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가 된 남탕 놀이터 된 여탕… 침체한 목욕탕 활성화 프로젝트 ‘몰래탕’[현장속으로]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6월 14일 14시 35분


“늘 오늘처럼 활기가 도는 동네목욕탕을 만들 겁니다.”

13일 오후 부산 영도구 봉래탕 3층 남탕. 목욕탕이 쉬는 날인 이날 남탕에는 20대 여성을 비롯한 10여 명이 목욕 가운을 걸치거나 수건을 머리에 두른 뒤 밝게 웃으며 사진을 찍고 있었다. ‘매끈목욕연구소’의 안지현 소장은 “이용객 감소로 어려움을 겪는 목욕탕이 쉬는 날 이처럼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내는 곳으로 거듭났다”며 활짝 웃었다.

6일 부산 영도구 봉래탕에서 개최된 동네목욕탕 활성화 프로젝트인 ‘몰래탕’을 찾은 방문객이 온탕에 조성한 볼풀장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매끈목욕연구소 제공
1986년 문을 연 봉래탕은 여느 동네목욕탕과 마찬가지로 해마다 이용객이 줄었다. 집에서 샤워하는 문화가 자리 잡고 최신시설을 갖춘 대형 사우나로 향하는 이가 많아진 까닭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다중이용시설을 꺼리는 문화가 확산한 것도 한몫했다.

70대 이상 노인이 주로 찾던 봉래탕에 젊은층이 북적이며 생기가 돈 것은 매끈목욕연구소가 기획한 ‘몰래탕’ 프로젝트가 시행됐기 때문이다. 정기휴무일에 목욕탕을 이색 체험 공간으로 탈바꿈시킨 뒤 주인 몰래 다양한 손님을 받겠다는 것이 프로젝트의 취지다. 폐업한 목욕탕을 카페 등의 공간으로 꾸민 것과는 차이가 있다. 욕탕 바닥 곳곳에 물기가 마르지 않은 영업장에 이색 체험 공간이 꾸며졌기 때문이다. 뜨거운 물을 빼낸 온탕은 노란색 플라스틱 공이 가득 찬 볼풀장으로 바뀌었고, 냉탕은 농구공을 굴려 10개의 샴푸통을 쓰러트리는 볼링장으로 만들어졌다. 탈의실에서는 캐릭터 때수건 등 매끈목욕연구소가 제작한 30종의 굿즈가 판매됐다. 목욕탕 곳곳에는 인증사진을 찍는 청년과 어린 자녀에게 등밀이 기계 사용 시범을 보이는 아버지 등 방문객의 웃음소리가 넘쳐났다.

매끈목욕연구소는 동네목욕탕 활성화를 위해 13일 부산 영도구 봉래탕에서 ‘몰래탕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방문객이 농구공을 굴려 10개의 샴푸를 쓰러트리는 이색 체험을 할 수 있게 냉탕을 개조했다. 김화영 기자 run@donga.com
매끈목욕연구소는 이날과 현충일인 6일 몰래탕 프로젝트를 진행했으며 이틀 동안 500명 이상이 다녀갔다고 설명했다. 대학생 김모 씨(24·여)는 “금녀의 공간인 남탕에서 사진을 찍는 이색 추억을 쌓았다”며 “오래된 영화에서나 보던 남탕 이용원의 이발의자를 직접 보게 되니 신기하다”고 소감을 전했다.

행사를 주최한 매끈목욕연구소는 지역 공간을 새롭게 꾸미는 업체인 싸이트블랜딩의 구성원 9명이 지난달 결성한 프로젝트 모임이다. 이들은 부산이 이태리타월(때수건)과 등밀이 기계 등을 전국에 확산한 ‘국내 목욕문화의 종가’라는 점에 주목하며, 부산에서 새롭게 정립한 목욕탕 문화를 전국에 확산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안 소장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목욕탕 산업의 쇠락을 고민하는 일본이 시행 중인 프로젝트에 힌트를 얻어 몰래탕부터 기획했다”며 “일본은 목욕탕에서 주민 참여 요가 프로그램을 시행하고, 유휴공간을 만화카페로 조성하는 등 이미 다양한 전략을 시행 중”이라고 설명했다. 아버지에 이어 목욕탕을 운영 중인 이영훈 봉래탕 사장(50)은 “몰래탕 같은 이색 이벤트를 자체적으로 시행하는 것을 고민하고 있다”며 “단순히 때만 미는 곳이 아니라 더 많은 주민이 편안히 휴식을 취하는 공간으로 꾸미고 싶다”고 말했다.

매끈목욕연구소는 몰래탕 프로젝트를 지역 곳곳에서 시행할 계획이다. 안 소장은 “최근 서구의 한 목욕탕에서는 북토크 행사를 개최했다”며 “서구와 동구 등 원도심의 오래된 목욕탕에서 몰래탕 같은 재밌는 이벤트를 꾸준히 진행할 것”이라고 말했다.

6일 부산 영도구 봉래탕에서 개최된 동네목욕탕 활성화 프로젝트인 ‘몰래탕’을 찾은 방문객이 탈의실에서 매끈목욕연구소가 제작한 상품을 구경하고 있다. 매끈목욕연구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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