깜깜한 어둠. 흰눈 덮인 압록강에 10~15명의 밀수꾼 무리가 나타났다. 금속이 든 60㎏짜리 마대를 메고 앞장선 밀수꾼 두목은 30대 초반의 여인이었다.
이름 박윤희. 13살에 북한군 호위사령부에 입대해 국가대표 바이애슬론 선수로 활약했던 노동당원. 현직은 보천보혁명박물관 관리원. 비공식 생업은 밀수꾼 두목. 그에게 40㎏ 마대는 책가방이었고, 60㎏짜리는 일상이었다. 90㎏짜리를 메고 압록강을 넘은 적도 있었다.
밀수를 하다가 3번씩이나 체포돼 노동단련대에 가면서도 고향을 지킨다고 버티던 그는 결국 2013년 설날 마지막으로 압록강을 넘었다. 김정일 친위부대인 974부대를 제대한 남동생도 누나와 함께 강을 넘었다. 10년이 지난 지금 박 씨는 한국 생활이 너무나 행복하다며 웃음을 달고 산다. 서울에 오기까지 박 씨의 삶은 다른 탈북민들과는 같은 듯 달랐다.
● 삼지연의 소녀 스키선수
박윤희 씨는 1979년 함경북도 청진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그 도시에 대한 기억은 없다. 2살 때 아버지를 따라 양강도 삼지연군(현재 삼지연시로 승격)으로 이사를 왔기 때문이다.
부친은 사회안전성 답사관리소에서 일했다. 안전원(경찰) 군복을 입고 있어 어딜 가나 폼은 났지만, 윤희가 태어나서부터 그가 군을 제대하던 2004년까지 25년 동안 상위(중위와 대위 사이)만 달고 있었다. 답사관리소 편제가 그랬다.
그래도 부친은 “이만한 직업이 없다”며 승진도 못하는 자리를 고집했다. 답사관리소는 전국 안전원들이 정기적으로 하는 혁명전적지 답사를 위해 존재하는 여관 개념의 답사숙영소를 3개 운영했다. 윤희의 부친은 왕재산과 보천군, 삼지연에 있는 답사숙영소를 몇 년에 한번씩 옮기며 순환 근무를 했는데, 권력을 가진 안전원들을 먹이고 재우는 곳에서 근무하다보니 집에 먹을 것이 풍족했다.
윤희는 배고픔을 모르고 자랐다. 고난의 행군도 몰랐다. 집에는 쌀과 기름이 넉넉했다. 부친은 과일과 동태 따위의 부식물도 자주 가져왔다. 배급표가 있어도 배급을 타지 못하는 학교 선생들이 집에 찾아왔다. 그러면 부친이 무용지물이 될 뻔한 배급표를 답사숙영소 식량으로 바꿔주었다. 그러다보니 학교에서 윤희의 위신도 높아졌다.
인민학교를 다니던 10살 때 윤희는 삼지연학생소년궁전에서 스키를 배우기 시작했다. 지금은 마식령에도 스키장이 생겼지만, 당시 북한 전역에 경기를 할만한 스키장은 삼지연 베개봉스키장 밖에 없었다. 스키 선수를 키우는 곳도 삼지연과 장진, 랑림 등 몇 개 지역밖에 없었다.
동계 경기 대회 시즌이 오면 전국에 있는 스키선수들이 다 삼지연으로 몰려왔다. 어린 윤희는 이들이 타는 스키가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부친에게 졸라 학생소년궁전 스키반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윤희는 뛰어난 실력을 발휘해 몇 년 만에 소년궁전 에이스 스키 선수로 자리매김했다. 그는 전문 체육단에 들어가 선수생활을 해야겠다는 더 큰 꿈을 꾸기 시작했다.
당시 북한에서 스키부가 있는 선수단은 호위사령부 산하의 체육단인 이명수체육단밖에 없었다. 이명수는 백두산 천지물이 흘러내리는 작은 개울인데 삼지연에 있었다. 항일빨치산들의 전적지가 있다고 해서, 북한에선 성스러운 곳으로 꼽히는 개울이고 체육단 이름도 그걸 따서 지은 것이다. 부친은 윤희가 14살 되던 때 삼지연에 훈련하려 왔던 이명수체육단 코치들에게 찾아가 우리 딸을 선수로 뽑아줄 수 있는지 물었다.
