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5월 동아일보 사진기자가 됐다. 그때나 지금이나 사진기자의 일은 크게 2가지로 나뉘는데, 첫 번째는 현장에서의 촬영(취재)이고 또 하나는 마감(송고)이다. 당시엔 필름을 직접 다루는 일이라 기능적인 과정이 지금보다 더 어려웠다.
필름 현상 → 인화지로 사진 제작 → 지면제작 부서에 송고
이게 당시 마감 공식이었다. 사진기자가 필름을 손으로 일일이 현상하고 빨간 불빛 암실에서 확대기를 이용해 인화했다. 나의 경우 대학 학보사 사진기자를 했기에 매주 금요일 밤에 한 주 동안 촬영한 필름을 이렇게 처리했다(주간 발행 학보를 토요일에 제작했다). 사진기자들 손엔 약품과 물이 마를 날이 없었고 손가락 사이에 습진이 피기도 했다.
당연히 이런 작업을 각오하고 입사했다. 그런데 왠 걸, 그럴 필요가 없었다. 동아일보 사진부에는 필름 현상기계와 인화기가 들어와 있었기 때문. 1995년 이미 사진 마감 처리의 자동화가 완성돼 있었다.
후작업이 사실상 자동화되면서 암실도 사라졌다. 과거에 후작업에 대한 기술 습득은 암실에서 이뤄졌다고 한다. 마치 군대의 사수-부사수 관계처럼 선배와 후배가 멘토-멘티 관계로 마치 장인이 문하생을 가르치듯 기술을 ‘전승’한 것이다. 선배는 일방적으로 가르치고, 후배는 일방적으로 배우는 수직관계.
모든 직장이 그러하듯 입사 전 갖춘 지식보다는 입사 후 선배들에게 배우는 과정이 더 현실적이고 효용가치가 크다.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 한다.
그런데, 마감작업 자동화 이후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선후배 관계가 꽤 수평적으로 바뀌었다. 자동화된 현상-인화기 앞에선 딱히 수작업 기술이 중요하지 않았다.
1997년엔 노트북이 들어왔다. 외부에서 사진을 송고할 때 쓰던 아날로그 전송기 대신 범용PC인 랩탑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 아무래도 후배들이 훨씬 빠르게 적응을 했다. 부서 막내인 내가 선배들에게 사진 송고 마감, 즉 후작업에 대해 알려드려야 했다. 필름 스캐너와 PC를 연결하는 법, 스캔 파일을 저장한 뒤 모뎀을 이용해 회사 서버에 등록하는 방법 등등.
당시에는 미처 인지하고 있지 못 했는데, 그때부터 선후배의 전통적인 관계 즉 선배는 가르치기만 하고, 후배는 배우기만 하는 관계의 질서가 깨졌다. 물론 현장 취재에 대해선 여전히 선배들이 더 큰 노하우를 갖고 있었다. 선배들은 축적된 경험을 후배들에게 알려주고, 후배들은 최근 습득한 신기술(컴퓨터)을 전하는 아름다운(?) 상부상조 관계가 탄생하기 시작했다.
이 때를 두고 한 선배는 “야단도 치면서 가르쳐야 하는데, 내가 컴퓨터에 대해 아쉬운 소리를 하고 있으니 후배들에게 친절해야 했다”며 농담반 진담반으로 말한 적도 있다 (인격과 능력 등 모든 면에서 내가 늘 존경하는 선배시다).
*** 신기술은 질서의 변화를 가져온다. 산업혁명 당시 증기기관은 이른바 신흥 산업세력, 이른바 부르주아 계급을 만들었다. 귀족들이 모든 권력을 가지던 시대의 끝을 불렀다. 가깝게는 정보화 혁명이 있다. 스타 IT업체의 주가총액이 기존 글로벌 기업의 그것을 넘은지 오래다. 세계적으로 신진 산업세력을 만든 것이다. 인터넷 SNS 유튜브 등은 정치 사회 경제 구조에도 근본적인 변혁을 불러왔다. 유권자와 소비자들의 목소리가 커지면서 정치인과 관료, 기업들도 여론에 신경을 곤두세운다. 일반인과 엘리트 관계에 변화가 생긴 것이다.
