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족으로 신분을 위장하고 중국 다롄(대련)의 한 식당에서 일하던 탈북 여성은 한국 대기업 직원으로 중국에 파견된 남자와 우연히 알게 됐다. 둘은 사랑에 빠졌다.
연애 시절 남자가 “꿈이 뭐냐”고 물었다.
“나는 돈 열심히 벌어 지구 한 바퀴를 돌아보는 거예요. 세계 많은 나라들을 구경하고 싶고 세상 사람들은 어떻게 사는지 너무 궁금해요.”
그러자 남자가 “내가 그 꿈을 이뤄줄 수 있다”고 말했다.
이번엔 여자가 “당신의 꿈은 뭐냐”고 물었다.
남자는 “어머니와 함께 목욕탕에 가주는 며느리를 만나고 싶고, 그 며느리와 전국 곳곳을 여행하고 싶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여자는 “나도 그거 할 수 있다”고 화답했다.
2003년 2월 여자는 우여곡절 끝에 한국에 왔고, 5월 하나원을 졸업한 뒤 보름 만에 남자와 결혼식을 올렸다. 그렇게 부부의 인연을 맺은 지 어느새 20년이 흘렀다.
둘은 서로의 약속을 지켰고, 또 지금도 지키고 있다.
아내는 지금까지 30여개의 나라와 해외 유명 도시를 다녀왔다. 그가 결혼했을 때 시어머니는 84세였다. 남편은 40세가 훌쩍 넘어 낳은 막내아들이었다. 결혼 5년 뒤 시어머니는 치매에 걸렸다. 며느리는 시어머니가 97세에 돌아가실 때까지 8년 동안 요양원에 모신 어머니를 매주 찾았다. 요양원에 모시기 전엔 항상 씻겨주고 기저귀를 갈아주며 극진히 모셨다. 부부는 지금도 주말이면 강원도,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로 훌쩍 여행을 떠난다.
그동안 여자는 대학에서 사회복지학을 공부했고,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탈북민의 지역적응교육과 심리 및 진로상담, 취업지원 등을 종합적으로 실시하는 통일부 지정 지역적응센터의 책임자가 됐다.
경기서부하나센터 김성남 센터장의 이야기다. 그의 센터에서 담당한 탈북민만 1600여 명이다.
북한에서 함흥의 놀새라고 불렸던 그가 탈북민 최초의 하나센터장이 돼 다른 탈북민들의 정착을 돕는 오늘까지 걸어온 길은 당연히 순탄치는 않았다.
● 남자 이름으로 태어난 여자
김성남 씨는 1975년 함경남도 흥남에서 6녀 1남 중 넷째로 태어났다. 1970년에 맏언니가 태어나고, 1985년에 남동생이 태어났다. 줄줄이 딸들이 태어나면 부모들이 실망할 법도 하지만, 그의 부모는 항상 기뻐했고 축복했다.
그를 임신했을 때 어머니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서 호랑이가 나무에서 노는 것을 보며 박수를 치는 태몽을 꾸었다. 이번엔 분명히 남자 아이일 것이라고 생각한 부모는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 미리 이룰 성(成)에 사내 남(男)으로 이름을 지었다. 그런데 또 딸이었다.
지어놓은 이름을 바꾸면 좋지 않다고 해서 그는 김성남이란 남자 이름으로 살게 됐다. 7명의 자녀가 북적이는 집안이었지만, 집안 형편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아버지는 흥남비료연합기업소 후방부 노동보호물자공급소 지도원이었다. 수만 명의 노동자들이 소속된 큰 공장의 물자를 담당하다보니 먹고 사는 것은 지장이 없었다.
김 씨의 학창 시절도 큰 시련은 없었다. 공부도 잘해 학교에서 학급반장, 사로청 부위원장 등을 도맡았고 하도 잘 놀아 ‘함흥 놀새’라고 불리기도 했다. 6명의 자매가 같은 학교를 다니다보니 시비 거는 애들도 없었다.
하지만 김 씨는 졸업반이던 6학년 때 높은 곳에서 떨어져 허리를 다치는 사고를 당했다. 반년 동안 학교에 나가지 못하고 쌍지팡이에 의지해 살아야 했다. 그러다보니 대학은 물 건너갔다. 학교에서는 유급을 해 1년 더 다니라고 했지만 그는 거절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북한에서는 1년 유급한 학생은 ‘묵은 돼지’라고 놀림감이 되기 일쑤였다. 졸업장을 받고 몇 달 뒤 그는 6시간이나 걸리는 대수술을 받고 다시 걸을 수 있게 됐다.
