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일 강원 강릉시 아이스아레나 체육관에 마련된 이재민 대피소에서 만난 김진광 할머니(82)는 왼손으로 땅을 치며 눈물을 흘렸다. 그는 강릉 산불이 나기 시작한 난곡동에서 약 3km 떨어진 곳에서 남편인 전모 씨(88)와 함께 25년째 펜션을 운영하고 있다.
이날 오전 9시경 집 앞에 있는 밭에서 일하던 김 씨는 불이 난 걸 확인하고 곧장 집으로 향했다. 이후 눈이 좋지 않은 남편을 데리고 안전한 곳으로 대피하려 했다. 그런데 갑자기 들이닥친 강풍에 불이 빠르게 번지며 입구를 막았다. 김 씨는 지인의 도움으로 겨우 차에 탈 수 있었다. 다만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전 씨는 불이 난 집 안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김 씨는 “거짓말 같다”며 “나 때문에 남편이 그렇게 된 것 같아 가슴이 아프다”면서 가슴을 부여잡았다.
● 직격탄 맞은 주민들…“삶의 터전이 사라져”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에 따르면 강릉 산불로 379㏊가 피해를 입었고 주택과 펜션 등 100채가 소실됐다. 집이 완전히 불에 타는 피해를 입은 지역 내 주민 529명은 임시 대피소로 몸을 피했다. 특히 최초 발화 지점이었던 난곡동과 가까운 경포동 주민들의 피해가 심했다.
이재민 대피소로 몸을 옮긴 경포동 주민들은 침울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대부분 산불이 난 곳 인근 지역에서 카페나 펜션을 운영하는 자영업자들이었다. 이들은 “하루아침에 삶의 터전이 사라져 어떻게 살아갈지 막막하다”고 입을 모았다.
아이스아레나 체육관 강당에 마련된 테이블에 앉아 있던 남미영 씨(49)는 “카페와 펜션이 불에 전부 탔다”며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강릉시 안현동에서 10년째 펜션과 카페를 운영하고 있다. 이날 오전 9시 불이 난 걸 확인한 남 씨는 황급히 펜션으로 달려가 손님들을 깨우고 대피시켰다. 영유아를 포함한 7팀이 남 씨의 펜션에서 머물고 있었다고 한다. 남 씨는 “손님들을 보내고 나니 펜션이 절반 가까이 불에 타고 있더라”고 했다.
강릉시 저동에서 펜션을 운영하는 김남수 씨(56)도 망연자실한 표정이었다. 오전 인근에서 산불이 났다는 소식을 듣고 가족과 함께 시내로 몸을 피했다. 약 1시간 반이 지난 뒤 펜션으로 돌아왔을 때 가족의 생계를 지탱해 준 객실 16개 규모의 펜션은 이미 숯덩이가 돼 있었다.
산불은 동해안 최대 관광지로 꼽히는 경포도립공원과 경포해변까지 덮쳤다. 특히 경포호수 일대를 둘러싼 소나무 숲까지 번져 삽시간에 불에 탔다. 지난주까지만 해도 벚꽃이 만개했던 이곳 일대엔 시커먼 연기만 가득했고 인근 펜션 10여 채는 까맣게 타버렸다. 인근 골프장까지 불이 옮겨붙기도 했다.
● 안내 늦어져 대피 지연… 부모님 걱정에 타지에서 달려와
산불 직후 강릉시는 주민들에게 대피하라고 재난문자를 보내 공지했다. 하지만 일부 주민들은 “문자메시지를 늦게 받아 대피가 늦었다”고 했다. 저동의 한 아파트에 거주하는 김영희 씨(63)는 산불이 시작되고 2시간 가까이 지난 오전 10시 22분경에야 대피하라는 문자를 받았다고 했다. 김 씨는 “오전 9시 반경 아파트 대피 안내 방송을 듣고 대피소로 몸을 옮겼다”며 “불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자 휩쓸겠다 싶어 가방만 급하게 메고 나왔는데 어떻게 재난문자가 불이 다 난 뒤에 오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산불이 난 지역으로부터 약 5km 떨어진 경포초등학교에서 수업을 듣던 초등학생 75명은 수업 도중 급하게 인근 초등학교로 대피한 뒤 귀가했다. 경포초등학교 4학년생 우승연 양(10)은 “복도에서 친구들과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창문 밖에서 연기가 나는 걸 봤다”며 “아버지를 따라 무사히 집에 온 뒤 친구들끼리 ‘살아 있냐’고 묻기도 했다”고 했다.
부모님이 사는 고향에 산불이 났다는 소식을 듣고 한걸음에 달려온 자녀들도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했다. 서울에 사는 조모 씨(55)는 “어머니에게 집이 불타고 있다는 연락을 받은 뒤 바로 강릉으로 내려왔다”면서 “아버지가 몇 해 전 돌아가시고 어머니 혼자 사시면서 걱정이 많았는데 불까지 나서 놀랐다. 어머니가 무사하셔서 다행”이라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조 씨 어머니가 살던 마을은 전체 20가구 중 15가구 넘게 전소됐다.
강릉=손준영 기자 hand@donga.com 강릉=최미송 기자 cms@donga.com 강릉=이상환 기자 paybac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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