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일 경기 안산시 단원구 선부동 빌라 화재 현장에서 만난 웨나린 씨(45)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나이지리아인 남편이 있어 이날 화재 피해를 당한 나이지리아인 A 씨(55) 가족과 가깝게 지냈다고 했다. 웨나린 씨는 “A 씨는 15년 전 한국에 와 부인과 안산시 다세대주택 등을 전전하며 다섯 아이를 힘들게 키웠다”며 안타까워했다.
● 5남매 중 막내만 생명 구해
불은 이날 오전 3시 28분경 선부동의 3층짜리 빌라 1층 A 씨 집에서 시작됐다. 소방당국은 약 40분 만에 불을 진화했지만 A 씨의 집에선 이들 부부 자녀 중 11세·4세 딸과 7세·6세 아들이 숨진 채 발견됐다. 경찰 관계자는 “네 아이 모두 질식해 숨진 것으로 추정된다”며 “부검을 통해 정확한 사인을 조사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경기남부경찰청 과학수사대의 1차 감식 결과에 따르면 불은 출입문과 인접한 거실 바닥에서 처음 발생했다고 한다. 출입구 인근 콘센트와 연결된 멀티탭에서 불이 시작돼 급속하게 번진 것으로 추정된다.
화재 당시 거실에서 자던 A 씨는 가족들에게 화재 소식을 알렸고 밖에 나와 구조를 요청했다고 한다. 방에서 다섯 아이와 함께 자던 부인 B 씨(41)는 혼자 대피하기 어려운 막내딸(2)을 1층 약 2m 높이의 창문 너머로 떨어뜨린 후 본인도 창문 너머로 몸을 던진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불길이 치솟는 바람에 부부 중 누구도 나머지 아이들을 구하지 못했다. B 씨는 골절상을 입고 양발과 오른팔에 화상을 입은 A 씨와 함께 병원으로 이송됐는데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상태다. 막내딸도 특별한 외상은 없다고 한다.
이날 화재로 이 빌라 거주자 41명 중 A 씨 부부를 포함해 우즈베키스탄인 2명, 러시아인 1명 등 6명이 경상을 입었다. 나머지 31명은 자력 대피했다. 3층에 살던 우즈베키스탄 국적 김 알렉산더 씨(45)는 “간밤에 누가 소리를 지르는 걸 듣고 아들딸과 옥상으로 대피해 살았다”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 2년 전에도 화재 사고 당해
불이 난 건물은 1994년 준공된 3층 빌라인데 내부에는 소화기나 화재경보기 등 소방 장비가 전혀 없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2017년 2월부터 모든 주택에 소화기 등을 설치해야 하는데 규정이 지켜지지 않은 것이다.
지인 등에 따르면 A 씨 가족은 1년여 전부터 21㎡(약 6.4평)쯤 되는 방 두 칸짜리 집에서 보증금 200만 원에 월세 50만 원을 내며 생활했다고 한다. A 씨는 고물을 수집해 나이지리아로 수출하는 일을 했는데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이후 일을 거의 못 해 생계에 어려움을 겪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날 숨진 자녀 중 일곱 살 아들은 2년 전에도 화상을 입은 것으로 나타나 안타까움을 더했다. A 씨 가족이 2021년 1월 안산시 단원구 원곡동 다세대주택 지하방에 거주할 때 거실 소파 근처에서 난 불로 목 등에 2도 화상을 입은 것이다. 당시 한 기업에서 1500만 원 상당의 화상 치료비를 지원했다.
이번 사고와 관련해선 안산시청에서 A 씨 부부와 막내의 치료비를 지원하겠다고 나선 상태다.
이번 사고를 계기로 열악한 환경에 거주하는 외국인 근로자의 화재 피해를 줄일 대책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올해만 해도 A 씨 가족을 빼고도 화재로 외국인 2명이 사망하고 24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주성 광주외국인복지센터장은 “화재에 대한 인식이 부족해 멀티탭에 과도하게 많은 전원을 연결하거나 전기장판을 종일 틀어놓는 외국인 근로자들이 적지 않다”며 “이주 초기 필수 소방교육을 실시하는 동시에 거주지의 소방시설 설치 여부를 점검·지원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안산=이경진 기자 lkj@donga.com 김보라 기자 purple@donga.com 주현우 기자 wooj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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