수술을 받고 회복하면서 집에서 보내던 때, 속도전청년돌격대 간부로 있던 고향 오빠가 신입대원 모집차 출장길에 집에 들렀다가 자기 부대에 가자고 하였다. 김 씨는 학창 시절 클라리넷을 잘 불었는데, 그 오빠는 김 씨도 어릴 적부터 알고 있던 자신의 친구가 부대장으로 있는 여단 예술선전대에 입대해 연주를 할 수 있다고 했다. 당시 노력파견장을 개인적으로 소지하고 있었기에 김 씨는 18세 때인 1993년 속도전청년돌격대 8여단에 개별 입대했다.
속도전청년돌격대는 북한에서 도로, 발전소, 철도, 아파트 등 중요 시설을 도맡아 건설하는 청년조직이다. 건설부대지만 군 편제와 똑같이 운영되며 제복과 군사칭호까지 부여받는다. 복무기간도 군과 똑같다. 여성들도 중학교를 졸업하고 만 16~17세에 입대하면 23세까지 복무해야 한다.
속도전청년돌격대의 입대 자격은 군에 입대하는 것보다 비교적 덜 까다롭다. 출신 성분이 나쁘거나 키가 작은 등 신체 기준에 미달돼 군에 가지 못한 청년들이 주로 돌격대에 입대한다. 비록 입대 기준은 떨어져도 어렵고 힘든 곳에서 고생했다고 제대할 때는 가산점을 많이 주기 때문에 일반 사회생활을 하는 것보다는 노동당에 입당하거나 대학에 추천받는 것이 비교적 용이하다. 가난한 집에선 ‘입을 덜기 위해’ 자식을 돌격대에 보내는 경우도 많다.
● 속도전청년돌격대의 여성들
김 씨가 입대했을 때 8여단은 평북 구장~구성 사이 철도공사를 진행하고 있었다. 8여단의 전신은 옛 함경남도 여단이었다. 그래서 신입대원들을 제외한 지휘관들과 베테랑 대원들은 모두 함남 출신이었다. 김 씨는 선전대로 가는 줄 알았지만, 막상 입대하니 명령에 따르는 신입이었을 뿐이다. 여단으로 가는 길 중간에 잠시 머물게 된 5대대 지휘부에서 갑자기 공석이 된 5대대 통계원 자리를 맡게 됐다.
통계원이 하는 일은 각 중대의 통계원들로부터 작업일보를 받아 정리하고, 월급을 계산해주고, 환자나 휴가자 등을 파악해 일지를 작성하는 것이었다. 통계원은 대대 간부들의 심복이 돼야 했다. 휴가나 사적 용무로 부대에 없는 사람도 있는 사람처럼 만들어야 위에서 물자 공급을 그대로 받을 수 있고, 그렇게 받은 물자는 간부들이 빼돌렸다.
통계원 생활 중 가장 고달픈 일은 여단에 보고하러 가는 일이었다. 전화로 보고하면 간단한 일이지만, 그때는 전화가 없었다. 여행증 등 서류도 주고받아야 하기 때문에 통계원이 연락병 역할도 했다. 대대 지휘부에서 여단 지휘부까지 왕복 110리가 됐는데 보통 이틀에 한 번, 어떤 때는 매일 지휘부에 가서 보고해야 했다. 통계원 전용 자전거가 있다고 들었는데, 그가 갔을 때는 누군가 팔아먹어 없었다.
지나가는 차를 잡아타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그렇지 못할 때는 새벽에 떠나 산길을 꼬박 걸어 여단에 가서 보고한 뒤 다시 밤길을 타고 돌아와야 했다. 저녁까지 대대 지휘부에 도착할 것 같지 못하면 어깨까지 잠기는 강을 건너 물주머니가 돼서 돌아오기도 했다.
이렇게 어려워도 중대에 소속된 여성들보다는 통계원 생활이 나았다. 그의 대대는 250여명으로 구성됐는데, 이중 90명 정도가 여성이었다. 돌격대에선 여성도 남자와 똑같은 강도로 일을 해야 했는데, 보통 남성 2명에 여성 1명으로 작업조가 구성된다. 김 씨가 근무할 때는 철길 공사를 하느라 산에서 통나무를 찍어 메고 나르는 일, 발파를 하고 나온 돌을 등짐으로 나르는 일을 주로 했다. 김 씨는 “돌격대에 나간 여성 대다수가 너무 힘들어 몇 개월씩 생리가 끊긴다”고 회상했다.
