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신마비 어머니 29년 간 수발
끝없는 간병에 공학자 꿈 포기
“이런 희생, 우리 세대로 끝일 듯”
작가의 길 걸으며 새로운 보람
‘돌아가기’와 ‘멀리뛰기’의 조화
4월 초 미국 시카고에서 e메일이 하나 왔다. 발신인은 재미교포 김석휘 씨(74). 현지에서 자전적 장편소설 ‘누가 엄마를 울게 했는가(Who Made Mom Cry)’를 어렵사리 냈다는 내용이었다.
책에 대해 ‘한 가여운 여성의 파란만장 일대기이기도 하지만 한국의 현대사, 이민사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고 설명했고 2014년 한국어로 낸 원작 ‘가족의 온도’(청동거울)가 있다고 했다.
2017년 이래 고국을 처음 찾았다는 그를 지난달 28일 서울 광화문에서 만나봤다.
59세에 교통사고로 가슴 이하가 마비된 어머니
인터넷서점에서 구해 본 한국어판은 350여 쪽 두께. 경제적으로 파산했던 한 가족이 장남의 미국 이민을 시작으로 하나둘 미국에 정착해가는 과정을 그렸다.
교통사고로 전신마비라는 엄청난 고통을 안게 된 어머니의 절절한 이야기가 생생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4남매의 장남으로서 가난에 찌든 가족을 일으켜 세우고 장애를 안은 어머니의 삶을 끝까지 지켜내는 김 씨 본인의 모습이 선명하게 전해져왔다.
1949년 전북 전주 생인 김 씨는 1979년 간호사로 기술이민을 간 아내를 따라 미국에 건너갔다. 이듬해 어머니를, 그 1년 뒤 아버지를 초청했다.
새로운 환경에 잘 적응하던 어머니는 1987년 버스 교통사고로 경추 3, 4번을 크게 다친 뒤 가슴 이하 마비 판정을 받았다. 그나마 고된 재활훈련을 거친 덕에 당초 전신마비 판정보다 조금 나아진 상태였다.
“본인 힘으로 숟가락도 못 드는 상황인데 두뇌활동이나 보고 듣고 말하는 기능은 이상이 없었어요. 그러니 얼마나 괴로우셨겠어요. 돌아가신 2016년까지의 29년은 어머니가 조금이라도 낫기 위해, 살기 위해 벌인 투쟁의 시간이었습니다.”
김 씨는 내내 바로 곁에서 이 투쟁을 도왔다.
“내 인생 2막은 어머니의 사고로 시작됐다”
인생 무대에도 ‘판’이 바뀌는 때가 있다. 그의 인생 최대 전환기는 언제였을까. 그는 주저 없이 어머니가 다쳐 장애를 안게 된 1987년 12월이 그때라고 답한다.
“저로서는 평생의 꿈을 포기하는 시작점이었어요. 제 꿈은 항공 기계공학 공부를 계속해 박사학위를 딴 뒤 교수나 공학자(엔지니어)가 되는 거였어요. 사고 당시 일리노이공대 항공기계공학 석사과정을 한 학기만 남긴 상태였어요.
직장 다니며 하는 공부라 미국 간 지 딱 10년, 입학한 지 8년 만에 끝낼 참이었죠. 어머니의 사고로 한 학기를 늦추면서 솔직히 속으로 절망했어요. 하지만 어머니가 아파서 쩔쩔매는 걸 보니 젊고 건강한 내 입장을 돌아볼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좀 돌아가자, 우선은 최선을 다해 어머니를 낫게 해드리자고 생각한 거죠.”
그가 평소 잘 쓰는 말이 ‘난 우회를 하더라도 내 일을 할 거야’였다. 1989년 5월 석사를 취득했지만 박사과정도 한없이 늦춰졌다. 어머니보다 11세 연상인 아버지도 노쇠해 2006년 향년 88세로 돌아가실 때까지 끊임없이 병고에 시달리며 그의 손길을 필요로 했다.
“박사과정 자격시험 준비하다가 아버지가 넘어져 다리를 다치고, 공부 좀 끝낼 만하면 또 어머니가 넘어지고…. 그렇게 10년쯤 끌다가 어느 학기엔가 학교 측으로부터 제가 행정조치를 제대로 안 해 제적됐다는 연락을 받게 됐지요.
나락에 빠졌던 집안 경제
김 씨가 초등학교 고학년 무렵 아버지가 보증을 잘못 선 탓에 가계가 무너졌다. 아버지의 월급 절반에 차압이 들어왔고 살던 집을 팔고는 해마다 쫓기듯 이사를 다녔다. 고교생 시절 김 씨가 서울에 있는 대학 진학을 꿈꾼 데에는 여섯 식구가 한방에서 생활하는 열악한 환경에서 어떻게든 벗어나고 싶었던 마음도 있었다.
