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사교육 논란]
학원가 ‘준킬러 문항’ 설명회… 불안한 학생들 더 몰려
사교육계 “달라질 수능 대비해야”
정부 대책 내자마자 ‘불안 마케팅’
윤석열 대통령의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 발언 이후 교육 현장에 파장이 이어지는 가운데 사교육계가 발 빠르게 대응하고 있다. 동아일보가 20일 찾아간 ‘대치동-목동 학원가’에서는 올 수능 출제 기조가 어떻게 바뀔지를 예측하는 학원 설명회에 사람들이 몰렸다.
윤 대통령이 ‘킬러 문항’(초고난도 문항)을 수능에서 배제하겠다고 하자 학원들은 ‘준(準)킬러 문항’(킬러 문항보다는 다소 쉬운 문항) 대비 중심으로 커리큘럼 재편에 나섰다. 달라지는 수능에 불안감을 느낀 학생과 학부모들은 그런 학원에 의존하려는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다.
이날 오후 서울 강남구 대치동의 A학원 6층 대입 설명회장에서 만난 반수생 김모 씨(20)는 “수능을 사교육 없이 혼자 준비하려 했는데, 정부 발표 보고 학원에 등록하러 왔다. ‘물수능’(쉬운 수능)이 되면 한 문제만 실수해도 등급이 떨어진다”고 말했다. 이날 설명회 시작 30분 전부터 학부모와 학생들은 100석이 넘는 행사장을 채웠다. “유명 강사가 급변한 수능 출제 방향과 입시 전략을 다룰 것”이라는 소문이 자자했다. 학부모 이모 씨(48)는 “아이가 너무 불안해해서 나라도 설명회를 다니는 것”이라고 했다. 학원 관계자는 “학생들에게 지금까지 공부한 책은 다 버리고 ‘준킬러’ 문항 집중 대비를 시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며 “수능, 입시 전략 모두 새로 짜야 한다”고 말했다.
이날 정부 관계자는 “수능 출제위원 출신 인사를 포함한 교육계 인사들과 대형 입시학원 사이의 카르텔을 끊는 것이 급선무”라고 말했다. 앞서 윤 대통령과 정부 여당은 ‘발본색원’ 등의 표현을 써가며 사교육을 잡겠다고 나섰다. 하지만 교육 현장에서는 정부 발표 뒤 오히려 불확실성과 불안감에 휩싸인 학생들이 학원에 몰려가는 ‘역설’이 일어나고 있는 셈이다.
발빠른 학원, 불안한 수험생 ‘킬러 문항 배제’ 정부 발표 발맞춰 ‘다양한 유형 문제 많이 풀기’ 전환 정부 “대형학원과 출제위원출신 사교육 카르텔 끊는 게 급선무”
“올해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냐는 문의가 며칠 새 쏟아지고 있다.”(서울 양천구 목동 B학원 상담실장)
“곧 반수생반 개강인데 등록 학생이 더 늘어날 수도 있어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서울 강남구 대치동 C학원 관계자)
기자가 20일 종일 돌아본 서울 목동, 대치동 학원가는 긴장 속에 숨가쁘게 돌아가는 분위기였다. 기존에 ‘킬러 문항 대비’에 집중했던 학원들이 정부 발표에 맞춰 대응 전략을 바꾸고 있었다. 윤석열 대통령의 발언대로 ‘킬러 문항’은 아니면서도 공교육 과정 내의 분별력 있는 문제들이 수능에 대거 출제된다면 ‘단시간 안에 중상 난도의 문제를 빨리 많이 푸는 것’이 더 중요해지기 때문이다.
● ‘출제위원 출신’ 마케팅도 기승
목동 B학원 단과반 수업을 등록하러 온 삼수생 이모 씨(20)는 기자에게 “준킬러 문항 대비를 이 학원이 잘한다고 추천을 받고 왔다”고 말했다. 대치동에서 만난 고3 수험생 권모 양(18)은 “학원 선생님들이 준킬러 문항이 많아지면 모의고사를 많이 풀어 실수를 줄여야 한다고 했다”며 “실모(실전모의고사) 특강을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특히 최상위권은 수능에서 킬러 문항이 빠지면 ‘실수가 등급을 결정하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기 때문에 실수를 최소화하기 위해 더욱 애를 쓴다. 하반기(7∼12월) 학원가의 주요 입시 전략은 학생들에게 ‘기계적 문제풀이’를 최대치로 늘려 실수를 줄이는 데 집중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수능 출제 기관인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이 평가원장 사퇴로 뉴스의 중심에 선 가운데 ‘출제위원 경력 마케팅’도 기승을 부렸다. 서울의 한 대학 국문과 교수였던 A 씨는 아예 연구소를 차려 ‘8차례 수능 출제 경험’을 내세워 모의고사 상품을 판매하고 있다. ‘출제위원’이란 타이틀이 사교육 시장에서는 일종의 ‘황금 열쇠’로 통하기 때문이다. 입시 관계자들은 “출제위원 출신이 강남 학원으로 고액 연봉을 받고 스카우트되는 건 오래전부터 벌어진 일이긴 하다”며 “그들에게는 비밀유지 의무가 있지만, 주변에서는 수능이 끝나면 누가 올해 출제를 했는지 암암리에 소문이 돈다”고 귀띔했다.
● 사교육비 26조 원… “과열 식히기 어려워”
윤 대통령이 이례적으로 수능 ‘킬러 문항’을 직접 언급한 것은 사교육 업체와 수능 출제위원 간 ‘이권 카르텔’을 뿌리 뽑겠다는 의지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학생은 매년 줄어드는데 지난해 사교육비 규모는 역대 최대치인 26조 원에 육박했다. 중3 자녀를 둔 학부모 이모 씨는 “아직 중학생이지만 수학, 영어, 과학탐구 학원비로만 월 150만 원이 들어간다. 방학 기간 특강이라도 들으면 300만 원을 훌쩍 넘는다”고 말했다. 특목고에 다니는 고3 수험생 자녀를 둔 김모 씨(44)는 “아이가 수학 단과만 다녔는데 엊그제부터 국어도 학원을 알아보고 있다”고 했다.
학원가에서는 역대 수능 출제위원들이 강남에서 의대 진학률이 높기로 정평이 난 두 대형 학원의 연구소장급으로 영입됐고, 연구원들도 특정 학맥으로 연결됐다는 이야기가 돌고 있다. 출제위원 출신들이 부르는 ‘문제 개발비’는 문항당 100만 원을 호가하지만 적중률이 높다고 소문 나 거래가 유지된다.
연 3000억 원대 매출을 기록한 한 학원은 2010년대 업계에 뛰어든 후발 주자이지만 킬러 문항 적중으로 입소문을 탔다. 이 학원은 ‘전국 의대 합격자의 절반을 배출했다’ 식의 마케팅으로 최상위권 학생들을 끌어들였고, 이들이 대입에서 좋은 성과를 내면 이를 다시 마케팅으로 써먹었다. 대통령실은 이런 구조를 ‘카르텔’로 보고 있는 것이다. 외신도 한국의 입시 현실을 조명했다. 미국 블룸버그통신은 “한국 입시는 집안 형편이 넉넉해 값비싼 사설 학원을 이용할 수 있는 이들에게 유리하다”고 이날 보도했다. 장지환 배재고 교사는 “수능이 아니라 입시제도 자체를 손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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