여성들에게 가장 힘들 때는 여름이었다. 선풍기도 없는 임시숙소에서 30여명이 함께 생활했는데, 너무 더워 숨이 막힐 지경인데다 밤새 산골 모기에게 뜯겨야 했다. 작업복 여분도 기껏 해야 한 벌뿐이라 장마철이면 늘 젖은 옷을 입고 일하러 나가야 했다. 하루 세끼 밥은 주었지만 늘 배가 고팠다.
영양실조 환자도 종종 나왔다. 통계원으로 일했던 김 씨는 그럴 때마다 대대 비상용 쌀을 빼내 이들에게 밥을 해먹이기도 했다. 대원들에게서 가장 큰 박수를 받았던 때는 출장 나가는 이웃 군부대 차량을 빌려 수백 명이 산에다 채벌해놓은, 작업현장까지 내려오려면 며칠간 해야 할 목재운반 작업을 몇 시간 만에 끝냈을 때였다.
그는 워낙 열심히 일했던데다 여단 간부지도원의 추천으로 입대 2년 만에 청년동맹 간부들을 양성하는 금성정치대학 추천장을 받아 조기 제대해서 고향으로 돌아왔다.
● ‘왜가리떼’를 벗어나 탈북하다
김 씨가 대학 추천을 받고 2년 만인 1995년 집에 돌아왔더니 그새 집이 너무나 가난해져 있었다. 그가 입대한 이듬해에 아버지가 병 때문에 직장을 그만두었던 것. 맏언니는 결혼을 했지만, 병에 걸린 아버지와 둘째 언니를 포함해 온 식구가 여전히 한 집에서 살고 있었다. 마침 그때 북한은 ‘고난의 행군’ 시기를 맞아 도처에서 사람들이 굶어죽기 시작했다.
대학에 갈 형편이 되지 않았다. 애초에 김 씨가 대학 추천을 받은 것도 돌격대에서 제대하기 위한 목적이 컸지 청년간부가 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결국 집에 눌러앉았다. 그렇지만 북한에선 누구나 취직을 해야 했기 때문에 그는 아버지 직장이었던 흥남비료연합기업소 촉매 직장에 들어갔다. 당시 북한의 많은 공장, 기업소들이 가동을 멈추었지만 비료공장은 간간히 돌아갔다.
당장 굶어죽게 된 사람들은 공장에서 닥치는 대로 훔쳐 팔았다. 비료공장도 예외는 아니었다. 생산했다고 보고한 양과 실제 출고되는 양은 차이가 컸다. 어떤 날은 한 교대가 생산했다고 기록한 수백㎏의 질안비료가 하나도 남지 않고 사라지기도 했다. 공장 보위대가 노동자들의 출입을 단속하긴 하지만 사실 이들도 뇌물을 받고 눈을 감아주는 것으로 먹고 살아야 했다.
김 씨가 들어간 합성촉매 직장에서는 연, 아연, 순철(순도 100% 철)과 니켈, 바나듐, 크롬 등 희귀금속을 주원료로 다루었는데 이것도 남아나지 않았다. 당시 니켈 1㎏은 450원이었는데 이걸 빼돌려 시장에 팔면 한 달은 먹고 살 수 있는 옥수수 18㎏을 살 수 있었다.
공장에서 3년쯤 일했던 때에 직장에서 니켈 150㎏이 갑자기 사라지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 정도 양이면 분명 간부들이 빼돌렸을 법도 한데, 당 비서가 김 씨를 도둑으로 몰아가며 희생양을 삼으려 했다. 그는 당 비서와 대판 싸우고 직장을 그만둔 뒤 함경남도 간호학교에 입학했다. 허리를 다쳤을 때 입원했던 병원이 그를 좋게 봐줘 추천 서류를 써준 것이다.
간호학교에 입학했지만 정작 가보니 학교에선 학업을 가르치는 시간보다 부업 밭으로 데리고 가서 농사일을 시키는 시간이 더 많았다. 개학한 지 몇 개월 되지도 않은 때 학교에서 각종 ‘과제’를 줘 집으로 보냈다. 과제란 식량, 휘발유, 경유, 약초를 구해오라는 따위였다. 방학 한 달을 주며 과제를 받고 집으로 왔지만 준비하기 만만치 않은 큰 부담이었다.
고민을 하던 어느 날 거리에서 중학교 선생 딸인 학교 동창을 만났다. 그를 보자 동창은 자기 집이 얼마 전에 중국의 친척 도움을 받았다며 “너도 엄마 친척이 중국에 있지 않냐”고 묻는 것이었다. 김 씨 모친은 중국 연고자였다. 옌지(연길)에 친척들이 살았다.
