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이 위기라는 것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지만 야구의 속설처럼 ‘위기를 넘기면 반드시 기회가 찾아 온다’는 것을 철썩같이 믿고 싶다. 차정인 부산대 총장의 요즘 결기이자 의지다.
다른 지방 국립대가 겪는 것처럼 부산대도 어렵다. 제2의 수도로 불리는 부산의 대표 국립대지만 ‘수도권 대학 쏠림’ 유탄을 직격으로 맞고 휘청인지 꽤 됐다. 부산을 비롯해 경남권 인재들이 서울, 수도권으로 가면서 존재감이 흔들렸다. 1990년대 학번까지만 해도 전국 최상위권 성적에 있던 이 지역의 많은 학생들은 서울 타이틀을 버리고 기꺼이 부산대를 모교로 삼았다. 그러나 상황이 바뀌었다.
정부는 ‘글로컬(Global+Local) 대학’ 사업을 통해 지방대를 세계적인 대학으로 육성하겠다는 정책 과제를 제시했다. 올해부터 4년에 걸쳐 30개 대학을 선정한다. 가능성과 우려가 엇갈리고 있는 상황에서 지방대에게 혁신과 통합의 과제가 주어졌고, 선택과 집중을 해야 할 때다.
부산대는 어떤 포지셔닝을 할까. ‘부산대’라는 제품을 어떻게 혁신하고 경쟁력을 끌어올릴까. 어떤 커뮤니케이션 전략으로 교육 당사자들의 마음을 잡을까. 10일 부산대 총장실에서 차 총장을 만나 이와 관련한 부산대의 핵심 비전을 들었다. 그는 현재 부산대의 학생 수준과 교육 역량 모두를 긍정적으로 보면서 부산대가 지방대의 선도 모델이 돼야 한다고 했다.
“부산대를 ‘또 하나의 서울대’로”
“부산대는 인구 800만이 있는 부울경(부산·울산·경남)의 대표 대학 아닙니까?”
차 총장은 비전을 논의하는데 있어서 차별화된 ‘아젠다’ 설정이 절실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정부나 교육 당사자들의 부산대를 바라보는 관점이 달라져야 한다는 것인가.
“사회부총리와 미팅할 때 ‘지방대에 대한 정책 비전이 더 커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800만 인구를 대표하는 부산대는 ‘또 하나의 서울대’로 만들겠다는 비전 정도가 나와야 된다. 그래야 ‘지방 대학 시대’, ‘국가 균형 발전 시대’라고 얘기할 수 있지 않겠나.” -비전을 따라갈 수 있는 역량이 충분하다고 보는 건가.
“과거보다는 못하지만 부산대 공과대만 봐도 여전히 전국 상위 10% 내에 드는 학생들이 대부분이다. 교육 역량도 탄탄하다. 석·박사급 연구 인력을 양성하는 ‘4단계 BK(두뇌 한국) 21 사업’ 선정에서 부산대는 서울대에 이어 전국 2위를 기록했다. 서울대는 46개, 우리는 36개 사업단이 선정됐다. BK 사업 선정은 주로 교육 역량을 평가하는데 그만큼 부산대 상황이 좋다는 것이다. 또 취업을 준비하는 학생들이 선호한다는 인천국제공항공사의 최근 5년 합계 정규직 입사자 수를 보더라도 부산대가 연세대와 공동 1위다. 블라인드 평가에서 부산대 학생들이 실력을 인정받고 있다는 의미다. 장래성 높은 학자들이 부산대에서 교수 경력을 시작하면서 연구의 전성기를 보낸다는 것도 장점이다. 지역 대학들에게 정책적 뒷받침을 해주면 국가 균형 발전을 선도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 부산대는 자신이 있다. ‘또 하나의 서울대’ 프로젝트를 담대한 구상으로 만들어 글로컬 사업 계획(공모 신청은 이달 31일까지)에 담았다.”
차 총장이 구상한 ‘또 하나의 서울대’ 프로젝트의 핵심은 투 트랙으로 특화 캠퍼스 ‘메카’를 만들어 서울대와 어깨를 나란히 하겠다는 것이다. -메카에 대해 소개해 달라.
“하나는 양산캠퍼스를 중심으로 의생명 융합 특화 캠퍼스를 만드는 것이다. 이 분야의 ‘메카(성지)’로 발전시킬 계획이다. 양산캠퍼스에는 의대, 치대, 한의대, 간호대학이 있다. 수의대까지 유치하게 되면 의·생명과학 학문 분야를 다 갖추게 된다. 의·생명 융합 기술을 기반으로 맞춤형 헬스케어, 바이오 헬스, 빅데이터 등을 연구하는 의·생명융합공학부도 있다. 재정 확보를 위해 정부가 약간의 규제 해결만 도와주면 된다. 그러면 기초과학 분야에 대대적 투자도 가능하다. 지금 세계적인 연구 성과를 내고 있는 부산대 IBS 기후물리연구단과 같은 것을 양산캠퍼스에 몇 개를 더 만들면 의·생명 융합 특화 캠퍼스를 최고 수준으로 만들 수 있다.”
