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의 한 중학교에 근무하는 교사 A 씨는 지난해 학교폭력(학폭) 책임교사를 맡은 뒤 정신건강의학과에 다니기 시작했다. 자정까지 이어지는 가해 학생 학부모의 협박 전화와 폭언에 시달린 뒤 극심한 무기력증과 우울증이 생겼다. 그는 “다른 선생님들이 모두 맡기 꺼려서 막내 교사인 내게 업무가 배당됐다. 사람 만나기가 꺼려지니 수업을 진행하는 것도 버겁다”고 말했다.
● 학폭 담당 26%는 기간제 교사
최근 일선 초중고 학폭 책임교사는 교사들 사이에서 기피 보직이다. 사건 조사부터 교육지원청 보고까지 ‘가욋일’이 생기는 데다 가해 학생 측 불복 소송으로 송사에 휘말릴 수도 있다. 정부는 최근 학폭 근절 대책을 발표하면서 “학폭 책임교사의 업무 환경을 개선하겠다”고 밝혔지만, 현장에선 근본적인 개선 대책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다들 기피하는 업무를 저연차 및 기간제 교사들이 떠맡는 경우도 많다. 20일 국회 교육위원회 소속 권은희 국민의힘 의원이 교육부에서 제출받은 ‘학폭 책임교사 현황’에 따르면 올 3월 기준 전국 중고교 학폭 책임교사 6152명 중 기간제 교원 비율은 26.5%(1628명), 5년 차 미만 저연차 교사 비율은 21.9%였다. 그중 355명은 부임 첫 해 학폭 업무를 맡은 새내기 교사였다. 이는 지난해 기간제 교사 비율 23.4%, 5년 차 미만 교사 비율 14.8%보다 높아진 것이다.
● “수사권도 없는데 CCTV 확보까지”
갈수록 지능화, 고도화되는 학폭 사건을 교사가 전담하는 것은 무리라는 지적도 나온다. 학교 밖에서 24시간 내내 지속되는 사이버폭력 등은 경찰도 다루기 까다롭다. 경기의 한 고교 교사는 “학원가에서 발생한 학폭 때문에 폐쇄회로(CC)TV부터, 학생 휴대전화 기록까지 확보해야 했다. 수사권도 없는 교사한테 경찰 역할까지 요구한다”고 말했다.
수업 시수를 30~50% 줄이고, 수당과 승진 가산점을 주겠다는 정부 대책에도 담당 교사들의 반응은 미지근하다. 서울의 한 중학교 교사는 “한 달 8만 원가량 (학폭 담당) 수당을 더 받겠다고 학폭 업무에 지원할 교사는 없다”고 말했다.
학폭 담당 교사들을 가장 힘들게 하는 건 학부모 응대다. 가해 학생 학부모는 학교 대처에 잘못된 점이 있거나 사건의 책임이 학교에 있는 건 아닌지 따지며 법적 대응을 거론하는 경우가 많다. 강원의 한 고교 교사는 “가해자 부모는 ‘내 자식을 범죄자로 몰았다’며 고소하겠다고 협박하고, 피해자 부모는 ‘왜 사안을 은폐하려 하느냐’고 따진다”고 고충을 토로했다.
학폭이 학교생활기록부에 기재되고, 진학 시 불이익이 커지자 피해자의 잘못을 강조해 처벌 수위를 낮추려는 시도도 흔하다. 서울의 한 중학교 학폭 담당 교사는 “가해 학생의 보복성 신고가 이어지면서 3주 동안 14건의 학폭 사건이 접수된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충남의 한 고교 교사도 “가해자의 쌍방 신고가 이어지면서 관련자 15명을 조사한 적도 있다”며 “모든 학부모에게 절차를 안내하고, 보고서를 쓰느라 수업은 거의 포기해야 했다”고 말했다.
● 외부 지원 구체적 매뉴얼 마련해야
전문가들은 학폭 사건 초기부터 관할 교육청 등 외부 기관이 적극 개입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박남기 광주교대 교육학과 교수는 “피해학생 치료와 지원 등 역할을 하는 전문지원기관의 역할을 확대해 교사의 부담을 덜어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최선희 푸른나무재단 상담본부장은 “정부가 학교전담경찰관(SPO) 등으로 구성된 지원단을 구성해 학교를 지원하겠다고 밝혔지만, 경찰 인력 확보가 쉽지 않다”며 “학교에서 외부 자원을 받을 수 있는 구체적인 매뉴얼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권 의원은 “학교 현장에서 학폭 업무를 기피하는 분위기가 지속되는 한 어떤 학폭 근절 대책도 효과적으로 작동할 수 없다”며 “학폭 책임교사제를 보완할 방안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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