동창을 만난 뒤 김 씨는 중국 친척들에게 도와달라고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는 언니와 함께 여행증을 떼서 북중 세관이 있는 함경북도 온성군 남양으로 향했다.
남양에 가니 숱한 사람들이 북중 다리 주변에 모여 있었다. 이들을 북한에서 ‘왜가리’라고 불렸다. 하루 종일 목을 빼고 중국에서 친척이 오나 바라본다고 해서 붙은 별명이다. 김 씨도 왜가리떼에 합류했다.
어렵게 연길에 사는 친척과 연락이 됐다. 그런데 그들은 여권에 한국에 다녀 온 기록이 있어 북한 세관에서 입국을 허용하지 않으니 지원물자를 갖고 올 수가 없다고 했다.
막연하게 기다리다가 갖고 온 돈도 다 떨어지게 되자 김 씨는 직접 강을 건너가 친척을 만나고 오자고 마음을 먹었다. 한 달 가까이 남양 세관 주변에 머물러 있으면서, 조기작업에 동원 다녀오면서 국경경비대 잠복초소가 어디에 있는지 하나하나 기억해두었다.
1998년 6월 26일 새벽 3시, 그는 언니에게 “내가 열흘 안에 오지 못하면 다시 함흥에 돌아가라”고 말하고 다짜고짜 두만강에 뛰어들었다. 그때만 해도 김 씨는 자신이 다섯 번이나 두만강을 넘게 될 줄 생각도 못했다.
● 돈만 밝히는 국경경비대
남양 맞은편은 중국 도문이었다. 그는 중국에서 첫 번째 만난 사람에게 친척을 찾도록 도와주면 후하게 사례를 하겠다며 도움을 요청했고, 오후 1시경 연길의 친척집에 도착했다. 그런데 믿고 찾아온 친척집은 그를 데리고 온 사람에게 차비만 겨우 줘서 돌려보냈다. 친척들이 모여 의논을 하고 북한으로 보낼 준비를 하느라 시일이 걸리다보니 언니와 약속한 열흘이 훌쩍 넘었다.
7월 중순까지 친척들이 모아준 것은 인민폐 400위안과 100리터 정도 부피의 중고 옷들, 사카린과 미원 등 조미료들이었다. 짐 보따리를 들고 그는 밤에 다시 두만강에 뛰어들었다.
그런데 강이 생각보다 깊었다. 한 번 넘어지니 보따리가 물에 둥둥 떠내려갔는데 그걸 놓치지 않겠다고 사투를 벌였다.
죽을 힘을 다해 북한 쪽에 도착하긴 했지만 보따리가 물에 푹 젖어 감당할 수 없는 무게가 됐다. 그는 강기슭에 기진맥진해 쓰러졌다. 어느새 국경경비대 군인 두 명이 나타나 총을 겨누었다. 군인들은 그를 잡자마자 돈부터 내놓으라고 했다.
김 씨는 여비 중에 남겼던 북한돈 250원을 주었다. 당시 장마당에서 빵 1개가 5원, 옥수수 국수 한 그릇이 10원을 했으니 적은 돈은 아니었다. 그 돈을 받고도 군인들은 그를 중대 막사로 끌고 갔다. 이번엔 중대장이 돈이 있느냐부터 물었다.
없다고 하자 그를 비 내리는 부대 마당 한쪽에 세워두고 그의 짐을 뒤지기 시작했다. 한참 뒤 다시 끌려 들어가니 갖고 온 짐의 3분의 1이 사라졌다. 돈 되겠다고 생각한 것들을 빼돌린 것이다. 이후 그는 몸수색을 당했는데 속옷 혼솔까지 샅샅이 뒤지며 돈을 찾아내려 하는 모습을 보며 23년 동안 살면서 최대의 수치심을 느꼈다.
그 과정을 끝내고 그는 대대로 이송됐다. 같은 과정이 반복됐다. 이번에도 짐이 대거 사라져 3분의 1 정도만 남았다. 대대 본부로 가니 밤새 강을 넘다 걸린 사람이 그를 포함해 3명이었다. 국경경비대에서는 이들을 온성 보위부로 이송했다.
남양에서 온성군 보위부로 가는 길은 수십 리나 됐는데 군인 두 명이 이들의 호송을 담당했다. 가는 길에 한 군인이 이들에게 말했다.
