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림대 정범모 교수 추모 심포지엄
대학은 새로운 유형 질문 던지고, 희소 고품질 교육 자료 확보해
챗GPT 생성형 AI 시대 대비해야… 인공지능 기술 의존도 높아질수록
‘사제동행’ 사회적 가치 중요해져
“21세기는 디지털 혁명 덕분에 20세기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문명으로 전환되고 있다. 대학이 이런 변화를 거부하면 19세기 말 근대화 물결을 거부했던 조선의 유생과 같은 비난을 면치 못하게 될 것이다.”
염재호 태재대 총장은 3일 강원 춘천시 한림대에서 열린 ‘운주 정범모 교수 추모 학술 심포지엄’에서 이같이 말했다. 이날 심포지엄은 ‘인공지능(AI) 시대 한국 대학의 미래와 혁신방안 탐색’을 주제로 열렸다. 한국 교육계의 거목이자 한림대 2대 총장을 지낸 정범모 교수(1925∼2022)를 추모하기 위한 행사로, 정 교수의 교육 정신과 학문적 업적을 기리고 계승·발전시키기 위해 마련됐다.
● “AI 시대, 대학 간 개방으로 한계 넘어야”
이날 ‘디지털 문명시대의 고등교육 패러다임 대전환’을 주제로 기조 발제를 맡은 염 총장은 교수학습 방법이 완전히 바뀌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객관적이고 세분된 전공 지식은 대학의 전통적인 지식 전수 방식보다 디지털 미디어를 통해 훨씬 효과적으로 학습될 수 있다”고 했다.
주제 발제를 맡은 이정동 서울대 공과대학 교수도 AI 시대를 맞아 교육의 핵심이 바뀌었다고 설명했다. “많은 지식을 보유하는 것은 더 이상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차별적인 능력이 아니다”라며 “축적된 지식을 암기하는 능력이 아니라 새로운 유형의 대답이 나오도록 고유한 질문을 던지는 능력이 핵심”이라고 말했다.
참석자들은 고등교육의 대전환을 위해서는 대학이 먼저 변화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염 총장은 △교육 중심의 학부 체제 개편 △학생 성공을 위한 맞춤형 교육 △유럽의 볼로냐 프로세스와 같은 동북아 대학연대 등 글로벌 협력 △평생교육 강화가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볼로냐 프로세스는 영국, 프랑스, 독일 등 29개 유럽 국가들이 모여 단일한 고등교육 제도를 설립해 유럽 고등교육의 경쟁력을 높이고자 하는 협의체다.
챗GPT와 같은 생성형 AI의 시대를 맞아 대학이 한국어로 된 지식을 관리하고 발전시키기 위한 주도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다. 지금까지 지식이 저장되고 유통되는 방법이었던 책, 문서, 웹, 사람은 생성형 AI와 같은 대규모 언어 모델로 전환되고 있다. 이에 언어 주권과 학문 주권을 지키기 위해 모국어에 기반을 둔 대규모 언어 모델의 중요성이 커지는 상황이다. 박섭형 한림대 소프트웨어학부 교수는 “대학은 희소 고품질 교육·연구용 자료를 확보하고, 대규모 언어 모델에서 이를 활용할 수 있는 기반을 구축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조영헌 고려대 역사교육과 교수는 대학이 현재의 ‘취업사관학교’가 아니라 본래의 목적인 학문의 요람으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전공별, 학과별, 학교별 칸막이를 없애야 한다고 조언했다. 조 교수는 “플랫폼 대학 생태계를 통해 개별 대학이 서로 개방하고 연결한다면, 각 대학이 가진 한계를 뛰어넘어 새로운 학교 경영 및 다양한 교육 모델이 만들어진다”고 말했다.
AI 기술이 발전될수록 교수와 제자, 학생과 학생 간 관계의 중요성도 커지고 있다. 박 교수는 “AI 기술이 발전할수록 이에 대한 의존도는 높아지고, 인간의 사회적 상호작용과 관계 형성을 저해할 가능성이 크다”며 “정 교수의 교육 원칙인 ‘사제동행’(교수와 학생이 서로 가르침을 주고받는다는 의미)의 가치가 더 중요해진 것”이라고 덧붙였다.
● “운주의 생애, 후학 가는 길에 큰 이정표”
한림대와 태재대는 이날 심포지엄에 앞서 고등교육 혁신과 글로컬(글로벌+로컬) 파트너십 구축을 위한 상호협력 협약식을 맺었다. 두 대학은 혁신적 글로컬 대학으로 나아가기 위한 비전 및 전략을 함께 수립하고 교육 플랫폼 및 소프트웨어(SW)를 공동 개발·활용하고 사업화할 계획이다.
한림대는 최양희 총장 취임 이후 ‘더 뉴 한림(The New Hallym)’ 슬로건 아래 SW, AI, 데이터 사이언스, 의료·바이오, 반도체 등 첨단 미래 유망 분야 특성화과 교육 혁신을 추진하고 있다. 9월 개교를 앞둔 태재대는 캠퍼스 없이 여러 나라를 돌며 과제를 수행하고 온라인 강의를 듣는 ‘미네르바 대학’을 모델로 한다.
협약식과 함께 정 교수의 흉상 제막식도 함께 열렸다. 최 총장은 “정 교수의 삶과 학문은 후학들이 나아가는 길에 지금도 큰 이정표가 되고 있다”며 “흉상 제막식에 이어 유품 전시와 스토리보드 설치 등 추모 공간 조성을 통해 정 교수의 교육 철학과 업적을 널리 알리고 계승하고자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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