부산교대와 통합… 종합 교원 양성의 ‘성지’ 자신
또 하나의 트랙은 교원 양성 특화 캠퍼스를 만들겠다는 방향이다. 지방 국립대 통합 과제 논의와도 직결되는 문제다. 부산교대와 통합이 관건이다. 15일 부산교대 학내 의견 수렴기구인 평의원회에서 통합안을 찬성하고 의결했다. 17일 부산교대 교수회의에서도 평의원회 의결 결과를 최종 승인했다. 차 총장은 “이제 본격적으로 양교 통합의 비전과 청사진을 내보일 것”이라고 했다. -두 학교의 특성을 십분 활용할 것인가.
“부산교대 거제동 캠퍼스에 부산대 사범대 일부 학과가 이전하는 방안을 논의 중이다. 부산교대에는 초등교육 과정이 있고, 부산대에는 유아교육, 특수교육, 중등교육 과정이 있다. 명실공히 전국 최대 규모의 종합 교원 양성 특화 캠퍼스가 될 것이다.” -통합 논의에서 부산교대 학생들을 상당히 배려한 흔적이 보인다.
“교대 학생들이 종합대학에서 역량을 최고조로 키우도록 도울 것이다. 초등교사가 중등교사보다 더 글로벌화돼야 하고 다양한 학문 분야의 소양도 갖추어야 한다. 교대 학생들의 부전공, 복수전공을 허용하고 권장할 예정이다. 사범대 학생들이 모두 교사가 되는 게 아니듯이 학령인구의 급격한 감소로 교육대학 학생들의 임용률도 점점 낮아지고 있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4년 동안 대학을 다니면서 다른 진로에 관심이 생길 수도 있다. 초등교사가 희망 1순위지만 학문연구를 하고 싶어 교수가 될 수도 있고 기업으로 갈 수도 있다. 청년 시절에는 진로 선택의 폭이 다양하게 열려있는 것이 바람직하다. 다만 기존 부산대 타 전공 학생의 초등교육 부전공, 복수전공 이수는 필요하지 않아 금지하기로 이미 정했다.” -당장 교육 현장의 지형도를 바꿀 자신감이 엿보인다.
“‘교원 양성은 부산이다’는 것을 확실하게 입증해 나갈 것이다. 교원 양성 국책연구센터를 만들어 이 분야 국제적인 학술대회가 현 교대캠퍼스를 중심으로 이뤄지도록 할 계획이다. 교대에도 박사과정을 둬서 교수님들의 전문 연구를 지원할 것이다. 종합대학 교수로 전환하는 것에 맞춰 특별 연구비 지원도 필요하다. 통합으로 인한 가장 희망적 변화는 부산의 초등학교에서 나타날 것이다. ‘부산의 초등교육이 전국에서 가장 앞서 간다’는 평가를 받도록 하겠다.”
“결정 장애에 빠져 있지 않겠다”
차 총장의 고민은 부산대만 살자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우수 창의적 인재들의 입학과 더불어 그들의 지역 정착은 모든 지방 국립대들의 숙제다. 앞장서 난제 해결을 위해 움직이고 선도 모델을 낸다면 다른 대학에게 자극제, 동기 부여가 충분히 될 것으로 본다. - 돈 준다고 해결되는 건 아니라고 보는 건가.
“지역인재 유출을 막지 못하면 정부가 지역대학에 예산 지원을 해도 근본적 대책이 되지 않는다. 인재 유출의 확실한 방어책은 수도권 대학 정원 총량 규제다. 최후의 보루다. 부산대는 최근 정부가 첨단분야 정원 증원 신청을 받을 때, 먼저 기존 학과의 정원을 자체조정하고 그래도 모자라는 필수 인원 20명만 신청해서 20명을 받았다. 부산대가 정원을 지나치게 늘리면 바로 인근의 지역대학들이 타격을 받을 수 있다. 거점대학 총장으로서 지역대학들을 고려하면서 대승적으로 판단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차 총장은 지방으로 이전한 공공기관의 지역인재 의무채용 확대가 지역대학의 경쟁력을 강하게 끌어올릴 것으로 확신한다. 차 총장이 직접 혁신도시법 개정안을 준비해 지역대학 총장들과 함께 정치권 등에 건의를 했고, 국회 국토위에서 법안 심사 중이다.
현재는 혁신도시법에 따라 지방으로 이전한 공공기관은 직원의 30%를 해당 소재지 대학 출신 학생 가운데 의무적으로 뽑아야 한다. 차 총장의 안은 30%를 현재처럼 그대로 뽑고 추가 20%를 공공기관 소재지 대학 외의 비수도권 전체 대학에서 선발하자는 것이다. -이 법을 어떻게 평가하나.
