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호사 힘들어 쉬러 왔다”는 경력법관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5월 16일 03시 00분


[법조일원화 10년 흔들리는 사법부]〈상〉 사라진 야간재판-도제식 교육
법조경력자 중 법관 선발… 20대 판사, 2014년 193명 올해 0명
“웰빙 중시하는 판사들 늘어 재판 지연-질 저하로 이어질 우려”

지난해 대전지법 천안지원에는 좌우 배석판사가 모두 재판장(부장판사)보다 나이 많은 합의재판부가 처음 등장했다. 과거에는 임관한 판사들이 10여 년간 배석판사와 단독 재판부를 거쳐 합의부 부장판사로 승진했기 때문에 부장판사가 연장자인 게 당연하게 여겨졌다. 하지만 변호사 등으로 경력을 쌓은 법조인이 판사로 임용되면서 배석판사의 나이가 더 많은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소년급제’의 상징처럼 여겨지던 20대 판사도 올해부터 찾아볼 수 없게 됐다. 15일 대법원 법원행정처에 따르면 2014년 193명이었던 20대 판사는 2018년 42명으로 급감했고, 지난해 2명으로 줄었다가 자취를 감췄다. 판사 평균 연령은 2014년 38.3세에서 지난해 44.2세가 됐다.

판사 인적 구성이 본격적으로 바뀌기 시작한 건 2013년 경력이 있는 법조인을 판사로 임용하는 법조일원화 실시 후부터다. 다양한 배경과 경험을 보유한 법조인을 임용해 사법부에 대한 신뢰를 높이겠다는 취지였다. 현재 5년 이상 경력자 중 판사를 선발하는데 경력 기준은 2025년부터 7년 이상, 2029년부터 10년 이상으로 올라간다.

법원 문화도 빠르게 달라지고 있다. 과거에는 합의부 부장판사가 배석판사들이 써 온 판결문 초안에 빨간 줄을 그으며 고치는 ‘도제식 교육’이 이뤄졌다. 주말을 포함해 점심과 저녁 식사도 함께 했다. 한 부장급 판사는 “매주 10끼 이상을 함께 먹으며 호흡을 맞추는 일이 흔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미 법조계 경험이 있는 법관들을 도제식으로 가르치기 어렵다 보니 최근에는 빨간 펜이 사라지고 각자 판결문을 작성하는 경우가 많다.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 중시 경향도 자리잡아 판사들이 매달 판결문을 주 3건씩, 3주 동안 총 9건을 작성하고 마지막 한 주는 쉬어가는 이른바 ‘3·3·3 캡’도 암묵적으로 자리잡았다.

달라진 제도와 사회상을 반영한 흐름이지만 판결로 한 명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판사들이 ‘웰빙’에 지나치게 치중하는 걸 두고 재판 질 저하와 재판 지연 가속화로 이어질 것이란 우려도 나온다. 경력자 법관 면접에 참여했던 한 고위 법관은 “지원 동기를 물으면 로펌 생활이 힘들어 ‘쉬러 왔다’고 말하는 지원자가 적지 않다”며 “예전이라면 결격사유겠지만 그런 지원자가 상당수라 일부는 채용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향후 경력 기준이 7년, 10년으로 길어지면 로펌 변호사 생활을 하다 ‘적당히 일하고 적당히 벌기 위해’ 판사가 되려는 이도 늘어날 전망이다.

‘3·3·3캡’ 고수하는 웰빙 판사들… 기본적 팩트 틀린 판결문도


경력법관 들어오며 판결문 각자 써
부장판사의 배석판사 교육 안되며
도제식 ‘빨간펜 판결문 첨삭’ 사라져
사법연수원을 갓 졸업한 법조인이 법관으로 임용되던 과거에는 ‘소년 판사’들의 경험 부족이 자주 도마에 올랐다. 이 때문에 “사회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갖춘 법관을 임용해 국민 신뢰를 받겠다”는 취지에서 2013년 경력 법조인을 판사로 임용하는 법조일원화가 도입됐다.

법조일원화와 판사들 사이에 확산되는 웰빙 문화는 수십 년 동안 견고하게 이어지던 사법부 업무 관행에 균열을 만들고 있다. 야간 재판을 찾아보기 어렵게 됐고, 부장판사의 빨간펜 교열과 매끼 식사를 같이 하던 관행도 사라졌다. 하지만 일각에선 이를 두고 재판의 질적 하락과 재판 지연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우려도 적지 않다.

