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워 시니어’ 급증하는데, 일자리는 단순노무직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3월 2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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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출산 고령화 적응 사회로]〈1〉 학력-건강-의욕 갖춘 파워 시니어
2040년 65세이상 노인중 대졸 33%
사회 고령화 속 일자리 대책 시급

김수형(가명·67) 씨는 최근까지 경비가 되기 위해 경비지도사 시험을 준비했다. 그는 서울대를 졸업하고 대기업을 거쳐 자동차 관련 외국계 기업에서 임원까지 오른 뒤 퇴임했다. 이른바 ‘스펙’을 갖춘 그가 경비 시험을 준비한 이유는 다른 일자리를 구하는 것이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일해온 업계에서 자문 일자리부터 찾아봤지만 정년을 넘긴 사람을 반기는 곳은 없었다. 노인들이 주로 지원하는 일자리에 이력서를 내면 “너무 화려한 경력이 부담스럽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김 씨의 대학 동창은 최근 “가방에 단추 붙이는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고 안부를 전해왔다. 김 씨는 “나도 목욕탕, 카드 배달원, 주차요원까지 알아봤다”면서 “내 경력을 생각하면 단순노무직보다는 조금 더 생산적이고 의미 있는 일을 찾고 싶다”고 말했다.

김 씨와 비슷한 상황의 노인들은 앞으로 더욱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동아일보는 서울대 국가미래전략원 인구클러스터장을 맡고 있는 이철희 경제학부 교수와 통계청 장래노인인구, 경제활동 인구조사 자료 등을 분석해 학력별 65세 이상 인구 추이를 추산했다. 그 결과 2020년 기준으로 전체 노인의 10%를 차지하고 있는 대졸자가 2040년이면 33%, 2051년에는 50%, 2070년에는 70%를 넘어설 것으로 예측됐다. 현재도 노인 10명 중 1명은 은퇴 후 양질의 일자리를 원하는 고학력자인데, 30여 년 뒤에는 이런 인구가 노인 2명 중 1명에 달할 것이란 의미다.

하지만 현재 노인 일자리는 단기·단순노무 중심의 저임금 일자리가 대부분이다. 이런 가운데 청년 인구는 줄고 있어 고용노동 시장에서 노인 인력의 활용이 시급한 상황이다. 이 교수는 “미래 노인들은 현재의 노인들보다 고학력에 더 건강하고 근로의욕이 높은 새로운(新) 노년층이라고 분석했다. 고학력에 의욕이 넘치고 건강한(Highly educated, Highly motivated, Healthy), 이른바 ‘3H’로 무장한 ‘파워 시니어(power seniors)’다. 김 교수는 “고령화시대에 고령 인구의 인적 자본을 잘만 활용한다면 장기적으로 우리나라 노동생산성의 감소를 막을 수 있다”고 말했다.

지난해 합계출산율 0.78명, 지하철 무임승차 논란과 노인연령 상향 등이 사회적 화두로 떠오르면서 윤석열 대통령은 이달 저출산 대책 관련 회의를 직접 주재한 뒤 종합 대책을 발표할 예정이다. 이에 맞춰 동아일보는 국내 노인층의 변화, 2030세대가 생각하는 정년 연장, 전문가 분석 등을 통해 진단과 해법을 제시하는 ‘저출산-고령화 적응 사회로’ 기획 시리즈를 시작한다.

파워 시니어(power seniors)
고령화가 심화되고 대학을 졸업한 인구가 늘어나면서 나타나는 고학력의 노인들. 이들은 학력뿐만 아니라 양호한 건강 조건, 근로 의욕도 함께 갖췄기 때문에 청년, 중장년층이 줄어들 미래 고용시장의 중요한 주체가 될 것으로 보인다.


“2040년 고학력 노인 574만명… 경력 활용할 맞춤 일자리 늘려야”


“업무아이디어 많은데 일할 곳 없어”
2050년엔 노인 중 대졸자가 절반
청년 인구 줄어 노년층 활용 중요

20일 고명석씨(68)가 서울 중구 한국노인인력개발원 노인일자리 통합지원센터에서 전화상담 업무를 하고 있다. 서울의 한 대학 사회복지학과 교수였던 고 씨는 "사회복지 전문가라는 장기를 살릴 수 있는 직업을 찾아서 만족한다"라고 말했다. 김재명 기자 base@donga.com
20일 고명석씨(68)가 서울 중구 한국노인인력개발원 노인일자리 통합지원센터에서 전화상담 업무를 하고 있다. 서울의 한 대학 사회복지학과 교수였던 고 씨는 "사회복지 전문가라는 장기를 살릴 수 있는 직업을 찾아서 만족한다"라고 말했다. 김재명 기자 base@donga.com
“아직도 머릿속에 든 기획 아이디어가 많아요. 간단한 방송물이라도 만들 기회가 주어지면 좋겠습니다. 현직 후배들이 받는 월급의 3분의 1만 받아도 괜찮아요.”

지방 명문고, 국립대를 거쳐 방송사 PD로 정년까지 근무하고 퇴직한 양태우(가명·66) 씨는 유명 장수 프로그램을 제작해 큰 상을 받기도 했다. 비록 정년은 지났지만 ‘퇴물’이라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는데 현실은 달랐다. 60세가 넘으니 계약직 PD로도 써주는 곳이 없었다. 그는 “방송은 노인 일자리가 없어서 편당 1만 원 주는 프로그램 모니터링 요원까지 지원해봤다”며 “지금도 도서관에서 방송 기획안을 짜고 있다. 30년간 다큐멘터리를 만든 지식을 활용할 기회가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 학력, 건강, 의욕 갖춘 파워 시니어
한국은 2000년 노인 인구가 전체 인구의 7%를 넘는 고령화사회에 진입했고, 2025년에는 20%를 넘는 초고령사회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하지만 노후 연금의 실질 소득대체율이 20%대로 유럽 선진국(70% 전후)보다 턱없이 낮아 대부분의 노인이 일해서 돈을 벌어야 하는 처지다. 한국 노인 고용률(65세 이상)은 2021년 기준 34.9%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15.0%)의 두 배가 넘는다.