“지역인재 유출을 획기적으로 해결하는 게임 체인저가 될 수 있다. 공공기관으로선 인재 선발의 풀이 넓어진다. 부산의 공기업에도 전남, 경북, 충남 지역 학생들이 오게 되는 것이다. 수도권 학생들의 불이익이 없도록 법령 적용은 6년 뒤부터다.”
국가 거점 국립대학교 총장협의회 회장을 맡고 있는 차 총장은 국립대의 역할과 재정·운영에 대한 법적 근거인 국립대학법 제정과 국립대학회계법 개정도 주도했다. 주변 UNIST(울산과학기술원), 포스텍(포항공대)과의 융합, 교류도 검토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 차 총장은 “전국에 5대 밖에 없다는 300KV 초저온 투과 전자현미경을 부산캠퍼스가 아닌 양산캠퍼스에 뒀다. UNIST, 경북대, 경상대, 부경대 등이 다 편리하게 활용하도록 했다. UNIST는 당장 이 장비를 활용해 연구할 게 많다고 한다. 협력 구조를 함께 만드는 건 즐거운 일이고 대환영”이라고 말했다. -옳은 방향의 가닥이 잡히면 바로 실행에 옮기고 있다.
“대학들이 종종 결정 장애에 빠지는 폐단이 있다. 상황이 어려운데도 중요한 결정을 차일피일 미루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부산대는 교무회의가 활발하다. 필요한 결정은 제때 내리고 있다. 학내 공론이 살아있게 하고 결정을 미루지 않으려고 한다. 한편으로는 지역대학 총장님들과 협력해 교육 정책의 방향을 제시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부산대의 반전 상승의 그래프를 그린 총장으로 기억되고 싶다. 온전히 부산 경남 시민들의 기부금으로 세워진 부산대가 균형발전을 위한 선도적 역할을 해야 할 시기다.”
“서울대 건드리지 않는 게 서울대 10개 만들기 핵심”
지역 균형 발전과 지방 거점 국립대의 경쟁력을 동시에 살리자는 취지에서 나온 대학 개혁 모델 제안 중 하나가 ‘서울대 10개 만들기’다.
김종영 경희대 교수(교육사회학)가 2021년 제안해 화제를 끌었다. 핵심은 지방 9개 거점 국립대에 서울대 수준의 재정을 투입해 세계적 수준의 연구 중심 대학으로 끌어올리자는 것이다. 과열된 대학 입시 경쟁을 막고 대학 서열화를 완화시켜 궁극적으로 국토 균형 발전 시대의 모멘텀으로 작용하게 한다는 취지다. 지난해 2월 전국 9개(서울대 제외) 국가 거점국립대총장협의회는 이 같은 방안을 여야 대통령 후보에 제안했다. 현재도 국회, 학계 등에서 활발하게 관련 제안이 나오고 있다.
‘서울대 10개 만들기’는 미국 캘리포니아대학(UC) 체제를 벤치마킹한 발상이다. 캘리포니아의 타이틀 안에서 10개의 연구 중심 대학이 있다. 버클리, 로스앤젤레스, 샌디에이고, 샌프란시스코, 산타바바라, 어바인, 데이비스, 산타크루즈, 리버사이드, 머세드에 캠퍼스가 있다. 차 총장은 “현장에 가서 보니 이 모델로 인해 모든 캠퍼스가 좋아졌다. 전체 연구 중심 대학을 선도하는 UC 버클리는 글로벌 탑 대학이 됐다. UC 버클리 모델은 서울대가 참고할 만하지 않을까”라고 했다.
그러나 이른바 SKY(서울대-고려대-연세대) 출신들을 중심으로 형성되는 반대론도 만만치 않다. 차 총장은 발상의 전환을 언급했다. 차 총장은 “서울대 10개 만들기의 장점은 서울대를 건드리지 않는 것이다. 지역 거점 대학들의 수준을 먼저 끌어 올리는 것”이라고 했다.
차 총장은 “프랑스 파리대학을 따라가면 파리1, 파리2대학이 될 수 있고, UC 모델이면 서울대 경북, 서울대 충남 이런 식이 될 것”이라며 “부산대 구성원들이 ‘서울대 부산’의 명칭에 만족할 것인지는 의견이 분분하겠지만 대표적인 거점 국립대인 부산대는 서울대 10개 만들기 논의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국가적인 공론에는 대승적으로 임할 생각이다”고 밝혔다.
이어 차 총장은 “학원가에 초등학생 의대반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이건 정상이 아니다”라며 “대학으로 가는 고속도로 병목현상이 심각하다. 고속도로를 10개쯤 만드는 게 올바른 대책이다”고 더 구체적인 화두로 다뤄지길 기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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