이른바 4차 산업혁명은 인공지능으로 수렴되는 분위기이다. 한 때 증강현실(AR), 가상현실(VR), 메타버스, 블록체인 등도 관심을 끌었지만… AI는 사람들의 사회적 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정치사회적으로 어떤 후폭풍을 일으킬지 아직은 가늠하기 어렵다. AI가 새로운 세력을 만들어 낼까? 지금까지의 움직임만으로 예측해 본다.
어느 사업장이나 품이 많이 들고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이 있다. 사무직원들이 ‘삽질’이라고 하는 작업들이다. 예를 들어 보고서를 쓰기 위해 자료를 검색하고 모으고 정리하는 일, 그래픽 디자이너가 이미지 소스 뼈대를 만들거나 입수한 이미지의 지저분한 부분을 지우는 일 등등. 프로그램 개발자라면 기본적인 소스 코딩 작업이 이른바 ‘삽질’이다.
현재 상용화된 AI는 ‘삽질’에 최적화돼있다. MS가 선보인 ‘코파일럿’은 파워포인트(PPT) 자료 초안을 만들어준다. 자료조사와 관련 데이터 첨부는 기본이다. 그래픽 디자인 작업을 쉽게 할 수 있도록 사진의 지저분한 배경과 요소를 없애주는 ‘지우개’ 기능은 이미 스마트폰 용 어플로까지 나와 있다. 작곡가들도 AI의 도움을 받아 음악은 물론 뮤직비디오까지 만들고 있다. 번역가들에게 ‘AI 초벌 번역’은 천군만마다.
음식에 비유하자면, 연기가 많이 나고 뜨거운 곳에서 고생을 해야 하는 초벌구이를 AI가 대신해주는 것이다. 시간과 노력이 많이 드는 초반작업을 AI에게 맡기고, 창의성이 중요한 마무리 작업에 집중할 수 있다. 사무직원의 생산성이 크게 향상될 것이다.
문제는 생산성 향상이 신규인력 채용과는 반비례한다는 점이다. 기업들이 인력 부족을 느끼지 않는다면 굳이 신규채용을 고집할 이유가 없다. 기존 인력이 이미 확보한 노하우에 AI로 무장하면 엄청난 진입장벽을 세워버리게 될지도 모른다.
직장은 ‘돈을 받으며 배우는 학교’다. 입사 후 선배들에게 현장에서 배우는 것은 직업인으로서 피가 되고 살이 되는, 평생의 지적 자산이 된다. 입사 초반에 집중적으로 배우는 것은 무엇일까? ‘삽질’이 대부분이다. 한심한 업무 같지만 신입사원은 삽질을 통해 직업인으로서 경험을 거치며 나아가 통찰과 아이디어를 얻기도 한다. 삽질의 축적이 기초 체력이 되는 것이다. 기존 직장인들이야 이미 거쳐봤으니 그 경험이 축적돼 있지만 신규인력은 그런 경험을 못 할 수도 있다. 이제 갓 산업전선에 뛰어들었거나 뛰어들 청년들에게 불리하지 않을까?
반대의 경우도 있을 수 있다. 대학에서는 이미 ‘AI활용법’ 강좌가 인기다. AI를 아바타처럼 능숙하게 이용하는 신규인력이라면 오히려 기존 직업인보다 더 강력한 생산성을 가진다. 기존의 패러다임을 월등하게 뛰어넘는 인력이라면 시장의 질서가 무너뜨려버릴 수도 있다.
AI가 사람과 사회의 관계와 질서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 궁금하다. 기득권을 더 공고히 할지, 아니면 또 다른 신진 세력군의 탄생을 불러올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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