코치가 윤희를 부르더니 스키를 타고 훈련장을 몇 바퀴 돌아보게 했다. 그러더니 실력이 뛰어나다고 뽑아가겠다고 했다. 당시 북한에선 스키를 타는 선수 자체가 많지 않았지만, 어떤 선수를 키우느냐에 따라 코치의 성과도 좌우되기 때문에 아무나 받아주지도 않았다.
● 바이애슬론 국가대표가 되다
이명수체육단은 호위사령부 소속이기 때문에 이곳에 입단하는 것은 곧 군 입대와 같다. 입대 선서도 한다. 윤희는 소년단넥타이를 매고 다니던 14살 때 이명수체육단 선수로 입단했고, 동시에 군 경력도 시작됐다.
체육단 선수들에겐 군복이 지급됐지만, 시내로 나갈 때는 사복을 입어도 무방했다. 윤희는 오전에는 학교에 다니고, 오후엔 훈련을 했다. 평양 용성 구역 건지리에 있는 이명수체육단에는 축구, 마라톤, 스키 세 가지 종목에 300여명의 선수가 있었다.
스키 선수들은 1년 중 절반은 평양에 있었지만, 겨울 시즌 6개월은 늘 삼지연에 전지훈련을 나갔다. 11월부터 훈련을 시작해 국내 대회를 준비하는데, 이듬해 2월 백두산상 체육대회, 3월 공화국선수권대회, 4월 만경대상 경기대회를 치러야 한다. 대회에서 우승해봐야 공화국선수권 대회만 상품이 있을 뿐 아무런 경제적 보상은 없었다.
윤희는 선수단에 입단한지 2년 뒤인 1995년 공화국선수권대회에서 동메달을 땄다. 동시에 국가대표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그가 선택한 종목은 바이애슬론이었다. 사격 훈련할 때엔 수백 발씩 총 쏘는 날도 있었는데, 하루는 700발을 쏜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의 노력은 빛이 바랬다. 1990년대 중반은 북한 체육이 가장 암흑기를 걷던 때이기도 했다. 1991년 8월 북한 유도 국가대표 이창수가 스페인 바르셀로나 세계선수권대회에 참가했다가 귀국 도중 탈북하는 사건이 벌어지자, 격노한 김정일은 2년 동안 북한 선수들의 국제대회 참가를 금지시켰다. 이 때문에 많은 쟁쟁한 선수들이 선수 생활을 접고 은퇴했다. 1991년 영국 셰필드 유니버시아드대회에서 3관왕을 차지했던 리듬체조 선수 이경희도 이때 선수생활을 은퇴했고, 2007년 탈북해 한국에 왔다.
국제대회 참가 규정이 풀리나 싶었는데 이번엔 김일성이 사망했다. 1994년 김일성 사망 후 갑자기 ‘유훈관철’이라는 말이 생겨나더니 체육계에도 여파가 밀려왔다. 김정일이 “국제대회에 나가 좋은 성과를 내지 못하는 사람들은 유훈관철을 못한 것이니, 그렇게 나라 돈을 탕진할 바에는 3년 동안 내보내지 말라”고 한 것이다. 한마디로 나라에 돈이 없으니 등수에 들 수 있는 사람만 엄격하게 구별해 내보내라는 지시였다.
윤희가 선택한 바이애슬론은 국제대회 메달권과 거리가 멀었다. 윤희는 국제대회에 나간 경험이 있는 나이 많은 선배 언니가 해줬던 말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국제대회에 나가 우리 선수들이 메달을 따는 건 불가능해. 오르막은 어떻게 악으로 깡으로 따라 붙을 수 있지만 내리막과 평지에 들어서면 거리가 쭉쭉 벌어져. 유럽 선수들은 키도 크고 몸무게도 많고, 힘도 좋아서 우리가 그 체력을 따라갈 수가 없어.”
게다가 장비도 차이가 컸다. 국가대표 선수들이 사용하는 스키는 러시아제 등 그나마 수입품이긴 하지만, 그래도 서구권 세계 정상급 선수들이 사용하는 장비와는 질적 격차가 심했다. 좋지도 못한 스키도 수입제 중요 장비라고 선수들은 끔찍하게 아끼며 탔다.
