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 "단순 데이트폭력 판단…접근금지 근거無"
집 비밀번호 바꾸고 협박했다는데도 "단순 갈등"
위험도평가 한계도…피해자 불원에 보호조치 못해
서울 금천구에서 전 연인을 살해한 피의자 김모(33)씨가 ‘자신을 신고했다는 사실에 화가 나 범행했다’는 취지로 진술한 것으로 나타나면서, 범행 직전 데려와 조사까지 해놓고 적극적으로 조치하지 못한 경찰의 초기 대응이 적절했느냐는 논란이 제기되고 있다.
서울 금천경찰서는 27일 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특가법)상 보복살인 혐의로 김씨에 대한 구속영장을 서울남부지검에 신청했다고 밝혔다. 경찰은 구속영장을 발부받는 대로 김씨를 상대로 구체적인 범행 경위를 파악하는 한편, 피해자 A씨에 대한 부검결과를 토대로 정확한 사망 시간 등을 확인할 방침이다.
경찰은 김씨가 자신에게 이별을 통보한 A(47)씨의 데이트폭력 신고로 경찰 신고로 조사를 받게 되자 앙심을 품고 불과 몇 분 뒤 살해한 것으로 보고 있다. 최진태 금천경찰서장은 이날 브리핑에서 “피의자가 ‘나를 신고한 게 기분 나빴다’고 진술하고 있다”고 했다.
사건 발생 직전 데이트폭력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은 두 사람을 지구대로 임의동행해 조사한 후 김씨와 A씨를 각각 오전 6시11분, 7시7분에 귀가 조치했다. 먼저 나온 김씨는 A씨의 집으로 가 흉기를 챙긴 뒤, 금천구 시흥동의 한 PC방 인근에서 A씨가 오길 기다렸다가 범행한 것으로 나타났다. 범행 시간은 7시17분께로, A씨가 경찰 조사를 받고 나온 지 10분 만이다.
경찰은 스토킹처벌법이나 가정폭력처벌법과 달리 단순 데이트폭력의 경우 가해자에 대해 접근금지 등 조치를 할 법적 근거가 없다는 입장이다. 그간 김씨가 A씨의 의사에 반해 반복적으로 만남을 강요·협박하는 등 스토킹범죄로 볼만한 정황이 없었다는 것이다.
가정폭력의 경우 접근금지 조치가 가능한데, 경찰은 ‘결혼 의사가 없는 연인관계다’, ‘생활비를 따로 쓴다’ 등 피해자 진술과 여러 상황을 고려했을 때 두 사람을 사실혼 관계로도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고 한다.
경찰 관계자는 “폭력이 경미했고, 피해자가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는 의사를 명확히 밝혔기 때문에 공포심 등 위험성을 현장에서 인지하지 못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김씨가 A씨의 집에 들어가 비밀번호를 바꾸고 협박하는 등 사전에 실질적인 위협이 존재했음에도 별다른 조치가 취해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경찰의 대응을 지적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경찰은 A씨로부터 ‘김씨가 데이트폭력과 함께 재물을 손괴했다’는 내용의 신고를 받아 인지하고 있던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는 두 사람의 진술에만 의존해, 이번 사건을 단순한 연인 간 갈등으로 판단한 셈이다. 관계성 범죄의 경우 피해자가 가해자와의 관계 악화나 보복 등을 우려해 신고를 하고도 정작 적극적인 분리 조치 또는 처벌을 원하지 않는 경우가 빈번하다.
이번 사건에서는 경찰이 보호조치 여부를 결정하기 위해 범죄 피해자의 위험도를 판단하는 자체 평가서(체크리스트)의 사각지대도 다시 확인됐다는 비판이 나온다.
당초 경찰은 A씨를 상대로 체크리스트 면담을 실시했지만 총 5단계(없음·낮음·보통·높음·매우높음) 중 위험도가 높지 않은 것으로 평가됐다고 한다. 그럼에도 경찰이 스마트워치 지급과 귀갓길 동행 등을 제안했지만, A씨가 112시스템 등록과 맞춤형 순찰 외 다른 보호조치는 거절한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경찰청은 지난해 ‘신당역 살인 사건’을 계기로 정교화된 위험도 체크리스트를 마련해 지난 22일부터 도입한 바 있다. 이번 사건에서도 해당 체크리스트가 활용됐지만 위험 요소들이 제대로 걸러지지 않았다는 지적이다.
경찰청 관계자는 “스마트워치 착용 등 보호조치는 피해자의 의사를 고려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라며 “체크리스트의 한계인지, 현장에서 피해자로부터 위험에 대한 충분한 진술을 들었는지 등에 대해선 종합적인 검토가 필요해 보인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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