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 기획]5·31 교육개혁의 배경과 의미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5월 25일 03시 00분


5·31 교육개혁 28주년을 맞아 안병영 전 교육부 장관의 글을 3회에 걸쳐 싣는다. 5·31 교육개혁은 1995년 김영삼 전 대통령에 의해 해방 후 최초로 시도된 교육개혁으로 지금까지 교육 전 분야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안 전 장관은 김영삼 정부의 교육부 장관을 역임하며 교육개혁을 실행했으며 노무현 정부에서는 부총리 겸 교육인적자원부 장관으로 한국 교육의 기틀을 닦았다. 교육개혁 전과 후 한국 교육은 상전벽해만큼 변화가 컸지만, 아직 한국 교육이 가야 할 길은 멀다. 글은 ‘5·31 교육개혁의 배경과 의미’, ‘5·31 교육개혁이 미친 영향’, ‘5·31 교육개혁과 한국 교육의 미래’ 순으로 이어진다. 〈편집자 주〉·

안병영 연세대 명예교수
안병영 연세대 명예교수
5·31 교육개혁으로 불리는 김영삼 문민정부의 제1차 교육개혁방안(신교육체계)이 발표된 지 30년 가까이 됐다. 1995년 5월 31일 첫 번째 교육개혁 방안이 나왔고, 2년 남짓한 기간 동안 세 번 더 해서 모두 4차례에 걸쳐 조치가 발표됐다. 120개의 정책과제로 정리된 이 엄청난 규모의 정책 패키지는 한국교육의 패러다임을 근본적으로 바꿨다.

20세기 말 우리가 경험했던 변화의 격랑은 그 진폭이나 심도에 있어 실로 미증유의 것이었다. 세계화, 정보화, 지식사회화로 집약되는 이른바 문명사적 전환이 급격히 진행됐고, 우리의 경우 이 큰 흐름이 민주화의 물결과 같이했다. 5·31 교육개혁은 바로 이러한 역사적, 거시적 시간 속에서 태동됐다.

5·31 교육개혁은 기존의 권위주의적 발전국가의 ‘권위 관계’에 기초한 위계적, 공급자 위주의 교육체계를 자율과 경쟁, 다양화와 특성화에 기초한 수요자 중심의 열린 교육체계로 바꾸는 획기적 작업이었다. 한 마디로 한국 교육은 바로 이 개혁을 통해 새 판이 짜여졌다.

김영삼 문민정부가 주도한 5·31 교육개혁은 ▽시대적 통찰력을 바탕으로 한 한국 최초의 국가 전략적 수준의 종합적인 교육청사진이라는 점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한 문민정부 첫 대통령의 정치적 결단에서 비롯된 교육혁명이었다는 점 ▽그 개혁과제들의 대부분이 실제로 성공적으로 집행되어 이후 다수의 정권교체에도 한국 교육의 근간이 되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5·31 교육개혁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다소 엇갈린다. 많은 이가 시대적 변화와 도전에 능동적으로 대응한 성공적 교육개혁이라고 높게 평가하는 데 반해 진보 진영의 일부 논자들은 이를 ‘신자유주의의 꽃’으로 한국 교육을 잘못된 길로 유도한 패착이라고 폄훼하기도 한다. 그러나 누구도 5·31 교육개혁이 지닌 엄청난 생명력과 영향력을 부인하는 이는 없다.

5·31 교육개혁을 돌이켜보면 그것이 세계화라는 시대적 추세에 영향을 받았고, 어느 정도는 신자유주의에 경도돼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당시의 미래 조망과 시대사조에 비추어 볼 때 이는 불가피했고, 크게 무리함이 없었다.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보면 세계화에 못지않게 민주화의 격류가 크게 작용했고, 상대적으로 가치 중립적인 정보화와 지식사회화의 봇물도 함께 작용했다. 실제 5·31 교육개혁 정책 과정의 주역 중 누구도 신자유주의에 크게 경도된 사람은 없었다. 따라서 이들은 개혁 프로그램을 비교적 유연하게 구성, 해석하고 운영했다.

