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파리 마르스 광장에는 격자 구조로 이루어진, 파리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이 있습니다. 파리의 상징으로 불리는 ‘에펠탑’입니다. 81층 건물과 맞먹는 높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에펠탑은 왜 ‘파리탑’이 아니라 에펠탑일까요? 이 탑을 설계한 프랑스의 건축가이자 구조공학자인 알렉상드르 귀스타브 에펠(1832∼1923·사진)의 이름을 땄기 때문입니다. 에펠은 일생 동안 수많은 건축물을 남긴 사람입니다. 가론강의 다리를 만들었고, 파나마 운하나 미국 자유의 여신상 등 유명한 건축물 설계에 관여했습니다.
그의 대표작인 에펠탑은 1889년 프랑스혁명 100주년 기념물로 건립되었습니다. 애초에 20년 뒤 철거할 예정이었으나 에펠의 설득과 ‘송신탑으로 쓰자’는 군부 고위층의 결정으로 살아남았다고 합니다. 실제로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의 통신 내용을 전쟁터의 프랑스군보다 에펠탑의 감청시설로 먼저 알아내는 일이 있었습니다. 당시 상대의 통신 내용을 잡아내는 것은 고난도의 기술이었고 높은 지역에 설치된 전파탐지기가 필수였습니다. 덕분에 현지에 작전 명령을 내려보내 일찍 방어에 나설 수 있었고 결국 독일군의 프랑스 진입을 막아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에펠탑은 원래의 목적인 혁명 기념 전시뿐만 아니라 통신, 항공, 기후측정 같은 또 다른 실용적 기능도 가지게 되었습니다. 에펠은 이에 맞춰 탑의 내구성을 강화해 나갔습니다. 이 때문에 에펠탑은 건축물인 동시에 당대의 과학, 나아가 최첨단 건축 재료의 압축판으로도 평가받습니다.
에펠은 일찍부터 고강도 철근을 다리나 건물 건축에 이용했는데 당시로서는 파격이었습니다. 특히나 에펠탑 같은 철근 건축물이 처음부터 사람들의 호응을 얻었던 것은 아닙니다. 특유의 앙상한 모습 때문에 당대 유명한 작가 모파상이나 에밀 졸라는 대놓고 비웃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300m에 달하는 철근 건축물이 가능할 거라고 보지도 않았습니다.
이 때문에 에펠탑의 엄청난 건설비용 중 파리 정부는 20%만 지원했고 나머지는 에펠이 조달해야 했습니다. 에펠은 관광수입과 각종 사업을 통해 10년쯤 뒤부터 흑자경영이 가능하리라 전망했으나 3년 만에 투자금 전부를 회수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1889년 문을 처음 연 한 해 동안 이미 195만 명이 다녀갔고, 파리의 외국인 관광객이라면 반드시 찾는 명소로 자리 잡았습니다. 에펠탑은 건축학적·기술적 차원만이 아닌, 사업의 측면에서도 대성공을 한 대표적 모델입니다.
올해는 에펠 사후 100주년이면서 31일인 오늘은 에펠탑이 준공된 날입니다. 에펠이 성공한 사업가였던 만큼 성공한 건축가였는지는 아직 논쟁 중입니다. 에펠탑 역시 단지 과학적 기법과 신기술로 세운 결과물이라는 평가도 있습니다. 하지만 에펠의 모험적이고 새로운 시도와 혁신적 사고가 낳은 결과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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