● 호위사령부 여성 대원
선수단에선 기록을 매우 중시했다. 나이에 상관없이 기록이 좋은 사람은 1조, 기록이 떨어지면 2조에 속했다. 항상 함께 훈련하던 친구라도 기록 측정이 끝나면 식사칸부터 달라졌다. 1조는 이밥에 고기를 풍족하게 먹였지만, 2조는 고기는 언감생심 구경도 못하고 시래기 국을 먹었다. 시래기 국을 먹다가 고기 먹는 1조를 제치고 올라간다는 건 힘든 일이었다. 2조에 속하면 훈련할 때 1조의 장비도 들어주어야 했다.
국가대표급 기록을 갖고 있던 윤희는 1996년 급성 맹장염에 걸려 수술을 받고 일주일 동안 입원하게 됐다. 입원생활은 너무나 편안하고 달콤했다. 침상에 누워 지나온 날을 돌아보니, 언제 제대로 쉰 적이 없었다. 오직 훈련만이 인생의 유일한 목표인 듯 하루도 편히 쉬지 못하고 달려왔는데, 그렇게 훈련해봐야 국제대회에도 못나가는 신세가 처량했다.
그게 심경의 변화를 일으켰는지, 퇴원한 뒤 그의 기록은 자꾸 떨어지더니 그해 급기야 2조로 밀려났다. 국가대표 자격도 박탈됐다. 2조에 가서 다른 선수들의 장비까지 들어주는 처지가 되니 더 서글펐다.
그렇게 살다보니 선수 생활을 더 할 욕구도 사라졌다. 은퇴를 결심했다. 이럴 바엔 일반 부대에 가서 노동당에 입당이라도 한 뒤 집에 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는 선수단 간부들을 찾아가 졸랐다. 간부들도 처음엔 안 된다고 하더니 그가 계속 고집을 피우자 어쩔 수 없이 승인했다.
윤희의 경우는 14살에 이미 군에 입대한 것으로 돼 있기 때문에 일반 부대에 갈 때 새로 입대로 취급하지 않고 조동으로 처리한다. 그가 속한 체육단이 김 씨 패밀리를 경호하는 부대인 호위사령부(963군부대) 소속이기 때문에, 그는 1998년에 963군부대 967기갑여단 산하 고사기관총 여성중대로 옮겨갔다. 기갑여단 산하에 여성 중대가 2개가 있는데, 이들은 평양 삼석구역에 주둔하면서 금수산기념궁전 등을 방어하는 임무를 맡았다.
● 얼음물로 목욕하는 중대
윤희네 중대엔 14.5㎜ 4신 고사총 12정이 있었다. 6명으로 구성된 분대가 기관총 1정을 맡았다. 그 외 지휘소대, 남성들로 구성된 견인차 운전수 10여명이 중대에 소속돼 있었다.
그는 일반 부대에 가자마자 죽었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아무리 고난의 행군 시기라고 해도 선수단은 그래도 배는 곯지 않았다. 그런데 그가 간 중대에서는 옥수수를 통으로 삶았고, 토끼풀을 반찬으로 먹었다. 그마저도 양이 충분하지 않았다. 열악하다곤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그래도 체육단보다는 일반 부대에 있어야 노동당에 입당할 확률이 높기 때문에 그는 이를 악물고 버티기로 했다.
부대에 간지 일주일 만에 덜컥 무좀에 걸렸다. 신고 간 신발을 고참들에게 빼앗기고 누가 신던 낡은 운동화를 받았는데, 새벽 4시부터 기상해 잠잘 때까지 농사일을 시켜 신발을 벗을 틈이 없었다.
경계근무를 서고 들어가면 부업 농사일이 기다리고, 그걸 끝내고 돌아오면 또 당직이 기다렸다. 선수단에서 그 혹독한 훈련을 견딘 그였지만, 일반 부대 생활은 다른 차원의 악몽이었다. 부대에 전출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영양실조에 걸리기도 했다.
김 씨 일가를 경호하기 위해 출신성분까지 보고 특별히 선발한 부대인 호위사령부가 사정이 그랬으니 그때 다른 부대의 상황은 더 말로 설명할 필요도 없다.