“돈 꽁꽁 숨겨둔 것 있으면 이제라도 꺼내놓는 게 좋아요. 어차피 보위부에 가면 다 뺏기게 돼 있어요.”
김 씨도 그의 말이 맞다고 판단했다. 그가 갖고 온 인민폐 400위안은 아직 3분의 1만 남은 짐 속에 기적적으로 숨겨져 있었다. 중국에서 떠나기 전 그는 돈을 어떻게 숨길까를 고민하다가 중고 옷 중에서 가장 빼앗기지 않을 것 같은 허름한 옷 속에 교묘하게 숨기고 바느질을 했던 것이다. 그는 호송 군인에게 가만히 속삭였다.
“내가 인민폐 400위안이 있는데 이걸 보관해주면 절반을 드릴게요. 어차피 나는 중국에 며칠 있지도 않았고, 스스로 돌아왔기에 크게 처벌을 받지 않을 거예요.”
군인의 안색이 밝아졌다. 어차피 400위안을 그가 혼자 가질 수는 없었다. 김 씨가 고발하면 그도 처벌을 받게 되기 때문에 공모자가 되는 것이 가장 이득이었다. 200위안만 가져도 군인은 빵 1000개는 넘게 사먹을 수 있었다. 군인은 “보위부에서 나오면 남양 아무개 집에 와서 나를 찾으라”고 하고는 동행한 일행들이 모르게 옷을 뜯어 돈을 감추었다.
보위부에 들어가니 몽둥이부터 날아왔다. 돈도 없이 왔다니 보위원이 더 화가 난 듯 보였다. 매를 맞아 피를 흘리는 와중에도 김 씨는 남은 짐을 뒤지는 보위원이 불쌍하게 느껴졌다. 국경경비대 중대에서 빼먹고, 대대에서 빼먹고 남은 제일 한심한 옷이 보위원 차지가 됐기 때문이었다. 보위부에선 남은 짐까지 몽땅 빼앗았다.
마침 김 씨에겐 운도 따랐다. 며칠 뒤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가 있어 보위부에선 중죄라고 판단되지 않으면 투표를 하라고 내보냈던 것이다. 김 씨는 중국에 친척 도움을 받으러 갔던 것이 확실하고, 며칠 머물지도 않았다. 자기 발로 북한에 다시 돌아왔으니 보위부에선 감옥에 보낼 정도는 아니라고 판단했다.
보위부에서 나오자마자 그는 군인이 알려준 집을 찾아갔다. 군인은 약속을 지켰다. 200위안을 넘겨주더니 자기 몫은 장마당에 가서 북한돈으로 바꿔달라고 했다. 군인이 중국돈을 바꾸면 의심을 받기 때문이다. 돈을 바꾸어 넘겨주자 군인은 싱긋 웃으며 “앞으로 중국 넘어갈 일이 있으면 나를 찾으라”는 말을 남기고 헤어졌다.
● 악어와 임팔라의 추격전
김 씨는 보위부에 끌려들어간 순간부터 석방되면 꼭 중국에 다시 가겠다고 결심했다.
“힘들게 갖고 간 짐을 빼앗기지 않았다면 저는 탈북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런데 먹을 것도 주지도 않으면서, 힘들게 중국에서 도움을 받아 자기 발로 조국이라고 돌아갔는데 강도떼처럼 달라붙어 뜯어내고 때리고 수치심을 주니 사람이 눈이 돌아가더군요. 이런 나라를 위해 내가 지금까지 충성을 바치겠다고 생각했던 것이 너무나 억울했습니다.”
한국에 온 탈북민 중에는 김 씨처럼 안전부나 보위부 때문에 원한을 품고 북한을 뜬 사람이 정말 많다. 그런 측면에서 북한 보위부는 체제를 보위하는 것이 아니라, 체제에 등을 돌리는 사람을 만드는 곳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 씨는 다시 무작정 강을 넘었다. 남양 세관 쪽에 왜가리들이 머물러 있다면, 두만강 건너편엔 먹이가 다가오길 기다리는 악어처럼 인신매매범들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오토바이를 타고 두만강 옆을 순찰하듯 돌아다니기도 하고, 밤중에 누가 건너오나 쌍안경으로 감시하기도 한다.
여성이 넘어오는 것이 보이면 접근해 강제로, 또는 유혹해서 내륙에 팔아먹는다. 중국에 아는 사람이 없으면 이런 인신매매범을 통해서라도 팔려가려는 탈북여성들이 많았다. 그게 북한에서 굶어죽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했다.
