시간저축계좌제’도 근로시간 기록이 정확해야 제대로 구현될 수 있다. 연장, 야간, 휴일 근로를 포인트처럼 적립해 휴가로 쓸 수 있게 한다는 이 제도는 주 최대 69시간 근로와 함께 많은 비판을 받았다. ‘지금 있는 대체휴무, 보상휴가도 못 쓰는데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근로시간 기록만 정확하다면 이 제도 역시 현실성을 가질 수 있다.
근로시간이 명확히 관리되면 포괄임금제 같은 제도를 채택할 필요도 없다. 초과 근로에 대한 수당을 그 시간만큼 지급하는 게 아니라 고정적으로 지급하는 포괄임금제는 공짜근로와 공짜야근의 가장 큰 원흉으로 지목돼왔다.
근로시간 개편안은 논란 끝에 결국 주 상한시간을 더 줄이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은 것 같다. 하지만 중요한 건 ‘최대 얼마나 근무하느냐’가 아니라 ‘일상적으로 얼마나 근무하느냐’일 것이다. 그리고 일상적인 근로시간을 줄이려면 먼저 그 시간을 정확히 계량할 필요가 있다.
유럽 같은 근로시간이 갑자기 구현되기는 어렵지만 제도를 통해 차츰 줄여나가다 보면 사람들의 인식이 바뀌고 실근로시간도 자연스레 줄어들 터다. 코로나19로 회식 시각이 당겨졌듯 산통 끝에 나온 보완책이 퇴근시각을 당기는 마중물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