그나마 호위사령부라고 다른 부대와 구별되는 점은 총을 매년 30발은 쏘게 했다는 것이다. 윤희는 한국에 와서 군인들이 사격을 한 뒤 탄피를 엄격하게 수거하는 것을 보고 놀랐다. 북한군은 탄피를 수거하지 않는다. 호위사령부는 또 여성들에겐 종이로 된 생리대도 공급했는데, 일반 부대엔 없는 것이었다.
중대에 목욕탕이 있긴 했지만, 여름에 부업농사가 한창일 때엔 일주일에 주말 한번이나 목욕을 할 시간을 주었다. 저녁에 씻는 시간이 주어지지만, 손이 빠른 여대원들이나 발까지 씻을 수 있지, 손이 느리면 신발을 벗다가 병실로 뛰어 들어가야 했다.
겨울은 더 열악했다. 전기가 오지 않아 목욕탕 물을 덥히지 못할 때가 비일비재했는데, 주말에 전기가 오지 않으면 욕조의 얼음을 까고 목욕을 시켰다. 얼음물을 몸에 붓기 전 대원들은 마찰열을 만들어 몸을 예열하기 위해 서로 몸을 열심히 비벼댔다.
● 하이힐 신은 호위사령부 여대원들
윤희가 기관총 중대에 옮겨가기 직전인 1997년 김정일은 급작스럽게 북한군 복무기간을 10년에서 13년으로 늘이라는 지시를 하달했다. 점점 부족해지는 병력 숫자를 그런 식으로 보충하려 한 것이다. 여성도 7년 복무기간이 10년으로 늘었다.
제대해 집에 갈 날만 기다리던 병사들에겐 청천병력 같은 지시였다. 아무리 장군님 지시라고 해도 이 지시에는 모두가 부글부글 끓었다.
윤희가 부대에 갔을 때는 군기가 말이 아니었다. 17살에 입대해 7년 복무를 채운 여대원들은 거의 부대 규율 생활을 하지 않았다. 주말에는 사복에 파마머리, 하이힐을 신고 평양 시내에 나가 연애를 하는 게 일상이 됐다. 당시 북한에선 여성의 결혼 적정 연령을 24세쯤으로 보았고, 27세면 노처녀라고 잘 거들떠보지도 않을 때였다. 그러니 제대하기 전에 남자를 잡아야 한다는 다급함에 누구나 초조해졌던 것.
남자 부대도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 만 30세에 제대해 집에 가서 언제 여자를 소개받고, 연애하고 애를 낳느냐는 자조가 부대를 휩쓸고, 나이든 고참들은 주둔지 인근에 나가 여성들을 유혹하기 시작했다. 제대할 때 아이를 안고 간다는 것이 이들의 목표였다. 어느 부대를 막론하고 주둔지 인근에 처갓집을 만들고 거기에 박혀 사는 대원들이 속출했다.
그러다 보니 북한군 전체의 군기가 이루 말할 수 없이 풀어졌다. 몇 년 뒤 김정은은 복무기간 연장의 부작용을 인식하고 제대 정년을 원상복귀시켰다.
군기가 떨어지면서 부대에선 과거에 없던 사건들도 자주 터져 시끄러웠다. 윤희는 중대에서 한 번은 총알이 사라져 일주일 동안 잠을 못자고 벌을 선 적이 있었다. 김정일을 경호하는 부대에서 총탄이 없어진다는 것은 매우 중대한 사건이었다.
조사 내려온 젊은 보위부 조사관은 중대원들을 병실에 가두고 차렷 자세를 취하게 한 뒤 총알을 빼간 사람이 나올 때까지 자지 못하게 했다. 서서 졸다가 쓰러지는 대원들이 속출했다.
일주일쯤 지나서 나이든 보위부 사람이 나타나더니 젊은 조사관을 향해 “이렇게 병실에 세워두면 총탄을 몰래 꺼내놓고 싶어도 어떻게 꺼내놓겠냐. 나가서 총알을 찾게 해야지”라고 선심 쓰듯 말했다. 온 중대를 총알을 찾으라고 산에 달라붙게 했는데 저녁에 사라진 총알이 한 병사의 탄창주머니에서 나왔다. 공교롭게도 그 병사와 윤희는 한 근무조였는데, 이후 윤희가 총알을 훈친 사람으로 오인 받아 며칠 동안 각종 조사를 받으며 감옥에 갈 뻔했다. 다행히 중대장과 소대장이 “이 대원은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다”고 적극 보증해줘 풀려날 수 있었다.