“우리 집 형편에 서울의 대학은 언감생심이었지만 어머니의 격려 하에 무조건 서울행 기차를 탔지요. 어머니가 어렵사리 입학금을 마련해주셨고 그 뒤로는 학비며 생활비는 제가 벌어 해결했습니다. 대학 졸업 뒤 석사와 박사를 미국에서 도전하겠다는 꿈도 꾸게 됐지요. 더 많이 공부해야 한다는 어머니의 신념은 곧 제 신념이었습니다.”
그가 항공대에 입학한 뒤 어머니는 수도권의 건설 현장을 쫓아다니며 8년 정도 속칭 ‘함바집(가설식당)’을 운영하는 생활을 하기도 했다. 거친 공사 현장 인부들을 상대로 하는 이 일은 식대를 떼이기 일쑤. 죽어라 일해도 겨우 먹고사는 것을 해결하는 정도였다.
김 씨가 1976년 대기업에 입사해 월급을 받게 되면서 처음으로 집안 경제가 피었다. 어머니는 평생 처음 통장에 잔고가 쌓이기 시작했다고 기뻐했다. 그 돈을 모아 서울 신림동에 단독주택을 전세로 얻어 가족이 다시 모여 지낼 수 있었다. 이 집에서 김 씨를 비롯해 형제 3명이 불과 1~2년 사이 혼사를 치렀다.
“근 30년 이어진 간병에 내 꿈은 접었지만…”
-한국이건 미국이건 부모님이 아프면 시설로 보내드리는데, 그런 생각은 안 하셨나요.
“부모를 떠나 인간으로서 그 고통과 절절함이 너무 다가왔습니다. 어렸을 때 제가 아프면 엄마를 불렀던 기억이 생생한데…. 아마 시설에 계셨다면 대소변 등 문제 때문에라도 금방 돌아가셨을 거예요. 소변줄 염증 관리해야 하고 변비가 심해 약이나 관장으로 안 되면 손가락으로 파내는 일도 적지 않아요. 그런 걸 저만큼 잘할 사람은 없어요.”
전신마비 환자는 24시간 간병이 필요하다. 낮과 밤, 주말이 따로 돌아가는 3교대 체제인데, 간병인 구하기도 힘들었다. 어머니와 말이 통하는 한국인은 더욱 쉽지 않았고 밤에 근무하려는 사람은 더더욱 드물었다.
어머니에게는 간병비와 재활치료비 등으로 1년에 10만 달러(약 1억 3000만 원)씩 들어갔다. 시카고시로부터 배상금을 받았지만 15년 정도 더 사신다는 것을 전제로 계산된 액수였다. 29년을 더 사셨으니 갈수록 형편이 쪼그라들어 아파트 한 채를 팔고 사시던 집도 팔아야 할지를 걱정해야 했다.
“그래도 초기 10년은 상태가 조금씩 좋아지는 듯했어요. 아직 상대적으로 젊은 시기니까요. 손끝을 조금 움직이거나 보행기에 의지해 한 걸음씩 떼기도 했지요. 하지만 균형을 잡지 못하니 자꾸 넘어졌어요. 넘어지면 한쪽 다리 부러지고 다음번엔 반대쪽 다리 부러지고 아휴, 말도 못 해요. 어머니는 낫고자 하는 의지가 끝까지 무척 강했어요. 자꾸 움직여보려 하다가 넘어지고 부러지고 했지요. 그때마다 뒷일은 모두 제가 감당해야 했죠.”
간병의 십자가
본인의 뜻으로 어쩌지 못하는 이런 시련들을 그는 운명으로 받아들인 듯하다. 피하거나 한탄하는 대신 이 모든 과정을 관찰하고 꼼꼼히 기록했다. 그것들이 훗날 책을 쓰는 소재가 됐다.
그에게 어머니는 모순된 존재였다. 현실에서는 그의 성장에 방해가 되고 있었지만 그가 살아가는 방향을 잡아주고 성장의 목표를 세워준 존재이기도 했다. 어머니 본인은 제대로 교육받지 못했지만 자식들은 공부를 시켜야 한다며 자녀들을 실업계로 보내려는 남편에게 맞섰다.
그 덕에 김 씨네 4형제는 항공대, 철도간호학교, 공군사관학교 등 국립이라 학비 부담이 적은 곳에서 고등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한사람에게 간병부담이 쏠리는 걸 ‘독박간병’이라 하죠. 마치 ‘십자가를 진 사람’처럼 보입니다. 혹 불공평하다는 생각은 안 해보셨나요.