5·31 교육개혁 프로그램들은 초중등교육, 고등교육, 평생 직업교육 및 교육 인프라 등 교육 전 분야에 폭넓게 펼쳐 있고, 성과도 괄목할 만하다. 대표적 성과들은 교육재정 GNP 5% 확보와 교육 관계 법령체계 개편, 학교생활기록부 도입, 학교운영위원회 창설, 초등영어 도입, 교육 정보화 추진, 교육 규제 완화, 직업교육체계 개혁 등 무수하다. 이 사례들은 이후 하나, 하나가 한국 교육 발전의 주춧돌 구실을 했다.

이밖에 학교 환경개선 특별회계를 신설해 막대한 교육재정을 투입했고, 그 결과 초중등학교의 일선 현장을 획기적으로 개선했다. 교육환경 개선과 교육 정보화의 빠른 진전으로 이들 학교의 풍경은 완전히 달라졌다. 대학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대학 평가와 행정적, 재정적 지원 연계를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이다.

개혁은 새로운 개혁을 낳는다. 문민정부의 교육개혁위원회가 제시한 개혁 방안은 당시 시대사조의 영향으로 신자유주의적 정책 요소들이 많이 포함했다. 그러다 보니 거시적 정책 지형은 형평성에 비해 수월성 쪽으로 기울었고, 정책 내용 중 협력과 공존 능력의 제고나 교육 소외의 극복과 인간화를 위한 프로그램은 상대적으로 적거나 뒤로 밀렸다. 이에 당시 장관이던 필자와 교육부는 거시적 교육정책 틀의 전체적 균형과 조화를 위해 형평성 제고가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5·31 교육개혁의 보정 작업에 나섰다. 이렇게 해서 ‘교육복지’라는 새로운 개념이 교육부의 정책 어젠다로 처음 등장했다. 교육복지종합대책(1997-2000) 발표, EBS 수능방송 출범(1997.7), 대안학교 설립 및 운영대책 발표(1997.3) 등이 대표적 수확이다.

대부분 개혁사업이 그렇듯이 5·31 교육개혁 사업 또한 빛과 그림자가 있었고, 실패의 단면도 있었다. 상대적이라는 수식어를 앞세워 성공 요인 몇 가지를 살펴보자. 첫째로 ‘대통령 요인’이다. 최초의 문민정부 수장인 김영삼은 임기 전 과정을 통해 교육개혁에 지대한 관심을 표명했고, 지속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대통령제 정치체제에서 대통령의 힘이 실리면, 정책 실현 가능성은 증폭된다. 둘째 5·31 교육개혁은 그 기본철학과 비전 및 아이디어에서 그 이전과 이후의 어떤 교육개혁 방안보다 출중했다. 시간적 조망에서 새 천년을 지향했고, 부문 인식에서 교육 부문을 뛰어넘는 사회 개혁적 함의가 강했다.

상대적 성공의 세 번째 요인은 조직 체계와 인적 구성이다. 문민정부는 교육개혁의 창안 기구인 교육개혁위원회를 비관료적, 초당적 순수 민간기구로 출범시켰다. 위원 중에 정치, 이념적으로 편향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이와 더불어 교육개혁위원회-청와대-교육부가 그림처럼 작동했다. 교육개혁위원회의 이상주의와 교육부의 현실주의를 청와대가 중간에서 중재하고 조율하는 3자 구도는 5·31교육개혁 정책 과정의 주역이었던 이명현, 박세일, 안병영이라는 세 사람의 빈틈없는 협력체계를 통해 진가를 십분 발휘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했던 상대적 성공 요인은 교육재정의 대폭 확충이었다. 이를 통해 5·31 교육개혁이 단순한 처방으로 끝나지 않고 실행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5·31 교육개혁의 주역 중 한 사람이었던 고 박세일 수석은 “문민정부의 성과 중에서 교육개혁은 그 괄목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쉽게 잊히고, 과소 평가되는 경향이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필자도 백번 동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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