몇 년 뒤에도 총알 분실 사건은 또 터졌다. 이때는 하루 만에 총알을 찾아 중대장 선에서 몰래 사건을 덮었다. 당시 부소대장이던 윤희는 중대장 방에 갔다가 잘못을 고백하는 진술서를 우연히 보고 매우 놀랐다. 중대에서 가장 말이 없고 내성적이던 대원이 훔쳤던 것이다. 고참이 근무시간에 졸았다고 한 시간 더 연장 근무를 세우자 분노한 대원이 고참을 혼내주려고 총알을 뽑아 숨겼던 것이다. 그는 진술서를 훔쳐보면서 그래도 총알을 훔친 게 총을 난사한 것보다는 낫다는 생각을 했다.
윤희는 고사총부대에서 4년을 복무하고 2002년 제대했다. 1993년에 어린 나이에 입대한 것을 감안하면 꼬박 10년을 호위사령부 소속으로 지낸 것이다. 제대하면서 노동당에도 입당했다.
● 밀수조직을 이끄는 노동당원
제대한 윤희는 가족이 사는 양강도 보천군에 돌아왔다. 국가에서 그에게 임명한 직업은 보천군혁명박물관 관리원이었다.
북한은 1937년에 김일성이 국내 진공 전투를 벌였다고 선전하는 보천보를 거대한 사적지로 만들어놨다. 당시 경찰서, 면사무소 등을 옛 모습 그대로 재현해 놓고 백두산 답사를 가는 사람들이 들러 견학하게 했다.
보천보전투는 실제로는 김일성부대 참모장인 왕작주가 인솔한 부대가 진행한 전투이고, 당시 김일성은 압록강을 건너오지도 않았다. 그러나 역사 조작의 달인인 북한은 김일성이 보천보전투 이후 인민들을 모아놓고 조국 광복의 희망을 심어주는 연설을 했다면서 동상과 건물, 박물관 등으로 거대한 ‘혁명신앙구역’으로 만들었다.
박물관에서 그는 청소하고 먼지를 닦는 등의 허드레 일을 했다. 보천군에선 이런 자리도 여성들에게 쉽게 돌아가지 않았지만, 그는 호위사령부 출신에 당원이라 가능했다. 보통 여성들은 농사를 짓거나 돌격대에 나가 험한 육체노동에 시달렸다.
당시 북한 어디가나 그랬듯이 혁명박물관 관리원이라고 배급을 주는 것은 아니었다. 먹고 살기 위해선 장사를 해야 했는데, 윤희는 처음에 비닐포대를 농촌에 파는 일을 했다. 농촌에선 포대가 귀했는데, 이걸 봄에 가져다주고 가을에 옥수수 등 곡식을 받아와 팔았다.
그럭저럭 먹고 살 수는 있었지만 겨우 풀칠하는 정도였다. 반면 압록강을 끼고 있는 지리적 조건을 이용해 중국과 밀수하는 사람들은 꽤 잘 살았다.
그도 언제부터인가 밀수를 하기 시작했다. 폐철, 귀금속, 산열매 등을 닥치는 대로 메고 압록강을 건너가 중국에 팔았다. 돌아올 때는 쌀이나 사카린 등을 받아와 장마당에서 팔았다. 밀수할 때는 국경경비대에 뇌물을 주는데, 이들은 눈감아주는 인원수에 맞춰 돈을 받아갔다. 뇌물에 들어가는 돈을 줄이려면 한 사람당 메고 가는 양을 늘려야 했다. 그러다 보니 40㎏ 정도 메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었고, 보통 60㎏을 메고 압록강을 건넌다. 한 번은 욕심을 내서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메고 가 중국에서 무게를 재보니 저울에 90㎏이 찍히기도 했다. 압록강을 건널 때 언제 잡힐지 모르니 초인간적인 힘이 나오는 것이다.
점점 윤희 옆에 사람들이 붙기 시작했다. 많을 때는 10~15명을 모아 짐을 메고 한꺼번에 강을 넘기도 했다. 그가 밀수조직의 두목 격이 된 것은 부친이 안전원이라 권력 기관에서 함부로 못했던 이유가 컸다.
