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사기 피해 일파만파] 두달새 3명째… 청년들 앗아간 전세사기
인천 31세 피해여성 숨진채 발견, “다신 이런 일 없었으면” 유서 남겨
정부 구제대책 별다른 도움 안돼… 집 경매 넘어간 피해자들 벼랑끝
수도권 일대에 주택 2700여 채를 보유한 이른바 ‘미추홀구 건축왕’ 남모 씨(61)에게 전세 사기를 당한 피해자가 17일 새벽 숨진 채 발견됐다. ‘건축왕’으로부터 전세 사기를 당한 20, 30대 청년이 극단적 선택을 한 건 2월 말과 이달 14일에 이어 세 번째여서 추가 희생을 막기 위한 대책이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인천 미추홀경찰서 등에 따르면 17일 오전 1시 22분경 박모 씨(31·여)가 미추홀구의 한 아파트 자택에서 의식을 잃고 쓰러진 채 남자친구에 의해 발견됐다. 호흡이 없는 상태로 인근 병원으로 옮겨진 박 씨는 오전 2시 12분경 사망 판정을 받았다.
현장에선 극단적 선택을 한 흔적과 함께 “전세 사기를 당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으면 좋겠다”는 내용의 유서가 발견됐다. 경찰 관계자는 “타살 혐의점은 없다”고 했다.
박 씨는 2019년 9월 전세보증금 7200만 원을 내고 59.62㎡(약 18평) 규모의 아파트에 입주했다. 하지만 집주인은 이른바 ‘바지 임대인’으로 실소유주는 건축왕 남 씨였다. 또 2017년 준공 직후 채권최고액 1억5730만 원의 근저당이 설정된 상태였다. 근저당 때문에 박 씨는 주택도시보증공사(HUG)의 전세보증금 반환보증보험에도 가입하지 못했다.
여기에 집주인은 2021년 9월 전세보증금을 9000만 원으로 올렸는데 이 아파트가 지난해 3월 경매에 넘어가 박 씨는 전세금을 모두 날리게 됐다. 해당 아파트의 경우 전세보증금이 8000만 원 이상이면 주택임대차보호법상 최우선변제금 지급 대상에서 제외된다. 박 씨가 살던 아파트는 현재 매매가가 1억4000만∼1억5000만 원 수준이어서 경매가 끝나면 한 푼도 못 받고 거리로 내쫓길 상황이었다.
전문가들은 희생자가 추가로 나올 수 있다고 경고했다. 올 2월 기준으로 건축왕 소유의 주택 중 690채가 이미 경매에 넘어갔는데, 나머지 주택들도 순차적으로 경매에 넘어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주민들과 피해자 단체는 “박 씨가 살던 아파트의 경우 전체 60채가 통째로 경매에 넘어갔다”고 전했다. 정부는 지난해부터 여러 차례 전세 사기 대책을 내놨다. 하지만 예방 대책 위주여서 이미 전세 사기를 당해 거리에 나앉기 직전인 피해자들을 구제하기에는 불충분하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난 의지할 부모님도 없다” 유서… 문앞 쓰레기봉투엔 정신과 약봉지
‘인천 건축왕 전세사기’ 3명째 숨져 31세 피해 여성 극단적 선택 추정… “전세사기 아파트 한동 통째 경매” 피해자 집 현관문엔 단수 경고… 9000만원 날리게 돼 대출상환 압박
“나는 전세사기를 당했다. 나는 의지할 부모님도 없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으면 좋겠다.”
17일 동아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이날 세상을 떠난 인천 ‘미추홀구 건축왕’ 전세사기 피해자 박모 씨(31)는 이 같은 짤막한 유서를 남겼다고 한다. 정신적으로 의지할 곳 없는 상황에서 전세사기의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극단적 선택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박 씨와 같은 아파트 주민 A 씨는 “지난주 박 씨를 만났을 때 ‘생업이 바빠 피해자 단체 활동을 돕지 못해 미안하다’고 했는데 세상을 떠났다니 믿기지 않는다”며 “남 일 같지 않다. 나도 더 이상 버틸 힘이 없다”고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건축왕 전세사기 피해자 모임인 미추홀구 전세사기피해대책위원회 관계자는 “박 씨가 숨진 아파트의 경우 한 동 전체 60채가 모두 건축왕 전세사기로 경매에 넘어간 상황”이라며 “현재까지 20채가량이 이미 낙찰돼 세입자들이 쫓겨났다”고 했다.
