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조일원화 10년 흔들리는 사법부]〈하〉 끝모를 재판
민사합의 1심 평균 364일 걸려… ‘웰빙 문화’에 지체 심해져
재판 기다리다 지친 소송인들 기일지정 요청해도 감감무소식
40대 여성 A 씨는 지난해 8월 변호사를 선임하고 가정 파탄의 책임을 물어 이혼 상대방에 대해 위자료를 청구하는 민사소송을 냈다. 그런데 9개월이 지난 지금까지 한 번도 법정에 서지 못했다. A 씨가 “얼른 재판을 마치고 일상으로 복귀하고 싶다”고 하자 변호사는 지난해 말 재판부에 ‘재판 날짜를 빨리 잡아 달라’며 기일지정 신청을 냈다. 그럼에도 재판이 언제 시작될지조차 모르는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 A 씨는 “언제까지 잊고 싶은 기억을 되새겨야 할지 모르겠다”며 한숨을 쉬었다.
B 씨는 온라인 예약 사이트에 악성 리뷰를 남겼다며 명예훼손으로 기소된 지 1년 7개월 만인 최근에야 무죄를 선고받았다. B 씨는 “리뷰 하나 남겼다가 1년 반 동안 고생할 줄은 몰랐다”고 했다. 시비가 명확한 단순 사건이었지만 재판부 사정으로 재판 기일이 몇 차례 연기되면서, B 씨는 언제 어떤 형이 선고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마음 한편에 둔 채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형사 및 민사 사건이 법원에 접수돼 선고까지 걸리는 시간이 계속 길어지면서 재판 지연에 따른 국민들의 피해가 커지고 있다. 16일 대법원에 따르면 2021년 기준으로 접수 후 1년이 넘도록 선고가 나지 않은 미제 사건은 민사 9만8879건, 형사 1만8920건으로 총 11만7799건에 달한다.
또 2014년 접수부터 선고까지 평균 252.3일이 걸리던 민사합의부 1심 처리 기간은 2021년 364.1일로 7년 만에 110일 넘게 늘었다. 같은 기간 형사합의 1심(구속 사건)은 114.1일에서 138.3일로 길어졌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최근 법원에 접수되는 민사 사건 10건 중 2, 3건은 기다리다 지친 원고 등이 재판부에 재판을 잡아 달라며 기일지정을 요청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재판부가 기일지정 요청에 응할 의무가 없는 데다, 너도나도 기일지정을 요청하다 보니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한다.
재판이 지연되는 것은 사건이 복잡해지면서 검토해야 할 기록이 늘어난 반면 판사 인력은 크게 늘지 않았기 때문이다. 법원행정처에 따르면 서울중앙지법 민사부에서 사건당 평균적으로 검토해야 하는 자료 분량은 2014년 248.5쪽에서 2019년 343.6쪽으로 38.3% 늘었다. 반면 휴직 등을 제외한 판사 근무 인원은 2017년 2599명에서 2022년 4월 2751명으로 5.9% 늘어나는 데 그쳤다.
여기에 판사들이 매달 판결문을 주 3건씩, 3주 동안 총 9건을 작성하고 마지막 한 주는 쉬어가는 이른바 ‘3·3·3 캡’ 등 ‘웰빙 문화’까지 더해지면서 재판 지연이 더 심해지고 있다. 한 고법 부장판사는 “재판 지연 문제를 단순히 과중한 업무 때문이라고만 할 수는 없다”며 “가장 큰 문제는 이를 해결하고자 하는 실질적인 사법행정의 노력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라고 지적했다.
민사합의부 1심 252일→364일… ‘5개월내 선고’ 규정 유명무실
‘민사 5개월내 선고’ 안 지키면 판사에 주의 주던 문화도 사라져 판사 정원 확대법안 국회 못넘어 고질적 인력 부족 해결도 요원
헌법 27조는 “모든 국민은 신속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갖는다”고 규정하고 있다. 또 민사소송법은 “판결은 소송이 제기된 날부터 5개월 이내에 해야 한다”고 적시했다. 하지만 판사들 사이에서 해당 조항을 신경 쓰는 경우는 거의 없다. 헌법재판소는 1999년 민사소송법 해당 조항이 강제성 없는 ‘훈시규정’이라며 면죄부를 줬다. 여기에 재판이 늦어지는 판사들을 파악해 주의를 주던 문화도 ‘김명수 대법원’에선 ‘사법행정권 남용’으로 여겨질 수 있다며 몸을 사리는 간부들이 많다.
지난해 대한변호사협회가 전국 변호사를 상대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선 666명의 응답자 중 88.9%가 최근 5년 사이 재판 지연을 경험했다고 답했다. 재판 지연을 경험한 변호사들 중 86%는 “1심 선고를 받기까지 1년 이상 걸렸다”고 했다.
● 접수해도 ‘감감무소식’…늘어나는 재판 지연
미지급 용역비 3000만 원을 받기 위해 2021년 6월 민사소송을 제기한 C 씨는 지난해 6월 1심 선고 이후 불복해 항소했다. 하지만 6개월이 넘어가도록 재판 기일이 잡히지 않자 올 1월 재판부에 기일지정 신청을 냈다. 하지만 다시 6개월이 지났음에도 변론기일이 잡히지 않은 상태다. C 씨는 “미지급된 용역비를 받아 사용해야 할 곳이 많지만 무작정 기다릴 수밖에 없어 답답하다”고 했다.
2013년 검사 변호사 등 경력자들을 판사로 선발하는 법조 일원화가 도입된 이후 웰빙 문화까지 자리 잡으면서 재판 지연은 한층 심해졌다. 매년 법원장이 소속 판사들에 대한 근무평정을 하지만 판사들은 근무평정을 잘 받아도 혜택이 없고, 못 받아도 불이익이 없어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한 지법 부장판사는 “예전에는 합의부에서 부장판사가 사건 처리에 속도를 내면 배석판사도 동참하는 분위기였다면, 지금은 부장들이 배석판사들 눈치를 보다 보니 다 함께 무리하지 않는 분위기”라고 했다.
● 쉬운 사건 위주로 처리…장기 미제 사건 늘어
재판이 지연된다는 지적이 나올 때마다 쉬운 사건을 몰아 처리하다 보니 까다로운 사건은 장기 미제 사건으로 지연되는 경향도 나타나고 있다. 장기 미제 사건이 많이 쌓일수록 지수가 낮아지는 민사합의부 ‘미제분포지수’는 지난해 ―19.6으로 사상 처음 마이너스를 나타냈다. 이를 두고 이형근 특허법원 고법판사는 올 2월 한 기고에서 “오래된 사건이 더 큰 폭으로 증가한 것은 쉬운 사건 위주로 처리됐다는 것”이라며 “이는 업무 과중의 문제가 아니라 법관의 직업윤리와 사법행정권자의 사건 관리 문제”라고 지적했다.
고질적 문제로 지적되는 법원의 인력 부족도 해결이 요원하다. 현재 3214명인 판사 정원을 2027년까지 370명 늘리는 법원조직법 개정안이 지난해 12월 발의됐지만 여전히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한 상황이다. 반면 판사 임용 자격을 법조 경력 10년 이상에서 5년 이상으로 줄이는 내용의 법원조직법 개정안은 2021년 국회에서 부결돼 2025년부터는 법조 경력 7년 이상, 2029년부터는 법조 경력 10년 이상의 변호사나 검사만 판사에 지원할 수 있다.
정형근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판사 정원을 늘림과 동시에 현재 훈시규정으로 돼 있는 소송 기한에 대해 강제성 있는 법을 만드는 방안 등을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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