● 판결문은 주 3건, 재판은 오후 6시까지만

과거 판사들 사이에선 ‘어떤 부장판사를 만나느냐에 따라 법관 인생이 달라진다’는 말이 통용됐다. 갓 임관한 판사는 통상 부장판사 1명과 배석판사 2명으로 구성된 합의부에 배치되는데, 이때 부장판사가 배석판사의 스승이자 멘토를 자임하며 법원 문화부터 판결문 작성까지 도제식으로 가르쳤다. 이렇게 약 4년 동안 재판을 배우고 단독 재판부로 넘어가면 그때부터 온전히 한 명의 판사 역할을 하는 걸로 여겨졌다.

그런데 법조 경력을 갖춘 법조인들이 법원에 들어오면서 각자 판결문을 쓰는 방식이 자리 잡았다. 매일같이 점심 저녁 식사를 같이 하며 재판에 대해 논의하던 관행이 ‘월수금’ 또는 ‘화목’처럼 같이 점심을 먹는 요일을 정해 필요한 업무 협의를 하는 ‘식사 요일제’로 바뀌었다. 수도권의 한 법원에서 일하는 판사는 “매주 2, 3회 정해진 요일에만 점심을 먹고 다른 일정은 건드리지 않는 문화가 생겼다”며 “2013년 배석판사를 마치기 전까지만 해도 재판이 끝나는 날마다 회식을 했는데 최근에는 연말이나 인사 때가 아니면 회식도 안 한다”고 말했다.

일선 지방법원에선 매달 1∼3주 차에 판결문 3건씩을 작성하고 4주 차에는 판결문을 쓰지 않는 대신 사건 기록을 추가로 검토하거나 재판을 진행하는 ‘3·3·3 캡’ 문화도 자리 잡았다. 이를 두고 ‘일종의 담합’이란 지적이 나오지만 판사들은 “사건 기록이 많고 난도도 높아져 선고가 있는 주에는 야근을 하거나 새벽에 나오기도 한다”고 반박한다.

2019년 법무부가 심야 조사를 금지하는 인권보호수사규칙을 내놓은 이후 자연스럽게 야간 재판도 사라졌다. 판사들 사이에 웰빙을 중시하는 풍조가 확산되는 상황에서 일부 피고인들이 “수사에서 보장되는 만큼 재판에서도 인권이 보장돼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 재판의 질 유지는 숙제로

법원 안팎에선 인적 구성과 업무 관행이 달라지면서 재판의 질이 하락하고 재판 지연이 가속화되고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한 고법 부장판사는 “기본적 팩트를 틀리거나 논리 구조를 제대로 갖추지 못한 1심 판결문을 보고 항소심 재판부가 놀라는 일이 있을 정도”라고 말했다. 한 고법 판사는 “대륙법 체계 국가인 한국 특성상 법리 해석 이유를 판결문에 적어야 하는데 최근에는 이런 내용을 찾아보기 어려워졌다”고 했다.

최근 지방법원의 한 형사합의부 부장판사는 배석판사로부터 한 사건의 판결문 초안을 받고 당황했다고 한다. 형사사건은 기록 원문을 종이 서류로만 볼 수 있는데, 배석판사가 부장판사 방에 있던 원문을 보는 절차를 건너뛰고 전산에 나오는 개요만 본 후 적당히 판결문을 써온 것이다.

법조계에선 과거에 도제식으로 이뤄지던 판결문 작성 교육을 대체할 시스템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적지 않다. 그런데 대법원은 오히려 판사 채용 과정 중 유일한 필기시험인 ‘법률 서면 작성 평가’ 폐지를 검토하고 있어 “판결문의 질이 더 떨어질 것”이란 비판이 나온다.

익명을 요구한 한 고등법원 부장판사는 “법원 구성이 바뀌면서 문화가 바뀌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그게 혼신의 힘을 다한 판결이 사라지는 방향으로 가선 안 된다”며 “바뀐 문화에 맞게 재판의 질을 유지할 수 있는 방안을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법조일원화
검사, 변호사 등으로 활동하며 전문 경력을 보유한 법조인을 판사로 임용하는 제도. 과거와 달리 사법연수원을 갓 졸업한 법조인을 바로 판사로 임용하지 않고 현재는 5년 이상 경력자 중에서 선발. 선발 기준은 2025년부터는 7년 이상, 2029년부터는 10년 이상 경력자로 바뀜.
#경력법관#법조일원화#야간재판#도제식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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