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마약을 판매하는 일을 하는 것 같습니다.” 지난해 2월 서울 용산경찰서에 미성년자 A 씨가 스스로 찾아와 “자수하겠다”며 이렇게 말했다. A 씨는 서울 용산 일대에서 일명 ‘던지기 수법’으로 마약을 유통한지 한 달도 안 돼 경찰서를 찾았다고 한다. A 씨는 경찰에 덜미를 잡힐까봐 불안해하다 애초 마약 거래를 하기로 약속했던 이날 마음을 바꿔 자수한 것으로 전해졌다.
경찰은 A 씨의 진술과 금융거래 내역 등을 토대로 마약 거래 범행을 역추적해, 마약 매수·투약범과 판매·유통책을 차례로 잡아들였다. 결국 올해 5월 마약조직 관리 총책인 B 씨(48)를 마지막으로 유통 및 투약 사범 72명을 붙잡아 전원 검찰에 송치했다.
● 필리핀 고깃집 사장에게 뻗어온 ‘검은 손’…비아그라 위장해 마약 밀반입
2019년 7월 필리핀으로 출국한 뒤 현지에서 삼겹살집을 운영하던 B 씨는 2020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확산으로 매출이 곤두박질치자 음식점을 폐업했다. 이후 생활고에 시달리던 B 씨에게 ‘검은 손’을 내민 건 필리핀 현지에서 알게 된 한 지인이었다.
B 씨는 지인이 소개해준 마약조직 총책 C 씨로부터 한국으로 마약을 판매하는 일을 제안받아 조직에 발을 들였다. 이후 능력을 인정받아 조직 전반을 관리하는 총책까지 올라섰다. B 씨는 유통·판매책에게 활동비를 지급하거나, 부산에서부터 친하게 지내던 지인을 자금관리책으로 영입하는 등 국내에 마약을 밀반입해 판매하는 조직 활동을 이어갔다.
B 씨가 수사망에 포착되자 경찰은 지난해 9월 B 씨를 인터폴에 수배했다. 이후 약 한 달여 만인 지난해 10월 필리핀 당국과 공조수사를 통해 필리핀의 한 은신처에 있던 B 씨를 붙잡았다.
약 7개월간 협의를 거쳐 4일 국내로 송환된 B 씨는 6일 구속됐다. 서울서부지검에 송치된 B 씨에게 적용된 혐의는 마약류관리법·범죄수익은닉규제법·외국환거래법·전자금융거래법·금융실명법·주민등록법 위반 등 총 6가지다. 경찰 관계자는 “B 씨를 검거하는 과정에서 C 씨의 존재를 알게 돼 체포 영장을 발부받아 수사를 확대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경찰 조사 결과 이들은 발기부전 치료제인 ‘비아그라’ 등 성인용품에 마약을 숨겨 국내로 들여왔다. 이렇게 국내로 들여와 유통된 마약 중 회수된 마약만 해도 7만9000여 명이 동시에 투약할 수 있는 양이었다. 필로폰 535g, 합성대마 476g, 엑스터시 167정, 케타민 163g 등 17억8000만 원 상당으로 조사됐다. 이들에게 계좌를 통해 전달된 10억6000만 원까지 합하면 확인된 범죄 액수는 27억 원이 넘는다.
경찰은 폐쇄회로(CC)TV 영상과 피의자 진술 등을 종합해 250여 곳에서 B 씨 일당의 마약을 회수했다. 마약을 회수한 장소 중에는 어린이집, 관공서까지 도보로 5분도 안 걸리는 곳도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 “잡히면 변호사비 주겠다”…미성년자까지 홀린 ‘고액 알바’ 광고
경찰에 따르면 이들 조직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마약을 배달하면 고액 활동비를 지급하겠다”는 광고를 올린 뒤 단골 구매자를 섭외하는 수법으로 판매·유통책을 모집했다. 이들은 “만약 검거되더라도 변호사 선임비를 지원하겠다”라며 지원자들을 안심시켰다.
B 씨 일당은 고액의 활동비를 미끼로 상대적으로 경제적 여유가 없는 사회초년생을 모집했다. 활동비는 가상화폐(비트코인)로 주거나 택배 무인보관소, 고속버스 수화물 센터 등을 활용하며 경찰의 추적을 피했다.
이들은 경찰의 꼬리잡기 수사를 피하기 위해 지원자들의 가족관계증명서까지 확인한 뒤 일을 맡겼다. 다단계와 비슷한 점조직을 구성해 서로의 신분을 모르는 채로 비대면으로 일을 진행하게 했다.
현재까지 경찰에 매수, 투약 등 혐의로 붙잡힌 이들은 58명이다. 연령대별로는 20~30대가 45명(77%)으로 가장 많았다. 여기에는 미성년자 등 대학생 5명도 포함된 것으로 조사됐다. 58명 중 절반가량은 호기심에 마약을 처음 접한 초범이라고 한다.
경찰 관계자는 “국민의 일상을 파괴하는 마약류 유통범죄자들에 대해선 끝까지 추적해 엄단할 방침”이라며 “해외에서 활동한 마약 사범들도 반드시 추적해 붙잡고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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