두 번째 도강 때는 첫 번째보다는 요령이 생겼다. 갈아입을 옷까지 준비해 강을 넘었다.
밤에 강을 건너 옷을 갈아입고 도문 시내로 접근하는데 한 중년 남자가 “어이, 처녀. 조선에서 넘어왔지”라며 불렀다.
둘 사이 거리를 따져보니 도망치면 따돌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냅다 뛰었는데, 중년 남자가 죽을힘을 다해 따라왔다. 북한 여성 한 명을 팔면 최소 수천 위안이고, 젊은 여성은 더 비쌌다. 남자에겐 1년 공장에서 벌 돈보다 더 많이 벌 수 있는 기회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상대는 속도전청년돌격대에서 하루에 110리씩 걸어 다니던 통계원이었다.
새벽 도문 거리에선 악어와 임팔라의 추격전을 연상케 하는 질주가 벌어졌다. 추격전은 김 씨의 예상대로 끝났다. 2~3㎞쯤 헐레벌떡 따라오던 중년 남자는 마침내 포기했다. 김 씨는 도문 시내 시장 골목 사이를 달려 처음 왔을 때 강을 넘는데 도움을 줬던 집에 무사히 도착했다.
● 당간부의 지시로 집을 뺏기다
중국에 살기로 마음먹은 김 씨는 친척집에 머물며 재봉기로 바지 오버로크를 치는 일부터 시작했다. 바지 하나를 완성하면 인민폐 2위안이었다. 그런데 도무지 돈이 벌리지 않았다.
그는 식당에 나가 일했다. 그런데 한 식당에서 몇 달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북조선 여자인 것 같다는 의심을 받으면 깡패들이 나타나 떠보기 시작했다. 이들의 목적 역시 팔아먹는 것이었다. 그때마다 그는 도망을 쳤다. 양꼬치집, 순두부집 등등을 전전하다가 연길에선 도무지 살 수 없다고 판단해 2000년 대련으로 옮겨갔다.
2년 동안 번 돈으로 그는 중국 호구를 얻었다. 당시 중국에선 사망한 사람의 호구를 파는 일이 빈번했는데, 탈북자들은 그런 호구를 사서 신분을 세탁했다.
대련에서 그는 조선족으로 위장하고 식당에서 일했다. 이때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대기업 직원인 남편은 중국에 현장소장으로 파견돼 일했는데 조선족 통역이 한국말이 통하는 여성이 있는 식당이라며 그를 데리고 왔다.
남편은 그를 한참동안 조선족 여성으로 알았다. 둘 사이에 사랑의 감정이 싹트고 남자가 한국에 가서 나랑 결혼하자고 말하자 그는 그제야 자신이 탈북여성임을 고백했다.
그러자 남자는 며칠간 침묵하다가 갑자기 한국으로 돌아갔다. 남자는 따로 생각이 있었지만, 김 씨는 알지 못했다. 자신이 탈북 여성이라서 도망간 것이라고 오해하기도 했다.
이때 북한에서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김 씨에게 날아들었다. 그는 고향에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가서 살 생각은 없지만 아버지 묘는 꼭 가보고 싶었고, 아버지 장례를 도와준 사람들에게 사례를 하고 싶었다.
그는 중국에서 모은 돈과 애인이 돌아가기 전에 한국행 준비에 쓰라고 준 돈을 포함해 5000달러를 갖고 연길을 거쳐 다시 밤에 두만강을 넘었다. 이번엔 돈이 있으니 군인을 매수할 능력이 됐다.
함흥에 나타나니 당장 보위부와 안전부 등에서 그를 찾아와 조사를 했다. 그런데 운이 좋게도 이번에도 체포되진 않았다. 당시 김정일이 “고난의 행군 시기에 먹고 살기 어려워 탈북했다가 제 발로 돌아온 사람은 처벌하지 마라”는 지시를 하달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 지시의 유효기간은 몇 년밖에 되진 않았다.
김 씨의 경우엔 두만강을 넘어와 체포된 것도 아니고, 제 발로 함흥까지 돌아왔으니 더 처벌할 근거가 없었다. 보위부나 안전부는 그가 돈을 얼마 갖고 왔는지에만 관심이 있었다.
김 씨는 고향에서 3개월을 머물렀다. 원래 그렇게 오래 머물 생각은 없었는데, 그가 없어진 뒤 가족들이 사망신고를 해 공민증이 말소됐다. 공민증이 없으니 여행증을 뗄 수 없었고, 여행증이 없으면 북중 국경 쪽으로 다시 갈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3개월이 지루했던 것은 아니었다. 이제 떠나면 다시 돌아올 것 같지 못한다고 생각하니 가족과 있는 시간이 아깝지는 않았다.