이런 가운데 고령 인구는 갈수록 ‘고학력화’되고 있다. 본보와 서울대 국가미래전략원 인구클러스터장 이철희 경제학부 교수의 분석에 따르면 2030년 노인 인구는 1304만348명, 그중 대졸자는 251만5551명(19.3%)으로 추산됐다. 2040년에는 1720만2835명 중 대졸자가 574만2076명(33.4%), 2051년에는 1891만6786명 중 966만8050명(51.1%)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2070년에는 노인 인구 1727만3266명 중 대졸자가 1210만4727명(70.1%)을 차지할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이 미래 한국의 고용시장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할 ‘파워 시니어’로 자리 잡을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학력 수준이 높을 뿐 아니라 건강도 좋아 활발한 사회활동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교수가 1946년생(현재 77세)과 1957년생(현재 66세) 고령층의 청소년기 의료환경을 조사한 결과 1957년생은 1946년생보다 1.2∼2.0배 더 많은 의료시설 혜택을 누렸고, 하루 평균 섭취 열량은 1.5배가량 많았던 것으로 나타났다. 그만큼 젊은 시절 좋은 환경에서 자라 건강하다는 뜻이다. 이홍수 이대목동병원 가정의학과 교수는 “건강검진 수검률도 고학력자가 높다. 건강에 대한 관심과 정보가 많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2022년 OECD 조사에 따르면 올해 한국인의 기대수명은 남성이 80.8세, 여성이 87.2세로 평균 84.1세였다. ‘대졸자 노인’이 고령층의 70% 이상을 차지하게 될 2070년에는 남성의 기대수명이 86.6세, 여성은 92.9세로 평균 89.7세까지 늘어날 것으로 전망됐다.

● 일자리는 여전히 단순노무직 중심


높은 교육 수준, 좋은 건강 조건, 그리고 열정적인 근로 의욕을 갖고 있는 이른바 ‘3H(Highly educated, Highly motivated, Healthy) 노인’들의 취업 의지는 커지고 있다. 보건복지부의 2022년 고령자 통계를 보면 ‘장래 취업 의사가 있다’는 노인은 54.7%로 10년 전(42.6%)보다 12.1%포인트 올랐다.

문제는 고학력 노인들이 가진 인적 자산과 장점을 발휘할 수 있는 일자리가 부족하다는 점이다. 현재 노인 일자리 대부분은 단기·단순노무직이다. 고용부에 따르면 취업인구 중 55세 이상 고령층 임시 일용직, 비임금 근로자 비중은 각각 27.8%와 37.1%로, 54세 이하 17.4%, 17.1%와 비교해 높았다. 정부 지원 노인 일자리 사업도 월 30시간 일하고 27만 원을 받는 공공형 일자리가 약 70%로 주류를 이룬다.

노인을 고용하려는 기업도 많지 않다. 고용부의 사업체노동력조사 결과 상시 근로자 1인 이상 기업 중 정년퇴직자를 재고용하는 비율은 31.3%(2022년 6월 기준)였다. 2021년 고용부 조사에서 상시 근로자 300인 이상 기업 가운데 61세 이상 인력을 고용하고 있는 기업은 단일정년제 적용 사업장의 6.8%에 불과했다. 단일정년제란 직급이나 직종에 상관 없이 모든 근로자에게 같은 정년을 적용하는 것을 말한다.

이렇다 보니 고학력-숙련 노인 인력들도 단기·단순노무직으로 내몰릴 수밖에 없다. 추인자 씨(66)의 남편은 연세대를 졸업하고 한때 건축 설계 사무소 대표였지만 현재는 서울의 한 빌딩 보안 인력으로 일하고 있다. 추 씨는 “남편이 건설 이력을 살려 중장비 자격증을 딸까 했지만 어차피 현장에 가면 경력직이나 젊은 사람을 뽑는다더라”라고 말했다.

● “경력-전문성 고려한 고령 일자리 정책 필요”

고용 전문가인 권혁 부산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고령자의 경력, 전문성, 숙련도, 만족도를 반영한 일자리를 발굴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청년 인구가 줄어들고 있는 만큼 노인 인구를 잘 활용하는 게 사회적으로도 생산성을 높이는 길일 것”이라고 강조했다.

앞으로 ‘맞춤 일자리’를 찾으려는 노인이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대학 사회복지학과 교수였던 고명석 씨(68)는 한국노인인력개발원 노인 일자리 통합지원센터에서 노인들의 취업을 지원하는 일을 하고 있다.

고 씨는 “사회복지 전문가라는 나도 막상 은퇴하고 보니 막막했는데 장기를 살릴 수 있는 직업을 찾아서 만족한다”며 “정부 차원에서 민간, 사회서비스형 일자리 중심으로 고학력 전문가들을 활용할 방안을 연구하고 플랫폼을 개발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고용부 산하 공공기관인 노사발전재단은 금융권 퇴직자들을 대상으로 금융전문강사 등 관련 취업, 창업을 지원하고 있다. 권 교수는 “정년 연장, 퇴직자 재고용 등 기존에 일하던 곳에서 꾸준히 일할 수 있도록 하는 ‘계속고용’에 대한 논의도 본격화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파워 시니어#저출산 고령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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