“그때그때 갈등은 있었지요. 그런데 이걸 누구한테 시키겠어요. 한국에 사는 여동생은 부모님이 한국 가면 굉장히 열심히 도와요. 한동안 한국의 병원에 입원도 하시고 침 치료를 받으러 지방에 다니기도 하시고, 참 여러 시도를 해봤습니다.
미국 사는 남동생과 여동생도 멀리 떨어져 살고 있고 자기 가정 꾸려야 하죠. 할 수 없어요. 그래도 아버지는 저만 보면 함박웃음을 지으셨고 어머니도 ‘내가 우리 돼지 때문에 믿고 살아’라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어요. 그보다 더 큰 힘의 원천이 어디 있겠습니까. 비록 젊은 시절 30년을 큰일을 못 하고 어머님을 간병했지만 절대 후회는 없어요. 더 못 해 드린 게 지금도 마음 아픕니다.”
“희생은 우리 세대로 끝이겠구나”
아내와 자녀들도 늘 그를 응원하고 힘을 보탰다. 특히 간호사인 아내는 다방면에서 큰 도움이 돼 줬다. 아들과 딸은 모두 명문대를 나와 마케팅 전문가, 변호사로 일하고 있다.
-김 작가를 지탱하는 힘은 끈끈한 가족애인 듯합니다. 그런데 혹시 본인이나 부인에게 비슷한 일이 닥친다면 어떨까요.
“그건 완전히 다른 문제예요. 아들이 고1 때인가, 아침에 학교에 데려다주면서 ‘요새 아빠가 할머니 때문에 이렇고 저렇고’라며 한 10여 분 얘기했더니 이 녀석이 ‘왜 그런 얘기를 저한테 해요?’하더군요. 섬찟했습니다. 은연중에 ‘우리가 아프게 되면 너희가 아버지처럼 해야 한다’고 강요하는 걸로 여기지나 않을까.
애들한테는 저나 집사람이나 절대로 이런 문제를 맡기면 안되겠구나…. 소위 ‘희생’ 같은 건 우리 세대로 끝나는 것 같아요.”
-그럼 만일의 경우 어떻게…. “음…. 어려운 얘기죠. 하지만 돌봐줄 사람이 없으면 요양시설에 들어가는 수밖에 없겠지요. 한인사회에서도 많이 봤습니다. 안 가겠다고 버티는 노인들도 많이 봤고요. 스스로의 힘으로 일상생활이 어렵다면 어쩔 수 없는 것 아닐까요.”
-지금의 장노년 세대를 흔히 부모를 봉양하는 마지막 세대이자 자녀에게 부양받지 못하는 첫 세대라고 하지요. 억울하지 않으세요.
“억울하기까지야. 아쉽기는 해요. 하하.”
먼 길 돌아왔지만… 우회지에서 새로운 희망
과학자의 길을 단념하면서 그는 새로운 길을 찾아냈다. 글쓰기다. 2007년 에세이집 ‘어느 남자의 사랑 이야기’를, 2014년 ‘가족의 온도’를 출간했다.
“나이 들다보니 제가 선망하던 공학보다는 형이상학 쪽으로 관심이 옮아갔습니다. 지금은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에 무척 만족하고 있어요. 엔지니어였던 친구들도 요즘 보면 은퇴해서 그냥 살더군요.
전 74세지만 지금도 열심히 쓰고 운동하고 집사람하고 사이좋게 지내고 여행을 굉장히 많이 다니고 있어요. 여행도 한동안은 어머니 때문에 못 했지만 이제 자유롭죠.”
‘가족의 온도’를 영어판으로 가필 정정한 책 ‘누가 엄마를 울게 했는가’는 미국에서 지난해 7월 출간됐다.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2세들은 물론이고 미국 사회, 전 세계에 한국적인 정서를 알리고 싶었다고 한다.
출간 뒤에도 코로나 상황 탓에 지난 4월 초에야 아마존에 작가 페이지를 개설했다.
-책에서 내 능력보다 한 발 더,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도전하는 ‘멀리뛰기‘를 강조하시던데, 74세 김석휘 작가의 멀리뛰기는 무엇입니까.
“항상 자기 능력까지만 하겠다고 하면 성취가 안 일어나죠. 지금은 글이나 책을 더 잘 쓰고 싶습니다. 영화 ‘미나리’나 ‘빠찡코’ 등 이민자의 희로애락을 그린 작품들이 미국 사회에서 반향을 얻었는데, 제 책도 널리 알려지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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