있는 동안 그는 큰 집을 사서 이사했다. 기존에 살던 집은 결혼한 언니에게 주고, 자신이 떠난 뒤에 가족이 살 집을 따로 산 것이다. 집을 사는데 든 돈은 북한돈 10만 원인데 달러로는 300달러 정도였다. 그가 갖고 간 5000달러는 함흥에서 괜찮은 집 20채를 살 돈이었다. 이사를 한 다음날 그가 어디에 갔다가 돌아오니 온 가족이 집에서 쫓겨나 거리에 나앉아 있었다. 알고 보니 시당 간부의 지시로 딴 사람이 들어온 것이다. 김 씨는 그 집을 사서 입사증 명의까지 변경했지만, 당 간부의 지시 하나로 집 산 돈도 찾지 못하고 빼앗긴 것이었다.
항의를 해봤지만 시당 간부부에선 “당의 방침에 따라 필요한 사람에게 주는 건데, 어디 중국에서 벌어온 돈으로 감히 까부냐”는 식의 태도를 보였다. 김 씨는 중앙당 조직부 신소과(민원 담당 부서)에 편지를 썼다. 편지를 보낸 뒤 바로 중국으로 떠났다. 그 땅에 더욱 환멸이 났다. 돈이면 다 되는 세상이라 국경경비대는 돈만 주면 지옥까지도 데려다 줄 기세였다.
● 정착 보름 만에 올린 결혼식
중국에 도착한 날 그는 한국에 돌아간 애인에게 전화를 했다. 이러이런 고생을 겪었고 지금 국경을 넘었다는 말과 함께 당신이 너무 보고 싶다고 했다.
그러자 남자도 심경을 고백했다.
“사실 처음에 너무 겁이 났다. 나는 북한 여자가 내 아내가 될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결국 내가 이 여자를 지켜줘야겠다고 생각했다. 한국으로 돌아가 당신을 데려올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려 했다. 그런데 이내 연락이 끊겼다. 못 만나는 줄 알았다. 어디서든 살아있어 주기만을 간절히 바랬다. 연락이 되지 않을 때 나는 당신의 본명도, 어디 출신인지도 묻지 않았던 것이 너무 후회가 됐다. 이제 왔으니 됐다. 내가 내일 중국에 들어가겠다.”
약속대로 남자는 다음날 대련에 날아왔다. 요즘은 한국에 사는 탈북민이 적지 않고, 관련 프로그램도 많아 탈북여성은 더 이상 낯선 사람이 아니지만, 2002년만 해도 한국 사람이 북한 사람과 결혼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때 중국에서 만난 탈북 여성을 아내로 삼기로 결심한 김 씨의 남편은 탈북여성과 결혼한 수많은 한국 남성들의 원조쯤 된다고 할 수 있다.
한국으로 갈 방법을 찾고 있던 중 김 씨는 공안에 체포됐다. 누군가 그를 북한에서 온 여자라고 신고한 것이다. 그는 공안 구류장에 50일이나 잡혀 있었다. 하지만 애인과 친척, 친구들의 노력으로 북송은 되지 않았다.
공안국에서 풀려난 그는 위조여권을 사서 베이징 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태국으로 갔다. 한국으로 가는 것보다는 태국으로 가는 것이 검사가 많이 느슨했기 때문이다. 태국에 도착한 그는 한국대사관을 찾아갔고, 2003년 2월 마침내 한국에 도착했다. 조사를 마치고 하나원을 나오니 5월이 됐다.
그는 남자와 결혼식부터 올렸다. 하나원을 나와 보름 만에 결혼식을 한 사람은 김 씨가 유일할 것이다. 그때 그의 나이는 28세였다.
한국 정착 초기 그는 간호조무사학원을 다닌 뒤 병원에 취직했다. 한편으론 남편과 약속한 시어머니와 목욕탕을 다니는 며느리 역할도 충실히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고민도 생겼다. 가장 큰 고민은 애가 생기지 않는 것이었다. 병원에 가 보니 둘 다 이상이 없다고 하는데 몇 년이 돼도 아이는 생기지 않았다. 스트레스를 받는 아내에게 남편은 늘 이렇게 말하며 달랬다.
“나는 당신을 한국에 데려온 걸로 꿈을 이뤘으니 이제 더 욕심을 부리지 않을 거다. 애는 하늘이 점지하는 것이니 순리대로 따르자.”