그는 2013년 탈북할 때까지 밀수를 하다가 세 번 잡혔다. 경비대에 뇌물을 주면 잡힐 일이 없었지만, 체포된 세 번은 모두 뇌물 주는 돈이 아까워 국경경비대가 자리 비운 틈을 노리다가 잡힌 것이다. 하지만 노동단련대로 가서 대개 나흘 정도 있다가 나왔다. 아버지가 안전원이라 다들 봐줬던 것이다.
보천군은 국경 옆이라 밀수를 하지 말라는 강연이 참 많았다. 밀수 근절 회의에 참가하면 그는 속으로 웃음을 참기 어려웠다. 실은 그 회의를 주재하는 당 세포비서도 밀수로 먹고 살고 있기 때문이다. 회의를 하라고 하니 어쩔 수 없이 회의는 열리고, 참가자들은 가면을 쓴 채 남의 일인 듯 당의 지시를 받아 적었다. 그리고 회의가 끝나면 또 밀수하러 갔다.
● 친위부대 출신 남동생과 탈북
밀수를 하면서 그는 중국이 잘 사는 곳임을 눈으로 보게 됐다.
“윤희야, 중국이나 남조선에 가면 다들 잘 산다고 하더라. 같이 가자”는 친구들의 권유도 있었다. 그때마다 그는 “너나 가서 잘 살아. 난 여기서 살 거야”라고 대답했다.
호위사령부에서 받은 세뇌와 당원이라는 생각이 생각보다 오래 그의 머리 속에 잠재돼 있었다. 그가 막상 북한을 뜬 것은 2009년에 시작한 결혼생활이 몇 년 못 가 실패로 끝난 뒤였다. 깊은 좌절감에 낙담해 있을 때 한국에 먼저 간 친구와 전화를 하게 됐다.
“윤희야, 남조선에는 색텔레비(컬러TV)와 비디오가 쓰레기장에 가득해.”
그 말이 귀에 박혔다. 잘 산다는 것은 알았지만, 북한에서 부자를 가르는 가장 중요한 가전제품인 색텔레비가 쓰레기로 버려진다고. 상상해보니 남조선은 얼마나 잘 사는지 알 것 같았다. 북에서 이혼녀라는 굴레를 쓰고 살기보단 남조선에 가서 새 삶을 살아야겠다고 그는 결심했다.
그가 탈북할 결심을 남동생에게 말하자, 동생은 그런 위험한 길에 혼자 어떻게 가겠냐며 자신이 보호자로 따라가겠다고 자처했다.
남동생은 김정일 친위부대인 974부대에 근무하고 제대했다. 동생이 걸어온 길도 누나와 비슷했다. 15살 때부터 스키를 탔고, 군에 입대할 때엔 5과로 뽑혀 김정일 경호부대에 갔다. 11년을 복무하고 2007년 제대했는데 이후 일이 잘 풀리지 않았다.
974부대는 제대할 때 원하는 대학에 보내주든가, 원하는 좋은 직장에 넣어준다. 하지만 제대한 뒤 결혼한 아내의 친척 중에 탈북한 사람이 있어 그는 결국 전문대학을 졸업할 수밖에 없었다.
11년 동안 가장 철저한 세뇌를 받는 부대에 근무했어도 동생의 충성심은 누나보다 빨리 사라졌다.
둘은 몇 달 동안 탈북할 준비를 했다. 한국에 있는 지인을 통해 탈북 브로커와 연결됐다. 2013년 1월 2일 윤희는 가족까지 동반한 남동생과 함께 탈북길에 올랐다. 압록강을 넘어가느라 젖은 상태에서 브로커의 차를 7시간 기다리며 얼어 죽을 뻔하기도 했지만, 그 외에는 이동이 순조로웠다. 탈북한 지 보름 만에 이들은 동남아로 넘어갔고, 2월 15일 한국에 입국했다. 탈북 후 한달 반 만에 한국에 입국한 것은 탈북민 사이에선 ‘직행’이라고 불리는 아주 부러운 케이스이다. 입국한 뒤 조사기관과 하나원을 거쳐 그해 8월 청주에 정착했다.
● “한국군이 훨씬 강합니다.”
그리고 10년이 지났다. 한국에서의 10년은 그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는 “그렇게 큰 어려움이나 감동적인 사연도 없이 너무 빠르게 시간이 지났다”고 회상했다. 청주에 정착한 지 한 달 만에 돼지막창 식당에서 알바를 하는 것으로 일을 시작했다. 어떤 사람들에겐 그 일이 힘든 일일지 모르지만, 숱한 고생을 겪고 온 그에겐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었다.
