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방 오래쥐어 손바닥 하얗다고 응급실에…중환자 골든타임 잡아먹어[히어로콘텐츠/표류⑤·끝]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4월 3일 03시 00분


표류-생사의 경계에서 떠돌다
[下]제2준규-종열씨 막아야

응급환자가 치료를 받지 못한 채 무력하게 떠도는 ‘표류’는 일상이 됐다. 이를 초래하는 원인을 바로잡지 않으면 앞으로도 구급차에서, 응급실에서 표류하다 누군가 생명을 잃을 수 있다.

‘표류’를 끝낼 해결책은 단순하다. 수술 의사가 지금보다 많아야 한다. 그 의사와 환자를 이어줄 시스템을 고쳐야 한다. 정부와 국회가 이미 알고 있는 해답이다. 실행할 의무를 버려두고 있을 뿐이다.

지난해 12월 26일 서울 송파소방서 잠실119구급대 소속 김재원 반장이 환자를 이송하면서 다른 자동차 운전자들에게 ‘길을 터 달라’고 안내 방송을 하고 있다.
보건복지부가 지난달 21일 발표한 ‘제4차 응급의료 기본계획’은 그간 반복해 온 내용과 다르지 않았다. 과감한 실행 방안은 없었다. 동아일보 히어로콘텐츠팀은 그 기본계획 일부를 고쳐 써 봤다. 지난해 10월부터 올 3월까지 26명의 표류 환자와 100명이 넘는 현장 의료진과 구급대원을 심층 인터뷰하고 내린 결론이다.

● 현장과 동떨어진 정부 대책
초등학교에 다니는 두 아이를 둔 배병인 씨(40)는 지난해 12월 17일 경북 안동시에서 교통사고로 골반뼈가 산산조각 났다. 28분 만에 안동병원으로 이송됐지만 이 병원을 포함해 인근 병원 7곳에 수술이 가능한 의사가 없었다. 다른 병원 3곳은 의사는 있지만 이미 다른 환자를 수술 중이라고 했다. 배 씨는 다친 지 5시간 35분이 지나서야 약 220km 떨어진 병원으로 옮겨졌다.

배병인 씨가 경기 수원시 아주대병원에서 골반뼈를 이어붙이는 수술을 받은 후에 찍은 엑스레이 사진. 배 씨는 경북과 경남에 있는 대형 병원에서 모두 거절 당하자 “내가 사는 곳에서 못 하는 수술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절망스러웠다”고 말했다.
수술 의사 부족은 표류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 중 하나였다. 응급환자는 구급차→응급실→수술실의 순서로 막힘없이 이동해야 한다. 그런데 수술실에 의사가 없으면 각 단계가 꽉 막혀 환자가 거리를 떠돌게 된다.

복지부는 이를 해결할 방안으로 ‘순환당직제’를 제시했다. 예컨대 뇌출혈 응급 수술이 가능한 의사를 월요일엔 A병원이, 화요일엔 B병원이 상주시키는 식이다.

하지만 이는 수술 의사 자체가 부족한 현실을 외면한 ‘탁상행정’일 뿐이다. 권역외상센터를 둔 일부 병원이 사지 절단을 막을 혈관 수술 의사조차 못 구하는 형편이다.

설 전날인 올해 1월 21일, 배병인 씨가 부산 해운대구의 한 병원 복도에서 목발을 짚고 걷는 연습을 하고 있다.
수술까지 필요한 중증 소아 환자를 24시간 진료할 소아전문응급의료센터를 전국 8곳에서 12곳으로 늘린다는 대책도 마찬가지다. 이미 지정된 센터 8곳 중 일부도 수술 의사를 못 구해 문을 닫을 판이다.

올 1월 1일 오후 8시 반경 서울 송파구 서울아산병원 소아전문응급의료센터 앞에 대기 환자들이 몰려 있다. 차로 50분 걸리는 경기 의정부시에서 환자를 싣고 온 119구급차도 눈에 띈다.
결국 응급 수술에 대한 보상을 대폭 올리거나 중증 응급환자 수용률을 상급종합병원 평가에 반영하는 등의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그러려면 불필요한 검사와 경증 진료에 투입되던 건강보험 재정을 응급 수술로 끌어와야 한다. 응급 수술비가 싸게 책정될 수밖에 없는 구조로 짜인 현행 ‘상대가치 점수제’도 손봐야 한다. 정책 수혜자를 줄이는 작업이다 보니 역풍을 우려한 정부와 정치권은 이 개혁을 미루고만 있다.

● 119-응급실-수술실 실시간 소통해야
응급환자가 길에서 헤매는 시간을 1분이라도 줄이려면 치료 가능한 병원을 한 번에 찾을 시스템이 필요하다.

지난달 19일 대구에서 벌어진 17세 여학생 추락 사망 사건에서는 그 시스템의 부재가 속속 드러나고 있다. 구급대는 병원이 환자를 진료할 수 있는 상황인지 모른 채 여러 응급실을 떠돌았고 상황실은 부정확한 정보를 토대로 병원에 전화를 돌렸다.