결혼 초기 남편이 물었다.
“이제 열심히 돈을 모아 집 사고 빚 갚으며 살거냐, 아니면 집이 없어도 하고 싶은 걸 하고 살거냐.”
김 씨는 서슴없이 후자를 택했다. 그는 임대주택에서 사는 지금도 집 욕심은 없다. 그렇다고 번 돈을 혼자만 다 쓰는 것도 아니다.
부부가 매년 500만 원 넘게 기부를 해온지 벌써 10년이 넘었다. 남편은 북한 인권이나 유엔 아동에 관심이 있어 그곳에 기부하고, 김 씨는 여성 인권과 다문화 가정, 학교 장학재단에 기부한다. 남편의 소원인 부부 동반 여행도 꾸준히 하는데, 금요일 저녁이면 남편과 함께 국내 여행을 떠나는 게 일상이 됐다.
● “손이 떨리는 날까지 봉사할게요”
김 씨가 사회복지학으로 박사까지 받은 것은 전적으로 하나원에 있을 때 자원봉사자로 만난 두 살 위의 한 여성 때문이었다.
“저는 그 언니를 만나 사랑한다는 것, 배려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웠어요. 자기 종교를 강요하지도 않고, 주변에 좋은 영향을 주고, 다른 사람들을 꿈꾸게 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어요. 그래서 나도 저 언니를 롤모델로 삼아 사회복지 전문가가 되겠다고 마음먹었어요.”
김 씨가 만난 여인은 이민영 고려사이버대 사회복지학과 교수인데, 지금도 친자매처럼 지내고 있다.
어느 날 이 교수는 김 씨에게 자기 모교인 이화여대를 구경시켜주었다. 그때 김 씨는 이 대학에 입학해 배우겠다고 약속했다. 당시 이화여대에는 학부 과정에 사회복지과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2008년 그리스도신학대(현 강서대)에 입학해 학부 과정을 마쳤다. 김 씨는 북한에서 학교를 다닐 때부터 공부에는 자신이 있었다. 그는 학부 과정을 4년 만에 마치고 2012년 이화여대 사회복지전문대학원에 입학하여 2015년 석사를 마쳤다. 2016년 석사과정 양옥경 지도교수의 권유로 박사과정에 등록해 2019년 박사학위까지 받았다.
박사 논문 제목은 ‘북한 이탈주민의 영국 이주생활 경험’이다.
“2013년에 영국에 갔던 적이 있어요. 그곳에 수백 명의 탈북민이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한 명이라도 만나 왜 한국을 떠나 다시 제3국에서 살아가는지 이야기를 듣고 싶었어요. 그런데 단 한 명도 만나지 못했어요. 그때 결심했죠. 내가 꼭 영국에 다시 와서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봐야겠다고요.”
그는 자신이 하고 싶었던 것을 박사 논문으로 풀어냈다. 이번에는 영국에 날아가 30~40명의 탈북민을 심층 인터뷰했는데, 이는 탈북민의 시각으로 탈북민들의 ‘탈남’ 이후를 들여다본 최초의 시도라는 평가를 받았다.
박사학위 취득 후 북한인권정보센터(NKDB) 연구위원으로 일하면서 탈북민의 북한과 제3국에서의 인권침해 실태 조사 분석 및 기록, 대한민국에서의 경제활동 실태 조사 연구 등의 활동을 계속 진행했다. 그러다가 2021년 1월 경기서부하나센터 사무국장으로 취직했다. 그는 담당 지역인 경기도 부천, 광명, 시흥, 안양, 과천 등지를 돌아다니며 열심히 탈북민의 고충을 듣고 도왔다. 그리고 그해 8월 센터장으로 임명됐다.
한국에는 25개의 하나센터가 있는데 탈북민이 센터장이 된 것은 그가 처음이다. 그의 센터에는 9명이 근무하는데, 이중 4명이 탈북민이다.
김씨는 일하면서 가장 안타까운 것은 잘 살려고 한국까지 와서는 알코올, 마약, 도박에 빠지거나, 각종 범죄에 연루되어 정착을 포기한 탈북민이라고 했다. 그런 사람들을 수렁에서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는 것이 그의 당면 목표다.
꿈꾸는 미래는 어떤 것이냐고 묻자 그는 씩 웃으며 대답했다.
“아주 간단해요. 일단 매일 최선을 다하고, 손이 떨리는 때까지 다른 사람을 도우며 모두 함께 미소 지으며 행복한 삶을 사는 게 인생 목표입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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