청주에 있다 얼마 안 돼 취직센터를 통해 고속도로 톨게이트 직원으로 취직해 5년을 일했다. 집에서 톨게이트까지 출근하는데 버스로 2시간이나 걸렸지만, 그는 5년 동안 다른 곳으로 옮기지 않고 버텼다.
“하나원에 있을 때 탈북민들은 사회에 나가면 3년 동안 여기저기 옮겨 다니느라 제대로 정착을 못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래서 저는 3년은 어떻게든 한 직장에서 버텨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5년이 됐습니다.”
톨게이트 직원 월급은 많지 않았다. 월 170만 원을 받아 이중 100만 원은 무조건 저축했다. 그는 첫 월급으로 9만 원짜리 빨간 패딩을 사 입었을 때를 가장 행복했던 순간 중 하나로 기억한다고 했다.
그리고 돈을 모아 2019년 광주에 호프집을 차렸는데 이듬해 코로나가 터지는 바람에 2021년 문을 닫아야 했다. 남들은 크게 좌절할 법도 하지만, 북한군에서 10년 단련된 그는 씩씩했다. “나만 망한 것도 아니고, 살다 보면 이런 일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죠.”
한국에 와서 오랫동안 서비스 업종에 종사했다. 그런 일을 하면서 배운 교훈도 심플했다. “사람 사는 세상은 똑같아요. 여기도 별의별 이상한 사람들이 적지 않지만, 세상 어디에 그런 인간들이 없는 데가 있나요. 어딜 가든 피할 수 없는 거라면 지금 스트레스 받을 시간에 즐기는 게 낫지 않을까요.”
호프집을 접은 뒤 그는 지난해에 광명으로 이사를 왔다. 수도권에 가면 좀 더 좋은 취직 기회가 있을 것 같아서였다.
호위사령부 여성 군인 출신이라는 드문 경력 때문에 군부대에 안보강연을 다니기 시작했는데, 지금은 부르는 곳이 점점 많아져서 강연이 주수입원이 됐다. 한국 군인들은 정신력이 약하다는 말을 자주 들었지만, 직접 찾아가 만나보니 정신력에 있어서도 북한군을 당연히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북한군은 오직 수령결사정신으로만 세뇌돼 살잖아요. 그런데 제가 만나본 군인들은 조국과 국민, 가족을 위해 싸우는 사람들이었어요. 그게 맞죠. 보지도 못한 수령을 어떻게 목숨 걸고 지킵니까.”
올해 5월 그는 탈북민으로 구성된 ‘평양초롱꽃예술단’ 대표로 임명됐다. 이 예술단은 공연으로 먹고 사는 다른 예술단과는 다르게 운영된다. 12명의 단원들은 모두 자기 직업이 있고, 주말에 모여 연습을 한다. 일종의 취미활동인 셈이다. 그러다가 가끔 공연해달라는 요청이 오면 차에 장비를 싣고 달려간다.
아직은 한국에 와서 성공했다고 말할 수도 없고 돈을 크게 벌지도 못하지만 윤희는 한국 생활이 너무 만족스럽다.
“북한에선 잘 살려고 엄청 노력했어요. 어려서부터 피나게 연습해 국가대표도 됐고, 당원이 되려고 얼음물로 목욕하며 4년을 버텼어요. 제대 뒤에도 밀수 마대를 메고 국경을 넘나들었고요. 그런데 아무리 노력해도 계속 고난만 이어지지 삶이 별로 달라지지 않았어요. 그런데 한국에 와보니, 제일 좋은 점은 노력한 만큼 잘 살 수 있다는 겁니다. 이 좋은 세상에서 제가 적게 벌면 적게 노력한 탓이니, 못 산다고 불평하거나 누굴 원망할 일이 없습니다.”
그를 보니 이런 낙천적인 정신은 타고 난 것인지, 아니면 오랜 군 생활이 길러낸 것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다만 분명하게 느껴지는 점은 10년, 20년 뒤 박윤희 씨는 어느 자리에서 어떤 삶을 산다고 해도 탈북해 한국에 온 것에 더 큰 만족을 느끼며, 여전히 웃으며 씩씩하게 살고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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