이번 복지부 대책엔 “119구급대가 태블릿PC에 입력한 환자 정보를 이송이 예정된 병원으로 전송하는 시스템을 구축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실제 응급환자들이 이른바 ‘구급차 뺑뺑이’를 겪는 점을 감안하면 환자 수용을 문의하는 단계부터 환자 정보를 공유해야 빠른 이송이 가능하다.

1월 20일 경기 시흥소방서 구급대 이준호 반장이 환자를 병원으로 이송하던 중 경기도소방재난본부 119상황실에 전화를 걸고 있다. 갑자기 몸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12세 남자 환자에게 수액을 맞혀도 될지 상황실에서 근무하는 의료지도 의사에게 물어보기 위해서다. 119 이송 중 환자 정보 교환은 이처럼 주로 전화로 이뤄지고 있다.
지역마다 병원 간 전원(轉院)을 돕는 상황실을 추가로 설치한다는 대책은 실현될지 미지수다. 중앙응급의료센터 상황실마저 인력 확충 예산이 깎여 나갔기 때문이다. 복지부 관계자는 “지역 상황실 설치에 쓸 예산이 올해는 없고 내년에도 확보하기 어려워 보인다”고 토로했다.

● 중증-경증 응급실 나눠야
119구급차를 택시처럼 이용하는 경증 환자들도 표류를 일으킨다. 지난해 12월 19일 낮 12시 21분, 서울 광진구 자양동에서 심정지 환자가 발생했다. 심정지 환자는 심폐소생술이 1분 늦을 때마다 생존 가능성이 7~25%씩 급격히 낮아진다. 그런데 이 환자를 구하러 간 건 차로 10분 거리에 있던 송파소방서 잠실119구급대였다. 더 가까운 구급대들이 전부 ‘가래가 많이 나온다’거나 ‘발이 욱신거린다’는 119 신고를 받고 출동 중이었기 때문이다.

북새통 응급실도 골든타임을 잡아먹는 주범이다. 대형 병원 응급실은 저녁마다 대기 환자로 북적이지만 이들은 3명 중 2명꼴로 소형 응급실에서 치료받아도 되는 경증 환자다. 기자가 응급실을 취재하던 중에 ‘가방을 오래 쥐어서 손바닥이 하얗게 됐다’며 진료를 요구하는 경우도 있었다.

지난해 12월 24일 오후 7시경 충남 서산시 서산의료원 지역응급의료센터 앞에 구급차가 3대 줄지어 서 있다. 이날 당번이었던 신재복 센터장은 87세 패혈증 의심 환자를 다른 병원으로 보내랴, 팔꿈치 관절이 빠진 5세 여아를 치료하랴 바빴다. 그 와중에 경증 환자가 몰려들어 대기실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아무 증상도 없는 사람이 반복적으로 구급차를 부르거나 대형 병원 응급실을 방문하면 큰 비용을 물리는 방안을 검토할 때가 됐다. 현재 경증 환자가 대형 병원 응급실을 이용할 때 받는 불이익은 응급의료관리료를 약 4만 원 더 내는 것 말고는 없다. 일본은 구급대가 경증 환자의 탑승을 거절할 수 있고, 비응급 환자가 대형 병원 응급실(고도구명구급센터)을 이용하면 수십만 원에 해당하는 진료비를 물린다.

동아일보는 창간 100주년을 맞은 2020년부터 히어로콘텐츠를 선보이고 있습니다. 이번 히어로콘텐츠팀의 ‘표류: 생사의 경계에서 떠돌다’와 디지털 스토리텔링 ‘그들이 구급차를 탔던 날’ 등은 저널리즘의 가치와 디지털 기술을 융합한 차별화된 보도를 지향합니다. 디지털 플랫폼 특화 기사는 ‘히어로콘텐츠’(original.donga.com)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생사의 경계에서 표류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디지털로 구현한
‘그들이 구급차를 탔던 날’
(original.donga.com/2023/sos1)
응급환자와 구급대원들이 구급차에 갇혔던 75분을 숨소리까지 담은
‘강남에 응급실이 없었다’
(original.donga.com/2023/sos2)
응급의료 현장을 360° 영상으로 구현한
‘표류 속으로’
(original.donga.com/2023/sos3)

▽팀장: 조건희 기자 becom@donga.com
▽취재: 송혜미 이상환 이지윤 기자
▽프로젝트 기획: 위은지 기자 ▽사진: 홍진환 기자
▽편집: 하승희, 양충현 기자 ▽그래픽: 김충민 기자
▽인터랙티브 개발: 임상아 뉴스룸 디벨로퍼 임희래 인턴
▽인터랙티브 디자인: 곽경민 인턴

본 기사는 4월 3일자 동아일보 A1⋅2⋅3면에 실렸습니다.
본 기사는 4월 3일자 동아일보 A1⋅2⋅3면에 실렸습니다.


#히어로콘텐츠#표류#생사의 경계에서 떠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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