● 수도요금 독촉장에 대출 상환 압박
이날 오후 동아일보 기자가 찾은 이 아파트 공용 현관에는 ‘전세사기 피해 아파트’란 플래카드가 붙어 있었다. 엘리베이터와 현관 등 곳곳에는 인천경찰청 광역수사대가 수사 중이라는 사실을 알리는 ‘전세사기 수사 중’ 표시와 ‘계약 주의’ 등의 문구가 담긴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전세사기 피해를 당한 주민들이 살던 집이 경매에서 낙찰돼 길거리에 나앉는 걸 막기 위해 매수자 경고용으로 붙인 것이다. 숨진 박 씨의 집 현관문에는 수도 단수 예고장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밀린 수도요금을 내지 않으면 단수한다”는 내용이었다. 문 앞에 놓인 쓰레기봉투에는 정신건강의학과에서 처방받은 약봉투도 있었다.
혼자 살던 박 씨는 최근 경제적으로 힘든 상황이었다고 한다. 주민 한모 씨(53)는 “박 씨가 경제적으로 좋지 않은데 올 9월 전세기간이 끝나면 전세대출까지 갚아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린 걸로 안다”며 “이른 아침에 나가 밤늦게까지 일하면서도 주민들에게 감자탕 같은 걸 나눠줄 정도로 정이 많았다”고 했다. 박 씨가 살던 곳은 14일 숨진 채 발견된 전세사기 피해자 임모 씨(26)가 살던 곳과 불과 걸어서 15분 거리에 있는 곳이다.
● 집주인부터 중개사까지… 한통속 사기에 속아
미추홀구 일대에서 건축왕 남모 씨(61)에게 전세사기를 당하고 2월 말부터 극단적 선택을 한 피해자 3명은 모두 20, 30대였다.
이들이 전세계약을 맺고 입주할 당시 주택에는 각각 1억5730만∼1억9110만 원의 근저당권이 설정돼 있었다. 박 씨가 살던 아파트도 매매가는 1억4000만∼1억5000만 원이었지만 근저당 채권 최고액은 1억5730만 원이었다. 박 씨 역시 근저당권이 있어 전세보증금 반환보증보험 가입도 안 되는 해당 주택 계약을 주저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남 씨의 공범이었던 공인중개사가 “경매에 넘어갈 경우 피해를 변제해 주겠다”고 이행보증서까지 작성해 안심시키는 수법에 속아 넘어간 것으로 전해졌다.
이 아파트에서 만난 한 피해자는 ‘1억 원을 공제하겠다’는 내용이 담긴 보증서를 보여주며 “근저당권에 대해 물었더니 피해 공제 증서를 써줘 믿을 수밖에 없었다. 경매에 넘어간 뒤에야 이런 증서가 아무 효력이 없다는 걸 알게 됐다”고 했다.
● 정부 구제 사각지대에 놓였던 피해자들
건축왕의 피해자 상당수는 최우선 변제를 받을 수 있는 기준조차 근소하게 넘겨 한 푼도 받지 못했다. 박 씨 역시 2019년 7200만 원의 보증금을 내고 계약을 했다가 임대인이 2021년 보증금을 9000만 원으로 올리면서 구제 대상에서 제외됐다. 박 씨가 살던 아파트는 전세보증금이 8000만 원 이하여야 2700만 원의 최우선 변제금을 받을 수 있다.
정부는 지난해 말 최우선 변제 기준을 상향 조정했지만 박 씨처럼 임대차계약 이전에 설정된 근저당권에 대해서는 상향 조정된 기준이 소급 적용되지 않는다. 인천경찰청 관계자는 “기소된 범죄 피해 161건 외에도 계속해서 피해 고소가 이뤄지고 있어 수사를 진행하고 있다”며 “피해자 규모는 계속 커지는 상황”이라고 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