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과 놀자!/피플 in 뉴스]노예 해방 외쳤던 美16대 대통령 링컨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4월 1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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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5년 오늘, 미국 워싱턴의 포드극장에서 한 방의 총소리가 울려 퍼집니다. 존 윌크스 부스라는 배우가 쏜 총에 미국의 16대 대통령이자 노예 해방의 영웅, 에이브러햄 링컨(1809∼1865·사진)이 쓰러집니다.

링컨은 미국 북서부 변방의 개척지 출신이었습니다. 지독히 가난했던 탓에 제대로 된 정규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독학으로 변호사가 됩니다.

“삶은 실패의 연속이었다. 3km를 걸어 다닌 초등학교는 1년도 못 다녔다. 15세 때부터 상점 점원, 뱃사공 등의 아르바이트를 했다. 대통령이 되기 전까지 나의 이력이 엉망인 것은, 그만큼 살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며 발버둥질한 증거다.”

링컨의 말은 그의 삶이 단 한 순간도 호락호락하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정치생활 역시 순탄치 않았습니다. 1834년 일리노이 주의원이 되고, 1847년 하원까지 진출하지만 1기로 끝나게 됩니다. 그러나 1858년 민주당의 S A 더글러스와 맞붙었던 상원의원 선거에서 7회에 걸친 치열한 공개 토론으로 링컨은 전국적으로 유명해집니다. 노예제를 공개적으로 반대하던 링컨은 우여곡절 끝에 1860년 공화당 대통령 후보가 됩니다.

그러나 그의 당선은 곧 남부와 북부의 분리를 의미했습니다. 노예제가 기반이던 남부의 11개 주는 연방을 이탈하여 남부연합을 결성했고, 4월 섬터 요새를 공격하면서 남북전쟁이 시작됩니다. 전쟁은 처음에는 북군에게 불리하게 돌아갔으나, 1862년 노예해방 예비선언을 통해 국내외 여론을 유리하게 이끌어 외국의 남부연합 승인을 저지하면서 상황이 바뀝니다. 1863년 1월 1일에는 마침내 노예해방 선언을 공포합니다.

그러나 링컨은 전쟁 중 의회에 대한 대통령의 권한 강화 요청, 언론 및 집회의 자유 제한, 분리독립주의자로 의심되면 재판 없이 수감하는 것 등으로 비난받았습니다. 아직 전쟁 중이던 1864년 재선에는 성공했지만 링컨은 다양한 반대자들의 비판에 맞닥뜨려야 했습니다. 반대당인 민주당은 남부연합과 타협해야 한다고 압박했습니다. 공화당 내부에서도 급진파들은 더 강력한 개혁을 원했습니다. 남부의 분리독립주의자들은 그를 적으로 간주했습니다.

전쟁 막바지에 링컨은 전쟁 이후의 국가 재건을 위한 통합정책을 추진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남부연합군 총사령관 로버트 E 리가 항복한 지 6일 후, 연극을 보던 링컨은 암살당합니다. 암살범은 저격 직후 “남부가 복수했다”고 외쳤습니다.

1863년 링컨의 노예해방 선언에도 불구하고 흑인들은 오랫동안 차별받아 왔습니다. 인권 운동가로 유명한 마틴 루서 킹 목사가 활동했던 1960년대까지도 흑인들에 대한 법적, 제도적 차별은 심각했습니다. 마침내 버락 오바마가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으로 취임한 건 링컨이 노예해방 선언에 서명한 지 140년도 더 지난 2009년이었습니다.

#링컨#노예 해방#미국#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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